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저게 무슨 소리야, 난 어차피 퇴학이었다니?
분명 시험 성적도 적당했고, 꿰뚫어 보는 눈 역시 분수대에 되돌려 놨을 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가벼웠는데……. 루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미하일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퇴학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미하일에게 다시 되묻자니 지금껏 아드리안에게는 전혀 관심 없다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모양이 영 이상해 보일 것이었다.
“…….”
그래서 루스는 어쩔 수 없이 그럴듯한 침묵을 선택했다.
오히려 그 상황이 답답한 듯 먼저 침묵을 깨트린 이는 미하일이었다.
“아드리안은 이미 자신이 퇴학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에 생각해 보니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지더군요. 그가 드래곤이었다면 가능했겠지요.”
“그래? 겨우 일 년 만에 퇴학이라니 신기하군.”
도대체 무슨 내막이 있었던 것인지 빨리 듣고 싶었던 루스는 미하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혹시 그럴 만한 사유가 있나?”
그러고는 은근슬쩍 제일 궁금한 부분을 질문했다. 그러나 그의 소름 돋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궁금해하는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루스의 담담한 표정에 오히려 떠보려고 이야기를 시작했던 미하일의 눈가가 샐쭉해졌다.
“‘꿰뚫어 보는 눈’의 무게가 무거운 학생은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수 없다는 교칙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 아주…… 특이한 교칙이군.”
실제로 그 쓸데없이 특이하기만 한 교칙에 일 년간 휘둘렸던 피해자가 중얼거렸다. 루스는 맞은편 소파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미하일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드리안이 진급 명단에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당연히 진급하는 데에 아무 문제 없을 거라 생각하고 한참 동안 확인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는군요.”
물론 명단이 나오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실종되어서 통지서를 여유롭게 확인해 볼 시간이 없기도 했었다. 미하일은 루스 앞에서 굳이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갑자기 후회가 몰려왔다.
그를 좋아했는데, 왜 진작에 알아차리지 못했지? 저렇게…… 아카데미에서와 똑같은데.
미하일은 분한 마음에 자신의 입술 끝을 물었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요.”
오랜 실종자 수색에 조금 지친 상태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드래곤의 말을 믿었다. 평상시의 컨디션이었다면 그의 거짓말을 덥석 납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위대한 존재인 드래곤이 굳이 ‘시전자가 원하는 얼굴’로 소환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흔해 빠진 갈색 눈동자가 아닌 반짝이는 드래곤의 비늘과 같은 색의 금빛 눈동자를 가진 저 아드리안의 얼굴 말이다. 더 빨리 의심했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왕성에서 드래곤을 소환하자마자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미하일이 묘한 표정으로 루스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떻길래?”
루스는 지금 미하일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긴가민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마차를 타고 아드리안의 시신을 찾으러 힐데케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미하일의 의미심장한 말투가 루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학기 중에 사-”
마지막 단어를 말하려던 미하일의 입이 멈칫 굳었다가, 겨우 다시 움직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아드리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제일 마지막에서야 인정할 사람이었다. 그런 미하일에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아드리안을 찾는 것을 그만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맞은편에 앉은 저 아드리안을 찾는 것을.
“……실종자라 진급 명단에서 제외된 줄 알았는데, 그게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루스를 똑바로 향했다. 아드리안이 진급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실종자여서가 아니었다.
미르킨트를 발견한 이후 나눴던 묘하게 이상했던 대화를 끝으로 미하일은 바사미엘에 개인적으로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조금 전 음식점의 로비의 마도구를 통해서 그 결과를 전달받은 것이었다.
“네, 왕자님. 조금 전에 바사미엘에서 기록을 전달받았습니다. 정확히 필요한 부분이 아드리안 헤더의 진급 누락 사유가 맞으십니까?”
“그래.”
“말씀하신 대로 아드리안 헤더는 이 학년으로 진급되지 않은 것이 맞습니다만…… 아드리안 헤더의 퇴학 사유는 실종이나 사망이 아니라 ‘바사미엘의 심판 탈락’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알아보니 심판이라는 것은 입학시험의 일종이고, 아드리안 헤더는 그 시험에서 탈락한 듯합니다.”
바사미엘의 심판이라.
