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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37화 (137/184)

137화

“언제부터 이 숲에 이렇게 큰 호수가 생겼지?”

루스는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감탄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미하일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라니, 생각치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우연히 온 것 치고 너무 괜찮은데.”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우연은 아니었으나, 미하일은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며 대답했다. 루스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 그걸로 된 것이었다. 루스는 호수 저 너머를 한동안 바라보다 천천히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여기서 잠시 앉았다 가지.”

“네.”

미하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루스의 옆에 앉자, 커다란 호수의 잔물결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그제야 숲의 상쾌한 공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고, 새소리가 귀에 들렸다. 숲의 동물들이 고개를 쳐들고 루스와 미하일을 풀숲에서 관찰했다. 그들은 루스가 드래곤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주춤거리며 몇 발자국씩 루스를 향해 걸어왔다. 특히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그들이 앉아 있는 곳 근처에 자리 잡더니 천천히 몸을 눕혔다.

한참 뒤, 루스가 말했던 ‘잠시’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진 미하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그냥 앉아 있기만 할 겁니까?”

“응.”

“…….”

이미 ‘잠시’라고 하기에는 제법 오래 앉아 있었는데. 미하일은 입을 꾹 다물고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은 미하일의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공연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내내 같은 모양으로 물결치고 있는 커다란 호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자 조용히 집중한 눈빛으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루스의 옆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하일은 나직한 말투로 은근슬쩍 그를 떠보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이렇게?”

루스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이렇게 멋진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굳이 또 뭔가를 할 필요가 없다고.”

“……그렇긴 합니다만.”

루스의 말이 완벽히 와닿지는 않았지만, 미하일은 이해하는 척 대답했다. 어쩌면 드래곤처럼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들은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상태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랐다.

“너무 평화로워서…… 좀 지루할 지경인데요.”

“이게 지루하다니 역시 아직 어리군.”

어리다고?

미하일은 루스의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스레 한마디 했다.

“……몇 시간동안 호숫가에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이는 당신뿐일 겁니다.”

“그렇게 지루하면 숙소에 먼저 들어가도 좋아.”

“물론 한참 전부터 그러고 싶었지만, 숙소로 가는 길은 아십니까?”

“뭐? 당연히.”

루스는 자연스럽게 열었던 입을 다시 닫고는 입을 비틀었다. 지금은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인간의 몸이란 사실을 잠시 잊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걷고 있는 미하일을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오기만 했기 때문에 길을 기억해 두고 있지도 않았다. 루스는 잠시간 턱을 들어 주변의 마나를 느껴 보려 했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루스는 조용한 말투로 말을 다시 이었다.

“……당연히 모르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질문했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이야기라도 할까요?”

“어떤 이야기?”

“……예를 들자면-”

흠, 미하일은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그러다가 그가 드래곤에게 궁금했던 것 하나를 결국 기억해 냈다.

“평소엔 어떤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루스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윽, 하고 싫다는 티를 냈다.

“겨우 그런 이야기? 유치해.”

“이런 식으로 소환되거나 유희를 보낼 때 외에는 보통 어디서 지내십니까?”

미하일의 질문을 들으며 루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왜 그런걸 궁금해하지?

“당신에 대해 더 궁금해졌을 뿐입니다.”

이것 외에도 루스에게 궁금한 점은 더 많았다. 미하일은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가진 드래곤에게 질문했다. 툭, 어느샌가 루스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사슴이 콧잔등으로 루스의 손을 쳤다. 축축한 사슴의 코가 느껴져서 루스는 힐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지금은 미하일과 대화 중이었다는 생각에 다시 제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왜 나에 대해 궁금해하냔 말이야. 난 그냥 네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드래곤일 뿐인데.”

아아, 미하일은 고개를 퉁명스럽게 끄덕이면서 루스의 말에서 담긴 핵심을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드리안의 시신을 찾아주고 나면 우린 다시는 얼굴 볼 일 없는 그런 사이라, 이런 일상 대화도 하기 싫다 이거군요?”

“…….”

뭐?

루스는 방금 들은 이야기에 말문이 막혀 눈만 몇 번 깜빡였다.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는데?”

비약이 심하잖아. 루스는 심술궂게 말하려다 옆에 앉은 미하일을 바라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미하일은 답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고개까지 숙이고 있었다. 루스는 곤란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검지로 몇 번 긁었다.

미하일은 호숫가의 잔디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투가 딱 그런 이야기였잖아요.”

“…….”

루스는 그런 미하일을 잠시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별 질문도 아닌데 과민하게 반응한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루스는 콧잔등을 한 번 찡그리곤 말했다.

“내 레어에서 시간을 보내.”

루스의 단호한 대답에 풀 죽은 척하던 미하일은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응? 저게 무슨 말이지? 미하일은 루스가 했던 이야기의 갈피를 알아차리자마자 천천히 입술을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왕자의 얼굴은 언제 침울했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루스는 자신이 어린 인간의 연기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도 모른 채 ‘이제 됐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미하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레어? 거기서 혼자 지내는 겁니까?”

“그래.”

루스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다가 “아.” 하고 반응했다.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니. 혼자 지내는 건 아니군.”

그 말에 미하일의 눈썹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루스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날카로운 어투로 다시 물었다.

“……뭐라고 하셨죠? 제가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미하일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겠단 듯 자신의 손안에 잡힌 잔디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평소에 혼자 지내지는 않는다고.”

“…….”

젠장, 제대로 들은 게 맞네. 미하일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혼자 지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지금이 아니라면 더는 질문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군요.”

하지만…… 미하일은 입안을 꾹 짓씹었다. 하지만, 물어보면 그가 순순히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의 이름을 이야기할 것 같아 더 물어보기 싫었다.

루스는 자신의 따뜻하고 편안한 레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다가 그곳에서 키우는 화분 몇 개를 기억해 냈다. 레어에 걸어 둔 마법의 효력이 곧 사라질 시기가 되었다. 평소라면 시간을 내서 레어에 들려 다시 마법을 걸어 두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럴 힘이 없었다. 아니, 레어로 찾아가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물을 줘야 할 때가 되긴 했는데.”

“물을?”

이상한 이야기였다. 미하일은 드래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응. 예민한 것들이 몇 개 있어서 신경을 자주 써 줘야 하거든.”

“하, 설마 레어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미하일은 추욱 내려왔던 머리칼을 단번에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화분을 말한 겁니까?”

드래곤은 갑자기 밝아진 얼굴로 물어오는 미하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화분은 생명체가 아니잖아. 그 안의 식물을 말한 거야.”

푸흡, 하, 하핫.

미하일은 루스의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래야 아드리안답지. 아니, 루스답다라고 말해야 하나? 미하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한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루스는 도대체 왜 미하일이 저렇게 웃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뭐, 침울하게 슬퍼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응?”

미하일은 한참을 웃다가 다시 원래의 궤도로 돌아왔다.

“그 레어에서는 주로 어떤 걸 합니까.”

“아, 일단 레어에 대해 알려 줘야겠어. 나는 평화롭고 한적한 곳을 좋아해서 인간들의 발길 한 번 닿지 않는 곳에 레어를 만들었는데 말이야…….”

루스는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의 레어에 대해 무척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하일은 루스 바로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다시 질문을 하기도 하고 드래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는 듯 “아아.” 하고 감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들의 평화로운 대화를 대변하듯 호수의 표면이 잔잔하게 반짝거렸고, 가끔씩 루스 옆에 누운 사슴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의 물을 마시고 다시 돌아오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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