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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30화 (130/184)

130화

당연히 그럴 줄은 알았으나 드래곤의 힘을 잃은 루스의 몸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위아래로 움직이던 스푼은 어느샌가 우뚝 멈춰 테이블에 놓였다. 옆에 앉아 그런 루스를 바라보던 미하일이 말을 툭 꺼냈다.

“이러다간 곧 수프가 다 식겠습니다?”

다 먹겠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더니. 왕자의 입가에는 그것 보라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가 실려 있었다.

미하일의 말에 루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주방장에게 솥째로 수프를 내오라던 적극적인 태도는 찾을 수가 없었다. 루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배를 한 번 내려다본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열 접시는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 접시째에서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방장이 두고 간 솥은 아직 절반이나 차 있었다. 드래곤은 아쉽다는 듯 수프가 담긴 솥을 한 번 눈짓하고는 이야기했다.

“아쉽지만…… 더 이상은 못 먹겠군.”

드래곤의 목소리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처음으로 많이 먹고 싶은 음식이 생겼는데, 위장이 작아 먹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복에 아픔을 호소하던 배는 어느샌가 잠잠해져 있었다. 비어 있던 위장은 부드러운 수프로 가득 찼고, 스푼으로 목에 흘려 넣은 음식의 온기가 점차 몸 전체로 퍼져 손끝과 발끝에서까지 따뜻함이 느껴졌다. 포만감이었다. 그것도 아주 만족스러울 정도의. 루스는 이 이상 음식을 먹으면 지금의 이 만족이 불쾌감으로 변할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처음 경험한 배고픔치고는 적절한 타이밍에 멈췄군. 미하일은 루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출발할까요?”

“그래.”

루스는 가볍게 테이블에서 일어나려다, 옆에 놓인 솥을 힐끔 눈짓했다. 다시 출발한다는 것은 음식을 보관하기 힘든 마차에 오른다는 뜻이었다. 그런 여정에 남은 수프를 가져가는 것은 미하일이 이야기한 대로 무의미한 일일지도 몰랐다. 식으면 맛이 없어질 것이고 짐만 될 것이 뻔했다.

‘힘을 잃은 주제에 이딴 고민이나 하다니. 과연 인간의 몸에 갇히면 생각하는 범위도 인간처럼 하찮아지는 건가.’

루스는 인간처럼 음식 따위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자신을 속으로 한 번 차갑게 비웃었다.

그때였다. 드래곤의 시야 안에 손 하나가 들어왔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미하일이 냄비를 챙겨 일어난 것이었다.

“……가져갈 건가?”

루스가 질문하자, 미하일이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가져간다고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고작 그게 뭐라고 고민하냐는 표정이었다.

“…….”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었지.

루스는 냄비를 가볍게 들어 올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곤 “좋아. 그렇게 해.”라고 말하며 식당 문을 먼저 나섰다.

그 뒤에 남겨진 미하일은 멈칫, 몸을 굳힌 채 냄비를 든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런…….

입안이 썼다. 저도 모르게 드래곤을 아드리안 헤더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을 친절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드래곤의 표정에 신경을 쓰고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들고 있었다. 미하일은 입술을 꾹 한 번 말아 다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뒤를 따라 걸어오는 직원을 향해 냄비를 내밀었다.

“……며칠 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유지 마법을 걸어 둬.”

“네. 그럼 그 뒤에 바로 마차에 싣겠습니다.”

직원에게 그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고 미하일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 정도까지는 루스타바란 왕가의 왕자로서 위대한 드래곤에게 기꺼이 베풀 수 있는 친절이었다. 루스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 아마 그에게만은 기준을 달리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미하일은 애써 자신의 행동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준비된 마차로 걸어갔다.

***

드디어 출발한 마차에 앉은 미하일과 루스는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미하일은 그 나름대로 드래곤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책을 읽었기 때문이었고, 루스는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둘 사이의 적막을 깬 것은 한참 뒤 들린 노크 소리였다.

똑똑.

마부가 미하일에게 들리도록 마차 벽면을 두드린 것이었다.

“뭐지?”

