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루스에게 향했던 미하일의 짜증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삽시간에 사라졌다. 출발 시간이 한참 지나도 꾸물거리더니, 갑자기 병에 걸린 것 같다고? 하필이면 드래곤의 힘이 전부 사라졌을 때에. 아무래도 심각한 사안임이 틀림없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미하일은 침대에 누워 웅크리고 있는 루스에게로 걸어갔다. 루스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설명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배 속이 너무 아파.”
“…….”
배 속이?
휙, 미하일은 빠르게 루스가 이불 아래를 걷어 냈다. 그러자 자신의 배를 감싸 안은 루스가 보였다. 미하일은 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빨리 루스의 이마에 손을 짚어 보았다. 땀이나 열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색이 좋지 않고 얼굴이 하루 사이에 핼쑥해진 것 같았다.
“얼마나 아프시길…… 아니, 일단은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이건 죽을병인 게 틀림없어. 내가 아는 인간의 의학 지식 중에서 이런 증상을 보이는 병은 하나도 없으니, 아마 심각한 병일 테지.”
으으윽, 루스는 코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미하일은 그런 루스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빠르게 문 쪽으로 향했다. 숙소 주인에게 얘기하면 아마 의원 정도는 연결시켜 줄 것이었다. 문을 나서기 전, 루스를 진정시키려 한마디 건넸다.
“그건 의원이 와야 알 수 있겠죠.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
그때였다.
-꼬르르륵.
방 안을 울리는 소리에 배를 쥐고 웅크리고 있던 루스가 천천히 시선을 배로 내렸다. 그는 그제야 왜 배가 아팠던 것인지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소리는 드래곤도 익히 들어 본 것이었다. 물론 인간과 다르게 공복을 느끼지 않는 드래곤의 배에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난 적 없는 소리였지만.
“…….”
방을 나서려던 미하일은 걸음을 멈춘 채 잠시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발걸음을 돌려 루스가 누운 침대로 다가간 미하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 배가 고픈 것뿐이네요.”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의원 대신 진단을 내렸다. 공복은 병이 아니니 의원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미하일의 깔끔한 진단에 루스가 눈을 치켜떴다.
“그럴 리가.”
고개를 좌우로 젓는 루스를 향해 미하일이 딱 잘라 말했다.
“식사를 거르니까 그런 거잖습니까. 심지어 어제 오늘 식사를 건너뛰었으니.”
“……겨우 몇 번 식사를 안 챙겼을 뿐인데.”
그렇게 사소한 일 때문에 이렇게 아프다고?
루스는 처음 느껴 보는 공복감에 배를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나마 주린 배를 꾹 누르고 있으니 고통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별 쓸모도 없는 몸뚱어리 주제에, 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수만 가지나 되었다. 지금까지 드래곤에게 식사란, 유희 중에 인간들의 흉내를 냈던 것이 전부였다. 인간들처럼 식기를 쓰고, 음식을 입에 밀어 넣고, 그걸 씹고 삼키는 것은 능숙하게 해 온 루스였지만, 그 행동의 근본적인 이유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배가 고프면 이렇게 되는 거라고…….”
루스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잠시나마 병에 걸린 줄 알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빵 한 조각을 가지고 길 위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인간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던 기억이 드래곤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결국은 빵 한 조각 때문이었다. 인간들은 그것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때로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래, 이 공복이 인간들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드래곤은 식사에 집착하는 인간들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은 참 불쌍한 종족이군. 거추장스럽게 말이야.”
심지어 하루에 몇 번이나 식사를 해야 하잖아.
그의 중얼거림에 미하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병에 걸린 것 같다 하여 덩달아 걱정해 주었더니 겨우 배가 고픈 거였다니. 드래곤은 다칠 일도 없어서 그런가? 이런 사소한 것에 엄살이 심했다. 어젯밤 인간의 몸이 되고 난 뒤는 물론이고, 이전부터 드래곤은 툭하면 식사 시간에 딴청 부리며 놀기 일쑤였다. 그 기간까지 포함해서 루스가 공복이었을 시간을 셈해 보니 생각보다 꽤 되었다.
