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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32화 (132/184)

132화

타마힐드의 깊은 숲속에는 붉은 미르킨트가 피어 있었다.

그날 저녁, 어두운 숲이었지만 이 장소가 확실했다. 아드리안의 다리에서 난 상처의 피가 떨어진 바로 그 자리.

“왜……?”

미하일은 발밑에 핀 미르킨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숲속의 새들은 밝게 지저귀며 저들끼리 평화롭게 날아다녔다. 그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미하일의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 아드리안의 피에서 미르킨트가 피어났지?”

그의 머릿속에 이 모든 연결 고리를 풀어내는 단 하나의 정답이 떠 다녔다. 하지만 미하일은 그 정답을 애써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는 손을 천천히 얼굴 위로 올려 감고 있는 두 눈을 내리 눌렀다.

그러나 머릿속에 한 번 피어난 의심은 쉬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틔워 미하일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아드리안 헤더가 인간이 아니라…….”

얼굴 위를 덮은 손바닥 틈 사이로 미하일의 앓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스윽, 손은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드래곤이기 때문에?”

그러자 번뜩이는 또렷한 붉은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드래곤이라. 본래는 무척 멀고도 먼 전설 속 동물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미하일에게 드래곤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인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미하일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그가 비늘로 불러내고, 마차를 함께 타고 왔으며 함께 식사를 했던 ‘루스 페니건’이었다.

막연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아드리안 헤더가, 지금 찾고 있는 아드리안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위대하신 드래곤은 이미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로 같은 동족이라 숨겨 주는 것인가? 미하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드리안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를 탓하려고 찾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를 끝까지 속일 작정이었군.”

미하일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바닥의 미르킨트를 노려보았다. 제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이쪽이 먼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

커다란 발걸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는 벌컥, 문이 열렸다.

숙소의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루스의 눈동자가 힐끔 문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책에 고정되었다. 그의 손에 들린 책의 등에는 <운명의 흐름과 영향에 대한 고찰>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만 있었어도 레어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가져왔을 텐데, 책의 내용이 그의 마음에 완전히 들지는 않는 참이었다. 그래도 우연히 숙소 옆 골목에서 서점을 발견해서 산 책치고는 여흥을 돋우기에는 괜찮았다.

당장 가진 골드가 없어 미하일의 호위 기사에게 돈을 빌리기는 했지만. 이후 힘을 찾게 되어 레어의 보석을 가져올 수 있게 된다면 바로 갚을 거라 괜찮았다.

“루스타바란 왕가에선 노크라는 예의 바른 문화를 가르치지 않나 보군.”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당연하게도 미하일이었다.

루스의 나직한 투덜거림이 방을 울렸다.

그런 불만을 듣고서도 미하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방 안까지 빠르게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휙 팔을 뻗어 왔다. 미하일은 커다란 손으로 루스의 멱살을 낚아챈 것이었다. 그 힘에 강제로 책에서 시선을 떼게 된 루스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네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그는 자신이 드래곤임을 알고 있는 미하일이 무례하게 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니, 내가 드래곤의 힘을 잃었다고 이딴 식으로 구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주 보고 있는 미하일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

그는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평소와는 다른 음색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알고 있었지?”

하, 루스는 자신의 멱살을 쥐고선 건방지게 내려다보는 인간을 쳐다보며 입술 한쪽을 비죽 올렸다. 미하일의 손 위를 세게 붙잡아 떨쳐 내려 했으나, 이전에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힘의 차이가 비등비등했다. 멱살을 쥔 손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뭘? 어디다 대고 화풀이냐. 손 안 떼? 이 멍청한……!”

짝! 높은 파열음이 들렸다. 그의 손을 잡아떼려는 루스의 손등을 미하일이 세게 쳐 낸 것이었다. 손등의 얼얼한 고통에 루스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냥 인간의 몸만 아니었대도 진작에 죽여 버렸을 무례한 행동이었다.

“아드리안 헤더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당신은 알고 있었잖습니까!”

“……뭐?”

