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으로 조금 돌아가는 여정이 이어졌다. 빠르게 달려가는 마차와는 달리 미하일의 손에 들린 책은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은 지가 한참이었다. 조금 전 전령에게 받은 편지 때문에 도무지 활자의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탁, 미하일은 짜증스레 책을 소리 내어 닫았다.
‘드래곤의 피를 마시고 자라나는 미르킨트가 왜 하필 그곳에 피어 있는 거지?’
지금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의문이었다.
왕성의 온실에서 정문으로 가는 길. 카일의 편지에서 말한 장소는 구체적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듣자마자 미하일의 기억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아카데미의 첫 방학, 알릭스의 초대로 아드리안과 함께 왕성에 갔던 때의 일이었다.
훈련을 하다 말고 사용인의 말을 전해 들은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목 위에서 멈춰 선 알릭스의 검을 확인했었다. 알릭스의 검 끝에는 아드리안의 핏방울이 맺혀 어느새 셔츠가 젖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빠르게 알릭스와 아드리안에게로 걸어가 날카로운 검날을 손으로 잡아 위로 올렸다.
“……일어나.”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드리안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켰다. 아드리안은 “어? 어.”라고 말하며 일어나려다 윽, 하는 신음 소리를 뱉으며 여전히 피가 나는 목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었다.
미하일은 뚝뚝 바닥에 떨어지는 아드리안의 붉은 핏방울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인상을 썼다.
턱을 괸 채 마차의 차창을 바라보던 미하일의 고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기울어졌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카일이 말하고 있는 장소는 바로 그곳인데. 이건 우연의 일치인가.
‘만약 미르킨트가 그때 아드리안의 피로 피어난 거라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미르킨트는 드래곤의 피를 마시며 자라는 꽃이다. 미하일이 알고 있는 아드리안은 변변찮은 마법 하나 사용하지 못하는 평민이었고.
미하일은 고민의 흐름이 끝끝내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책을 보다 말고 고개를 휙휙 젓는 미하일에게 루스가 말을 걸어왔다.
“무거운 내용이었나 보지?”
미하일은 루스의 말에 눈동자만 슬쩍 움직였다. 루스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전 읽다가 덮은 책 밑에 깔린 편지 귀퉁이가 슬쩍 나와 있었다.
“아까 전령한테 받은 그 편지.”
“네. 뭐.”
미하일은 슥, 손을 움직여 편지 봉투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책을 움직였다. 그렇게 하니 책에 편지 봉투가 완전히 덮였다. 루스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억지로 알려 달라 할 정도로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은 입술을 한 번 세게 물었다가 천천히 떼어 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미르킨트 꽃에 관해서입니다만…….”
왕자는 질문을 하면서 괜히 말꼬리를 조금 늘였다. 루스는 빨리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온실에서 키울 수 있을까요?”
미하일의 질문치고는 특이했다. 그가 식물을 기르는 데에 관심이 있었던가? 적어도 아카데미에서는 없었던 것 같은데.
“……키울 수는 있지. 대신에 그 꽃은 물을 마시면서 자라지 않으니, 드래곤의 피를 줘야 할 거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스윽, 루스는 심드렁한 눈동자로 맞은편의 미하일을 훑었다.
“너희 왕가의 피는 옅으니 한참을 쏟아 내야 할걸. 미르킨트를 피워 내려다가는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겠군.”
“…….”
드래곤의 말을 들은 미하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왕성의 길가에 미르킨트를 피워 낸 인물의 범위가 단번에 좁혀진 탓이었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과 서로 마주 본 상태로 잠시간 마차에 앉아 있었다.
똑똑똑.
그때 마부가 노크를 해 왔다. 그 소리에 미하일은 곧바로 마차 앞쪽에 나있는 좁은 창을 열었다. 마부는 왕자에게 슬쩍 고개를 숙이며 용건을 말했다.
“타마힐드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머물렀다 출발하겠습니다.”
왕자가 처음부터 경로에서 제외했던 타마힐드였다.
