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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33화 (133/184)

133화

대화를 끝내고 미하일이 방을 나서자 루스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래, 내가 아드리안이란 사실만 모른다면…… 딱히 큰 문제는 없겠군.’

동시에 드래곤은 완벽히 마음을 푹 놓았다.

그 순간 모든 진실을 미하일에게 털어놓는 것 보다, 그냥 손쉽게 다른 드래곤 핑계를 대는 걸 선택했다. 편한 것은 물론이고, 진실을 알게 된 미하일이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혹시라도 용언으로 계약된 소원을 들어주는 데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루스는 자신의 선택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터벅터벅 미하일의 곧은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러나 안심한 드래곤과는 별개로, 미하일의 의심은 바로 그 대화 이후부터 더 커지기 시작했다. 미하일은 자신의 숙소 방문에 머리를 완전히 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감정의 동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루스의 표정에서 위화감이 들었다.

“아드리안이 드래곤이라면, 왜 루스는 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지? 그때 봤을 때에는 분명 동족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는 그 상태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죽어 가는 고룡을 살리려 한 것을 미하일은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루스는 스스로 ‘저번에 같이 봤던 그 고룡이 내가 처음 본 드래곤’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드래곤의 존재에 놀라움은커녕 호기심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숲에서 미르킨트를 발견한 후 루스와 대화해 보면 꼬여 있는 모든 매듭이 풀릴 줄 알았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수상해.”

조용한 방 안을 미하일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가득 채웠다. 뚜렷한 목소리는 복잡한 그의 마음을 단번에 환기했다.

이상한 점은 더 있었다. 조금 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돌리던 루스의 얼굴이 미하일의 눈앞을 스쳐 갔다. 만약 미하일의 추측대로 아드리안이 드래곤이 맞다면 아드리안이 바사미엘에 입학한 건 그 유명한 ‘드래곤의 유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스와 같은 얼굴로 아카데미를 돌아다닌 그 드래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일 년간 자신과 함께 바사미엘에서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그 ‘아드리안’은?

바사미엘의 정원에서 책을 읽던 아드리안의 얼굴이 미하일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벤치로 다가온 미하일을 바라보고는 특유의 묘한 미소를 짓곤 했다.

루스는 아드리안과 완벽히 똑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가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 미르킨트 말고 또 있나?”

미하일은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무척 가늘지만 마침내 찾은 실마리였다. 그 한 가닥 희망을 멋모르고 놓칠 생각이 그는 전혀 없었다.

“미르킨트 말고 다른 증거…….”

조용한 방 안에 목소리가 울렸다.

***

“코스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타마힐드 마을 식당의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테이블에 앉은 루스와 미하일에게 직원이 물었다. 그는 한 손에 메모지를 들고, 손님들이 고른 메뉴를 바로 받아 적으려 깃펜을 종이에 대고 있었다.

루스는 요즘 식사를 하는 데에 재미를 붙인 상태였다. 그는 이 근방의 유명한 음식점을 죄다 들릴 작정인 듯 굴었다. 미하일은 갑자기 마을의 식당 지도를 구해 와 들이미는 루스를 향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잠시간 고민한 끝에 이 식당을 추천한 것이었다. 루스는 들어 본 적 없는 가게였으나, 그는 이것저것 가릴 정도로 까다로운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미하일이 추천한 식당에 들어온 터였다.

“스테이크로 하겠습니다.”

루스는 가볍게 웃으며 메뉴를 골랐다. 이 가게의 가장 대표적인 메뉴였다. 원래 육식을 즐기지 않았지만 웬일인지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루스가 지금껏 한 번도 주문한 적 없는 스테이크를 주문하자, 미하일은 매우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루스는 미하일의 미심쩍은 눈빛에 고개를 기울였으나, 미하일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주문을 받던 직원은 이어서 미하일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어떤 메뉴를 주문할지 말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다른 곳을 보느라 그 직원의 부추김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루스는 미하일을 부르려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이 식당에는 메뉴가 몇 개밖에 없었고 미하일이 주문할 만한 것은 그중 딱 하나였다.

“같은 것으로 주시죠.”

주방장이 추천하는 스테이크.