“왕가의 전령이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말에 미하일은 마차를 세웠다. 마차 문을 열고 가볍게 지면으로 발을 내리자, 궁중 예법에 맞게 이미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전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하일은 마차의 문을 마저 닫고서 전령의 인사를 받았다.

“왕자님, 또 이런 곳에서 뵙게 되는군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전령은 인사말에 ‘또’라는 단어를 굳이 끼워 넣었다.

‘힐데케산에는 도대체 몇 번이나 가실 셈이십니까?’라는 물음을 대신한 것이었다. 어차피 막내 왕자님의 고집은 왕가의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런 전령의 속마음에는 관심도 없는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그래. 벌써 또 한 달이 다 되었군.”

“……네. 그렇군요.”

왕성의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는 카일이 보내는 편지였다.

편지를 가져온 전령은 왕가의 막내 왕자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자님이 매달 꼭 챙기는 저 우편 안에 쓰여 있을 내용 때문이었다. 실종되었다던 아카데미 동급생의 수색 결과가 적혀 있을 것이었다. 전령은 정중한 손짓으로 가져온 편지를 전달했다.

“잘 받았으니, 이만 복귀해도 좋아.”

미하일은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전령의 시선을 느끼곤 손을 휘적였다. 그의 눈은 편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네, 그럼.”

전령은 말에 다시 올라탔다.

그가 왕자 일행 영역을 천천히 벗어나자마자 왕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의 옆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바로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종이를 꺼내 읽어 내렸다.

━━━━⊱⋆⊰━━━━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왕자 저하,

저하가 기다리실 듯하여, 그간의 수색 상황을 편지에 함께 동봉하여 전달드립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안타깝게도 아드리안 헤더의 행방에 대해서 명확히 알아낸 정보는 이번에도 없습니다.

━━━━⊱⋆⊰━━━━

미하일은 편지를 읽다 말고 눈을 질끈 감았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미하일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만약 카일이 유효한 증거나 정황을 찾아냈다면 이런 매달 받는 형식적인 편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라도 접촉을 해 왔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과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통보받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미하일은 카일 드바이시가 졸업하자마자 왕성의 연구자로 임명했다. 그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결정이었다. 카일의 연구자로서의 면모를 높이 사는 것도, 그의 연구 자료에 흥미가 많아서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아드리안 헤더의 행방을 끝까지 파헤칠 사람이 있다면, 오직 카일과 자신 이 둘밖에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그런 미하일의 결정을 감사히 여기며 왕성의 연구실에서 바사미엘 시절부터 하던 연구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그는 오르디나스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왜 아드리안이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그 흐름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늘 이야기했다.

미하일은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 시간을 들여 모두 읽어 내려갔다. 가장 위쪽에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쓰긴 했지만, 그 밖에 헤데라 상단과 오랫동안 일했던 가문을 만난 일이나 주변 마을의 사냥꾼들의 증언과 같은 자잘한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미하일이 편지 제일 아래쪽의 추신을 읽고 편지를 다시 접으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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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루스타바란 왕성의 온실을 어제 처음 다녀와 보았습니다.

바사미엘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더군요.

그런데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온실에서 정문으로 가는 길목에 미르킨트가 피어 있던데, 그것을 온실로 옮겨 심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역사와 전통이 깊은 루스타바란 왕성에 미르킨트가 피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것이 자칫하면 잡초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곳에 피어 있다 보니 학자로서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연구 자료로 쓰일 수 있는 만큼, 안전하게 온실에서 보존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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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락, 그의 손안에서 퍼석한 편지지가 살짝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읽고 있던 편지의 어느 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그 단어 위를 떠날 줄을 몰랐다. 또렷한 목소리가 그 단어를 소리 내어 발음했다.

“미르킨트.”

들어 본 적 있는 단어였다. 삽시간에 그의 전신을 훑고 지나간 이상한 위화감에 미하일은 미간을 천천히 찌푸렸다. 드래곤의 무덤에 피어 있었던 피처럼 붉은 꽃의 이름이었다.

“미르킨트가 왜 그곳에?”

미하일은 그가 읽은 내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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