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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38화 (138/184)

138화

***

“단장, 이 의뢰…… 진짜 끝까지 수행할 겁니까?”

“응?”

내가 언제부터 여기에 앉아 있었더라.

신이 빚어낸 듯한 금발 머리의 미청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바위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린 채 기다란 장검을 세심히 손질하는 중이었다. 검면을 연마제를 섞어 바른 천으로 닦아 내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던 검이었다.

“아마 그래야겠지? 그러려고 의뢰를 받은 거니까.”

“…….”

데니스 바냐는 단장의 그 여유로운 자세야말로 소름끼치는 일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렇게 생각한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는 겉은 험악하게 생겼어도 속은 착한 사람이었다. 단장은 사적인 감정과 일을 철저하게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저렇게 느긋할 수 있는 거겠지.

그는 고개를 양옆으로 휙휙 흔들어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둘을 중심으로 바닥에 늘어져 있는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뢰를 성공하기 위해 죽여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바냐는 그제야 저 사람들을 죽인 것이 자신임을 실감하고는 손을 잘게 떨면서 눈을 가렸다.

“바냐, 너무 슬퍼하지 마.”

용병단 단장이라 불린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바냐의 절망을 걷어 냈다.

“그래도 결국엔 저게 우리 손에 들어왔잖아.”

바냐는 단장이 턱짓으로 가리킨 ‘저것’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자루가 놓여 있었다.

바냐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구했으면 빨리 꺼내 줘야지, 단장! 도대체 지금까지 뭐 하고 있었어.”

그는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런, 내가 꺼내 줘야 했던 거야? 몰랐네.”

그러나 금발의 미남은 옅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을 뿐이었다. 바냐는 ‘역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라고 생각하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갑자기 납치당해 자루에 들어간 의뢰인의 아들을 꺼내 주는 것이 중요했다.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자루가 바냐의 발소리에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고 오해한 것일지도 몰랐다. 바냐는 자루의 매듭을 손으로 잡아채며 그 안의 소년을 진정시키려 했다.

“워, 워. 당신을 해치려 하는 게 아니라, 구하려고 하는 거요.”

구하려고? 금발 머리의 단장은 바냐의 이야기에 고개를 기울였다. 바냐의 말에는 오류가 있었다.

“바냐, 제대로 설명해야지. 의뢰인이 내건 조건에 해당되면 곧바로 죽여야 해.”

“……단장은 거기서 좀 닥치고 있으십쇼.”

그들의 의뢰인은 저 소년을 구하라는 의뢰를 내걸었다. 그러면서 덧붙인 조건이 있었는데, 그 조건에 따라 소년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인지 죽여야 하는지가 걸려 있었다. 의뢰인의 조건을 같이 들었던 바냐는 이 의뢰를 수락하는 게 맞는지 긴가민가했지만, 단장은 흔쾌히 수락했던 것이다.

여전히 꿈틀대며 옆으로 굴러가려는 움직임에 바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매듭을 풀고 자루 입구를 벌려 주었다.

“자, 갇혀 있느라 힘들었지?”

그 안에 있던 소년의 몸이 드러났다. 밝은 은발을 가진 소년은 눈에는 검은 천을 두르고, 팔은 등 뒤로 묶인 채 분하다는 듯 숨을 쉬고 있었다. 자루 안에서 하도 이리저리 치였던지 그의 온몸은 흙투성이었다.

그는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천 때문에 상대방의 위치가 보이지 않은 탓에 엉뚱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자신을 꺼내 준 바냐가 아닌, 금발 머리의 남자와 얼굴을 마주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금발 머리 남자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그런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들, 나를 왜 납치한 거야. 날 돌려보내 준다면 의뢰금의 두 배를 주겠어.”

은발 머리의 소년은 반항심 가득한 목소리로 제안을 했다. 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검만 쥐여 주면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목소리인데? 건방진 자식. 단장은 흐음, 하고 턱에 손을 가져다 대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바냐.”

예? 바냐는 단장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서 안대를 벗겨.”

그래야 저놈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단장은 씨익 웃으며 소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바냐는 단장의 명령에 입을 꾹 다물었다.

“…….”

소년 또한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입술을 비틀어 올린 채 잠자코 기다렸다. 지금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용병들이 그의 아군인지 적군인지 당장은 알 수 없으니, 그들의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바냐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소년의 눈가로 손을 가져다 댔다. 제발, 제발 이 안대가 가리고 있는 눈이 그저 평범한 갈색이기를. 그래서 이 어린 소년을 죽일 필요가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검은 천이 바닥에 떨어졌다. 안대가 사라지자 소년은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금발 머리의 남자는 바냐보다 먼저 소년의 눈 색을 알아채고는 옅게 웃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소년 쪽으로 걸어왔다. 바냐 또한 소년의 눈을 확인한 뒤였다. 검을 챙겨 다가오는 단장의 마음을 눈치챈 바냐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대에 가려져 있던 소년의 눈은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색이었다.