미하일의 눈빛은 통신 마도구 고깔 너머에서 이어지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매섭게 바뀌었다. 그의 예상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또 하나 더 찾았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 가볍다는 ‘꿰뚫어 보는 눈’이 무거웠다니. 아드리안이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것이 아닌 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이것으로 아드리안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미하일은 소파에 한쪽 팔을 괴어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가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을 고심하는 것이었다.
“……바사미엘에서 확인한 정보는 이게 전부입니다. 혹시 왕자님이 원하시는 정보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여쭤봐도 괜찮을지요.”
고깔 너머의 수행인이 조심스럽게 질문해 오는 것과 동시에 미하일은 결정했다. 그는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필요한 것 몇 개를 당장 보내 줄 수 있겠나?”
미하일의 나직한 음성이 부드러운 로비 바닥 아래로 깔렸다.
“……많이 좋아했군?”
생각보다 더.
미하일의 이야기를 듣던 루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지금껏 본 중에 가장 멍청한 얼굴을 한 미하일이 곧바로 반응했다.
“예?”
조금 전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던 미하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루스는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마치 미하일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아드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놈 말이야. 너는 그가 드래곤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이 이렇게 찾아다닐 정도로 좋아한 거냐고.”
“…….”
미하일의 입술 끝이 느리게 비틀렸다.
“그게 궁금하십니까?”
냉기가 보일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루스는 고작 질문 하나에 날카롭게 쳐다보는 미하일의 눈초리를 확인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둘은 잠시간 침묵한 채 서로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고요를 깬 것은 미하일이었다.
“죄송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드리안만 들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아하, 그렇겠네.”
루스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 대화를 끝으로 숙소까지 가는 동안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숙소와 식당을 들리지 않았다면 각자 창밖을 바라보는 상태가 끝까지 유지되었을지도 몰랐다.
***
마차에서 자연스럽게 먼저 내리려던 미하일이 문득, 몸을 멈췄다. 식당 바로 옆의 의류점이 눈에 들어왔고, 지금까지 잊고 있던 부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편하게 앉아 있던 루스가 뒤 쪽에서 말했다.
“왜?”
“……그러고 보니 로브를 걸치지 않으셨잖습니까. 이번이야말로 의류점을 들려야겠군요.”
“……아, 로브?”
루스는 미하일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을 가볍게 감고서는 주변의 마나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부름에 자연스럽게 모여들던 마나들이 쥐 죽은 듯 잠잠했다. 루스는 그것을 느끼자마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불쾌했다.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오르디나스의 영향인 것은 틀림없었다. 이러느니 명확하게 오르디나스가 원하는 바를 알려 준다면 편하겠으나, 거대한 세계의 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해.”
루스는 허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식당 오른편의 의류점으로 향했다. 루스는 의복에 관해서는 별 취향이랄 것이 없었으므로 눈에 보이는 로브 하나를 빠르게 골랐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골라 버린 탓에 미하일은 조금 더 둘러봐도 된다고 권했으나, 루스는 퉁명스럽게 거절하고는 의류점을 먼저 나섰다. 그 모습에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역시 옷에는 관심 없는 건 그대로군.’
하하, 미하일은 루스와 아드리안 사이의 공통점을 기어이 하나 더 찾아내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 발견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탓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배고픔을 한 번 겪은 후로 루스는 식사를 거르지 않고 무조건 미하일과 함께했다. 의류점을 들러 로브를 뒤집어쓴 루스와 루스타바란 왕국에서 희귀한 밝은 은발머리를 가진 청년이 식당에 들어서자 모든 시선이 그리로 날아들었다. 미하일은 그런 시선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익숙했으므로 아무렇지도 않게 루스보다 몇 발 먼저 점원이 안내하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고는 의자 하나를 품위 있게 빼내며 말했다.
“……여기에 앉으시지요.”
그 목소리에 테이블을 돌아 걸어가던 루스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거기에?”
루스는 의자를 꺼낸 채 기다리고 있는 미하일을 확인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앉을 의자 정도는 직접 빼낼 수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의자를 꺼내 주려는 미하일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이미 맞은편에 도착했기 때문에, 미하일이 말하는 ‘여기에’에 해당된 의자까지 가려면 다시 테이블을 돌아가야 했다. 굉장히 비효율적인 행동이었다.
“왜 굳이?”
옆 테이블의 다른 여행객들이 힐끔, 루스와 미하일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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