미하일은 마부의 말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 번 입술을 꾹 짓씹다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사라진 아드리안이 생각나 일부러 경로에서 제외했던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검은 마물과 마주친 바람에 아드리안이 다리를 다쳤었다.
그때 검술이 조금만 더 뛰어났더라면…… 아드리안이 다리를 다치지 않았을 것이었다.
미하일이 지금껏 후회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아니 아드리안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면, 차라리 자신이 다치는 것이 나았다. 그랬다면 그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반해, 루스는 타마힐드라는 단어를 듣고선 ‘이제 좀 힐데케산에 가까워졌군.’ -고작 이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마차는 답사 때 머물렀던 숙소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이 마을의 가장 좋은 숙소를 이용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숙소까지 같을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은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눈을 한 번 질끈 감고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하고 마차를 나섰다.
“…….”
마차에서 내린 그의 시선에 타마힐드 마을의 지도가 들어왔다.
숙소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숲이 있는 것이 보였다. 미하일은 잠시간 그 지도 앞에 멈춰 섰다. 뭔가 묘하게 저 곳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왜 지금 당장인지는 스스로도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꼭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안 들어가?”
미하일이 한자리에 멈춰 서 있자, 함께 걸어가던 루스가 물어 왔다. 마차에 실었던 짐을 꺼내 어깨에 걸친 채였다.
그에 미하일은 마을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그래? 다녀와. 그런 것까지 굳이 일일이 나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어.”
루스는 관심 없다는 듯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하며 말했다.
미하일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휙, 몸을 틀어 이전에 아드리안과 함께 걸어가 본 적 있는 그 길을 혼자 걸었다. 평화로운 마을의 산책로는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문득, 어두운 저녁 다리를 다친 아드리안을 업고 걸어왔던 것이 떠올랐다. 등 뒤에서 느껴진 조금 서늘한 온도였던 체온과 그의 체향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천천히 걷던 미하일의 발걸음은 숲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빨라졌다. 그러다가는 끝내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 보면 미치광이가 된다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미하일은 이를 악문 채 속도를 한계까지 올렸다. 마을의 길가에 선 나무들이 그 속도에 맞추어 휙휙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달리면서 짓씹듯 중얼거렸다.
“그래, 머리가 이상해진 거지.”
어쩌면 이 이상한 느낌은 그저 기우일 것이다. 이것이 그냥 과대망상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면 곧바로 사그라들 것이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머릿속에 차올랐던 이상한 생각들이 사라졌다. 미하일이 원하던 바였다.
곧이어 미하일은 아드리안과 마물을 해치웠던 숲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허억, 헉 하고 숨을 고르며 무릎에 손을 댄 채 고개를 숙였다. 아드리안과 함께 봤던 어둡고 어딘가 모르게 위협적이었던 밤의 숲이 아니었다. 낮에 와 보니 숲은 한적했고 평화로워 보였다.
타마힐드 마을의 주민들 중 그 아무도 이곳에서 마물이 솟아나 공격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미하일은 이 숲에 도착하고 나서야 갑자기 망설여졌다. 마치 앞으로 그가 이 숲에서 발견할 것이 무엇인지 예감한 듯이.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 가정이 맞다면, 정말로 그게 맞다면…… 미하일은 꺼림직한 이 감정을 애써 머릿속에서 내보내려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드리안이 내게 그럴 리가 없잖아.”
미하일의 중얼거림이 평화로운 숲속을 울렸다.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들이마시고는 멈춰 선 발을 그제야 떼어 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검은 마물을 베어 냈던 그 자리였다. 그때 아드리안은 마물을 상대하다가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뚝, 투둑. 아드리안의 다리에서 떨어지던 붉은 피가 미하일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왕성의 정문에서 피를 흘리며 고개를 들어 올린 아드리안의 모습도 함께였다.
미하일이 도착한 숲의 공터에는…… 드래곤의 피를 마시며 자라난다는 붉은 미르킨트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미르킨트와 같은 붉은색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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