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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36화 (136/184)

136화

미하일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이건…….”

그는 의자 위쪽에 손을 얹은 채로 기다란 검지를 움직여 툭툭,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문화 양식이라 당신이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문화 양식? 이게?

루스는 로브를 푹 눌러쓴 채 더 말해 보라는 듯 테이블 맞은편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알아두면 두고두고 다음 유희에도 사용할 수 있으니,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면 필요한 상식이었다.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먼저 편하게 앉을 수 있게 의자를 테이블 밖으로 꺼내 주는 겁니다.”

“……그 정도야 나도 알아.”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내 배려를 모른 척하는 거지? 아카데미 식당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미하일은 루스의 말을 듣고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루스는 미하일의 설명으로도 완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보통 여인들만을 위한 것 아니었나?”

의자를 꺼내 주는 것은 드래곤이 이전 유희에서도 함께 식사를 하러 간 식당에서 여인들에게 종종 했던 일이었다. 유희 중 처음 다른 누군가와 식당에 갔을 때 뻣뻣하게 서 있던 것이 무색하게, 그다음부터 루스는 무척 능숙하게 굴었다. 옅게 미소 지으며 의자를 꺼내 주는 잘생긴 미남자에게 반하지 않은 여인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게 드래곤이 바랐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

여인들.

루스의 의문을 들은 미하일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보니 눈앞의 루스는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드래곤이었다.

그가 유희를 하는 동안 스치듯 지나갔던 인간들은 도대체 몇 명이었을까. 혹시 그중 몇 명과는 깊은 교류를 하지 않았을까? 루스타바란 초대 국왕인 카를로와는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지만, 루스 페니건이라는 이름은 어느 순간 왕궁 기록에서 사라져 있었다. 드래곤은 카를로가 국혼을 한 것에 상심하여 떠난 것일지도 몰랐다.

미하일은 입안을 슬쩍 짓씹었다.

‘아니야. 분명 이전에 물었을 때에는 인간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직접 말했었지.’

그래, 그의 말대로 단 한 명의 인간에게도 마음을 준 적 없는 것이 훨씬 더 드래곤다웠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 두 가지 상황 중 자신에게 과연 어느 것이 더 나은 사실일지 고를 수 없었다.

“무척 고대인스러운 틀에 박힌 발상이군요. 여인들에게만이라니.”

그렇기 때문에 미하일의 입에서는 과격한 표현이 나왔다.

“뭐? 내가 틀에 박혀?”

스스로를 무척 관대하고 융통성 있다고 생각하는 루스가 곧바로 반박했다.

“상대방이 편하게 식사를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긴 것뿐입니다. 여기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겠지요.”

“…….”

“이제 이해되셨길 바랍니다. 식사를 해야 하니 이만 자리에 앉아 주셨으면 하네요.”

거기 말고 이 의자에.

미하일은 꾸욱, 의자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알았어.”

미하일이 원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루스는 다시 테이블을 크게 돌아 미하일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가 잡고 있는 의자에 앉으려 하자, 미하일은 자연스럽게 의자를 움직여 루스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조정해 주었다. 여인들에게 해 주기만 했지, 누군가가 빼 준 의자에 직접 앉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러면 되는 거지?”

루스는 그 의자에 우아하게 자리 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미하일이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이런 느낌이었구나.

루스가 앉아 있는 의자 윗부분을 잡고 있는 미하일의 손끝이 살짝 붉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사소한 것 하나에도 격식차려야 하는 왕실의 예법이 거추장스럽기만 했던 그였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의자를 직접 꺼내 주고, 상대방이 그 의자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에 마음속에서 따뜻하고 뭉글뭉글한 감정이 솟아났다.

마치 루스와 자신이 무슨 사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하일은 속으로 복잡한 생각들을 하면서 테이블을 돌아 루스가 앉으려던 맞은편에 앉았다.

“저…… 손님들, 이제 주문 받아도 될까요?”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던 식당의 직원이 그제야 테이블에 다가와 말을 건넸다. 루스와 미하일은 직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

식사를 마친 후 미하일은 식당을 나서며 말했다.

“조금 걸으시겠습니까?”