루스는 다른 생각에 잠긴 미하일을 대신해서 메뉴판의 활자를 검지로 가리키며 직원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는 미하일이 짜증스레 상체를 굽히며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제 주문을 왜 당신이 합니까.”

미하일의 눈동자는 잠시간 루스가 가리킨 메뉴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기색을 달리했다.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며 직원이 질문했다.

“손님, 다른 메뉴로 바꾸시겠습니까?”

“……아니요.”

제대로 주문되었습니다. 미하일은 직원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메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과 메모를 정리하고 자리를 떴다.

미하일은 그가 테이블을 떠나자마자 맞은편 자리에 앉아 식전 차를 마시고 있는 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도 언제나 식전 차를 꼭 챙기고는 했다.

“제가 스테이크를 주문할 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 루스는 찻잔을 입가에 댄 채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넌 언제나 스테이크를 주문하잖아.”

“흐음. 그랬나요.”

그 순간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실마리가 한 가닥 잡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하일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

지금껏 루스와 함께 간 식당에서 미하일은 스테이크를 주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미하일의 눈동자가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루스는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감미로운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

“잠시 들렸다가 갈 곳이 있습니다.”

루스는 식사 후 마차로 돌아가는 길에 다른 곳을 가리키는 미하일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말한 대로 뭘 할지 하나하나 보고해 줄 필요는 없었으나 그는 꼬박꼬박 상황을 알려 주고는 했다.

“그래, 마차에서 기다리지.”

“네.”

미하일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힐끔, 바라보다가 루스는 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햇볕과 바람이 느껴졌다. 하암, 루스는 가볍게 하품을 하다가 두 팔을 움직여 기지개를 켰다. 나른한 오후가 그런 그를 반겨 주었다.

“……이러다간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졸겠는데.”

인간의 몸으로 지내니 수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놓치면 곧바로 반응이 왔다. 마나로 에너지를 채울 수 없는 인간의 몸이라니. 루스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마차를 향해 걸었다.

***

미하일이 도착한 곳은 식당 한편에 마련된 로비였다.

고급 식당의 격에 맞게 로비에는 값비싼 마도구들을 손님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해 두고 있었다. 영상 마도구를 이용하여 아름다운 시골 풍경으로 한쪽 벽을 가득 채우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연주자 없이도 맑은 선율을 자아내는 하프를 세워 두었다. 시골 변방의 여행객이 이 로비에 멋도 모르고 들어섰다면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문가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의 광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급이라 해도 대륙 최고의 장인이 왕자 하나만을 위해 맞춤 제작한 물건들을 기어 다닐 적부터 사용하던 미하일에게는 모두 촌스럽고 조악한 물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마치 이 로비를 통째로 빌린 것처럼 그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가 부드러운 융단 위에 놓인 소파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앉은 소파의 옆 작은 탁자에는 통신용 마법 도구가 놓여 있었다. 미하일은 제법 화려하게 장식된 숫자 다이얼을 몇 번 손가락으로 휘젓고는 곧바로 기다란 줄에 매여 있는 고깔을 집어 들었다.

“그래.”

마도구의 반대편 사람이 인사를 건네 온 듯했다. 미하일의 아름다운 얼굴에 전등 불빛이 비추자,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는 로비의 소파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담배 냄새에 슬쩍 얼굴을 찡그렸다.

“필요한 것 몇 개를 당장 보내 줄 수 있겠나?”

미하일의 나직한 음성이 부드러운 로비 바닥 아래로 깔렸다. 마도구의 고깔에서 누군가가 대답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 질문에 미하일은 씨익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내 이름은 얼마든지 팔아도 상관없어. 데클레어 스승님은 내 부탁이라면 우선은 들어주실 거다.”

건너편의 상대방이 질문했다.

“왕자님, 바사미엘에서 정확히 어떤 것이 필요한 것입니까?”

왕자는 고민하는 것처럼 검지손가락이 탁자 위를 몇 번 탁탁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별건 아니야. 그냥 바사미엘의 분수대 안에 있을-”

미하일은 씨익,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볼품없는 작은 돌멩이가 필요해.”

그러나 미하일과 아드리안이 하고 있는 이 의미 없는 술래잡기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할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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