미하일의 외침에 루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짜증을 내던 중인 것도 잊을 정도로 놀란 것이었다. 그만큼 미하일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미하일은 말을 하던 중 눈을 질끈, 한 번 감고는 뚜렷한 눈으로 다시 떴다. 그리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아드리안의 피가 떨어진 곳에 미르킨트가 피어 있었습니다. 방금 타마힐드의 숲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어지간한 왕족의 피로는 자라나지 않을 미르킨트가, 완전히 피어 있었죠. 당신의 말대로.”

“아아…….”

루스는 침대에 기대어 멱살을 잡힌 채로 침음을 뱉었다. 그걸 내가 잊고 있었네. 이쪽의 실책이었다. 미하일은 ‘미르킨트’의 습성을, 아니 그 풀의 이름조차 몰랐어야 했다. 그에게 자신이 ‘아드리안 헤더’라는 증거를 갖다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그랬군.”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루스는 아깝다는 듯 속으로 연신 혀를 찼다. 그 말에 미하일이 멱살을 쥔 손을 더욱 바짝 잡아 내리눌러 왔다. 음? 루스는 미하일의 무식한 힘에 표정을 찡그렸다.

“그놈을 불러 주십시오. 지금 당장!”

“불러 달라니?”

루스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딱 하나 다행인 점은 아드리안 헤더와 루스 페니건이 같은 존재라는 제일 중요한 정보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드래곤끼리 매년 문안 인사라도 하는 줄 알아? 저번에 같이 봤던 그 고룡이 내가 처음 본 드래곤이야.”

“무슨 방법이 있겠죠. 당신들끼리의 소통 방식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딴 게 있을 리가.”

애초에 드래곤은 서로 소통할 방식을 고민할 정도로 정이 많은 종족도 아니었다. 루스는 미하일의 순진한 생각에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손에 힘을 주었다. 멱살을 쥐고 있던 미하일의 손등 바로 위였다. 루스의 차가운 체온이 닿자 미하일은 움찔, 몸을 떨고는 손을 풀어냈다.

“그러면……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와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까?”

“글쎄? 난 네 소원대로 아드리안의 시신을 찾을 건데, 소원을 지금 바꾼다는 이야긴가?”

“…….”

루스는 평범한 갈색 눈동자로 미하일의 굳어 있는 얼굴을 전체적으로 훑었다. 고민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니요. 소원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어차피 지금은 바꿔 달라 해도 못 바꿔 줘. 고작 인간의 몸으로 드래곤의 마나로 맺는 용언을 할 수는 없거든.”

“당신도 아드리안이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은 몰랐군요. 그렇죠?”

미하일은 조금 전 숙소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보다 조금 진정된 상태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루스는 미하일의 행패로 헝클어진 상체의 옷소매를 매만졌다. 무턱대고 상대방의 멱살을 잡다니 왕가의 고아함은 다 옛말이었다.

아무리 루스라도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에게 뻔뻔하게 ‘몰랐다.’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대신에 그는 화제를 돌렸다.

“……미르킨트 말고.”

“예?”

“그가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 미르킨트 말고 또 있나?”

미하일은 루스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없습니다.”

“그래, 겨우 그거 하나만으로 네가 찾는 자가 드래곤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건 너무 빠르잖아. 일단 그의 시신을 찾다 보면 진실을 알게 되겠지.”

진실을 알게 되다니. 루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입안이 썼다. 미하일이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이쪽이 제일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런 드래곤의 말에 제법 안심한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찡그린 상태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납득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진정이 좀 되었나 봐?”

“뭐, 조금.”

미하일은 나직하게 대답하는 중에도 눈앞의 루스의 모든 표정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또렷한 시선을 보냈다. 마치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럼 나가. 책이나 마저 읽을 테니까.”

축객령이었다.

“……실례했습니다.”

미하일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후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루스는 읽던 책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책은 그 위에서 미하일이 설쳐 댄 탓에 종이 끝이 구겨져 있었다. 검지손가락으로 그 자국을 펴 보려 했으나 원래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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