뒤따라 걸어 나오던 루스가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배를 채우고 있는 이 적당한 포만감이 만족스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바로 마차에 앉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주기적으로 소화를 시켜 줘야 하는 인간의 몸이었기 때문일 것이 뻔했다.

식후에는 걸어야 한다는 카일 드바이시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루스는 그제야 카일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미하일은 곧바로 동의하는 루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당연히 귀찮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흔쾌히 가려 하다니 의외였다.

“그러면 이쪽으로 가죠.”

넋 놓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식당 건물 근처의 마을 게시판에서 안내하고 있는 숲이 생각났다. 미하일은 그 지도를 눈에 담고는 숲으로 가는 방향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면서 앞장섰다.

루스는 걸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자세로 곧바로 뒤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루스타바란 왕국의 마을 대부분은 산맥을 경계로 삼고 있었는데 그 덕에 어디서나 한적한 숲을 즐기기 좋았다. 다행히 지금 루스와 미하일이 있는 이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게 새가 날아다니며 맑은 울음소리를 냈고, 루스와 미하일이 걸을 때마다 풀숲에 발이 스치며 서걱이는 소리가 났다. 인적이 드문 마을인 데다가 낮이라 여유롭게 숲을 거니는 사람은 루스와 미하일밖에 없었다. 산책로는 텅 비어 있었으나 둘은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하지만 루스는 이렇게 몇 시간이나 걸을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혹시 길을 잃은 건가?

루스는 숲의 산책로를 걸으며 미하일에게 궁금증이 배어 있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마침 다른 생각에 빠진 참이었기 때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루스가 힐끔, 앞서 걷고 있는 미하일의 등을 확인했다.

못 들은 건가? 느리게 걷던 루스는 몇 발자국 뛰어 미하일의 발걸음에 맞춰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미하일. 방금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건지 물었는데.”

“아.”

미하일은 번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루스 쪽으로 돌렸다. 뒤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루스가 바로 옆에서 걷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방금 들은 루스의 질문에 잠깐 고심하던 미하일은 모르는 척 속내를 숨겼다. 이 길 끝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는 깜짝 선물을 너무 빨리 풀어헤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딱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산책이니까요.”

미하일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루스는 집중력이 확 떨어졌는지 심드렁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면 돌아가야겠네. 목적지가 없는 걸음은 이걸로 충분해.”

이미 식사 후 걷는 것치고는 넘치게 걸어온 탓에 조금 불쾌할 정도였던 포만감이 적당히 줄어들었다. 방향을 돌린 적이 없으니 돌아가려면 아마 걸어온 만큼 다시 걸어가야 할 것이다. 루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반대 방향으로 몸을 휙 돌리려던 참이었다.

“……아, 방금 생각났는데. 아마, 이렇게 쭉 걸어가면 이 숲속에 있는 호수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미하일은 숨기려던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빠르게 공개했다.

솔직히 그 또한 지금 이 정도면 산책치고는 과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옛날 방식의 지도라 마을에서 호수까지의 정확한 거리를 표시해 놓지 않은 탓에 지도로 봤을 때보다 훨씬 멀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하일은 이 호수를 루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식당 옆의 게시판을 보자마자 숲에 위치한 커다란 호수를 발견하고는 루스가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순수한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바사미엘의 호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미하일은 루스가 이 호수를 함께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의 마음은 꿈에도 모른 채 눈을 반짝였다.

“호수? 아무튼 길을 잃은 것은 아니란 말이지?”

“네. 그런데 조금 더 가야 하긴 합니다. 아니면 저런 바위에 앉아 잠깐 쉴까요?”

중간에 포기하는 것만큼 미하일이 싫어하는 일은 없었다. 미하일은 호수를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기보다는 검지로 옆의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루스에게 휴식을 제안했다.

“아니, 쉬지 말고 곧장 가는 게 나아.”

쉬었다간 더 귀찮아질 것 같았다. 루스는 ‘호수’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잔잔한 물소리와 반짝이는 물 표면을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지가 있다면야 길고 긴 산책을 하는 의미는 충분했다.

미하일은 여전히 호수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드래곤을 잠시간 바라보다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 곧장 가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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