“단장…… 그냥, 이 의뢰는.”

“허튼소리. 그러면 몇 달간 들인 시간과 비용은 어쩔 거야.”

금발 머리의 남자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의뢰인의 아들이라 했으니 핏줄과 관련된 쓸데없는 사감이 섞여 있을 것이 뻔했다.

“저를 죽일 겁니까?”

소년은 곧은 시선으로 금발 머리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올리자 밝은 햇빛에 남자의 금발이 반짝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응. 미안하지만 그렇게 되었어.”

“단장!”

바냐가 단장과 소년 사이로 뛰어들며 막아섰다.

“바로 죽이지 말고 고민해 봅시다!”

“바냐……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용병단에는 왜 들어왔어. 내가 계속 말했잖아. 사람들 죽이는 일은 너한테 안 맞아.”

“그런 게 맞는 사람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냥 이놈을 한적한 동네에 풀어 주는 건 어때? 굳이 죽이지 않아도 의뢰인은 눈치채지 못할 거요!”

흠…… 단장이라 불린 남자는 고민하는 척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니, 그런 건 괜히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들 뿐이야.”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남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팔을 뻗어 바냐를 옆으로 밀쳤다. 그러고는 빠르게 검을 들어 소년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인간의 몸에 검이 꽂히는 끔찍한 소리에, 바냐는 경악했다.

윽, 소년은 끓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소년의 입에서 눈동자와 똑같은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눈부시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어 무언가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하는 거지. 금발 머리의 남자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자신이 죽인 소년을 향해 고개를 살짝 내렸다.

그때였다.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며 남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아드리안.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나면 그냥 끝이야?”

“……뭐?”

종일 심드렁하던 단장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어라? 저 얼굴은 어딘가 익숙했다. 언젠가 한 번 봤던 것 같은…… 그런 묘한 기시감에 기억을 되새기려 단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년은 다시금 입을 열어 단장에게 말했다. 죽어 가는 이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나도 그냥 이렇게 너의 시간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하나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나를 떠올리게 될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아드리안.

남자는 속으로 소년이 자신을 부른 이름을 다시 되뇌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용병단을 운영하던 유희 시절 중에서…… 이런 의뢰는 받은 기억이 없었다. 남자의 완벽하던 무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진 것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발밑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머릿속을 스치는 어떤 이름 하나를 뱉어 냈다.

“……미하일?”

그러나 소년은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했다. 그가 직접 검으로 입힌 치명상 때문이었다. 남자는 눈가를 찌푸리며 피가 흘러내리는 상처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내가 죽인 건가? 미하일을? 이미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하일!”

남자는, 아니 루스는 소년의 이름을 외쳤다.

“미하일! 일어나!”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루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현실로 끌려 나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는…… 넓은 들판이 아니었던가.

루스는 감은 두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처음에는 그의 온몸을 둘러싼 부드러운 이불이 느껴졌고, 그다음에는 지금 자신이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신을 향해 갑자기 뻗어 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스는 그 팔을 빠르게 낚아채어 자신의 침대에 내리눌렀다. 그는 단번에 침입자의 목 부분을 팔로 짓누르며 말했다.

“……누구냐.”

하아, 하.

방금 잠에서 일어나 불규칙적인 호흡이었다. 루스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에게 손을 뻗었던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했다. 미하일이었다.

루스는 하아,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힘을 천천히 풀었다.

“뭐야, 너잖아. 언제 내 방에 멋대로 들어왔지?”

“……제 이름을 부르시길래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미하일은 자신의 몸 위에서 다급하게 숨을 내쉬고 있는 루스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 뭔가 불편해 보였다.

그런데 왜 내 이름을 부른 걸까. 미하일은 루스의 상태를 파악하려 질문했다.

“괜찮습니까?”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잖아.”

루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아.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미하일의 몸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휙휙 저어 방 밖을 가리켰다.

“그냥…… 그냥 꿈이야. 아니, 괴상한 악몽이라 해야겠군.”

바냐와 미하일이 나왔으니 악몽이라 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루스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며 대강 대답했다. 미하일은 그런 루스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제안했다.

“옆에 있어 드릴까요?”

뭐? 루스는 그 제안에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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