미하일은 나직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어쨌든 속이 상했을 테니 수프를 준비시키라 해야겠군요.”
“수프?”
루스는 미하일이 꺼낸 음식 이야기에 그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음식이었다. 먹기도 번거로울뿐더러 무언가를 씹는다는 행위도 할 수 없는, 드래곤에게는 가장 재미없는 메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미하일이 꺼낸 ‘수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온몸에 힘이 생겨났다. 그러고는 목울대가 꿀꺽 하고 위아래로 한 번 움직였다. 이전에 먹었던 수프의 맛이 입안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음식을 먹기 전에 맛을 상상했던 적이 없었는데. 루스는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많이 가져오라고 해. 최대한 많이.”
“……그러죠.”
예정에도 없는 식사 시간이 끼어드는 바람에 미하일은 어쩔 수 없이 출발을 뒤로 미뤘다.
눈을 반짝이며 명령하는 루스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 한 접시가 루스 앞에 놓였다.
숙소 전체를 빌린 귀족 일행이 수프를 요청했다는 것을 듣자마자 주방장이 나섰다. 그는 흰 셰프복을 입고선 테이블 옆에 서서 한껏 기합이 들어간 자세로 요리를 직접 소개했다.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수프입니다. 우선은 환자분도 드실 수 있도록 자극적이지 않은 재료만을 사용했으며, 오늘 새벽에 들어온 완두콩의 상태가 좋아서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따뜻할 때에 드시면 설탕을 따로 넣지 않아도 달큰하게 드실 수 있을 겁니다.”
“아아, 그렇군요.”
설명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냥 빨리 먹고 싶은데.
루스는 주방장의 설명을 귓등으로 들으며 대강 대답했다. 그는 아까부터 눈앞의 수프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의자에 우아하게 앉아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는 전혀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방장이 그런 루스를 보며 역시 귀족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주방장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제야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루스가 손을 뻗어 스푼을 쥐었다.
“그러죠.”
미하일은 옆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루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하일과 루스가 앉은 곳을 제외하고는 식당 테이블이 전부 비어 있었다. 주방장이 식당을 나가자 루스는 수프를 가볍게 떠서 입에 넣었다.
스푼이 입안으로 들어간 후, 무표정하던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아주 매끄럽게 펴졌다. 루스는 곧장 또 한 번 스푼을 입에 밀어 넣었다. 왕가의 철저한 예절을 배운 미하일이 보기에도 흠 잡을 곳 없이 딱 떨어지는 자세였다.
따뜻한 수프가 식도에서부터 위장까지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온전히 느껴졌다. 배고프다며 아우성치던 위장이 삽시간에 잠잠해지는 느낌이었다. 루스는 그 따뜻함에 살며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맛있네.”
루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옅은 초록빛의 완두콩 수프는 어느새 접시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직 한참은 모자랐다. 지금 이 상태라면 최소한 쉰 접시는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테이블 위의 종을 집어 들고는 짧게 흔들었다.
그러자 식당을 나섰던 주방장이 헐레벌떡 뛰어들어 오더니 루스 앞의 접시를 슬쩍 확인했다. 그는 완전히 비어 있는 접시를 확인하고는 표정을 정리하려 했으나 계속해서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루스는 주방장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맛있게 드셨다니, 영광입니다.”
“이걸로 한 접시 더 먹을 수 있습니까? 아니, 그냥 솥째로 전부 내와도 좋아요. 남으면 가져갈 테니.”
주방장은 루스의 요청에 헤벌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 경력을 통틀어 요리를 솥째로 가져가겠다는 극찬을 들어 볼 일이 얼마나 자주 있겠는가.
“당연하죠.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식당을 나서자, 옆의 테이블에 앉은 미하일이 나직하게 핀잔을 주었다.
“……식으면 본래의 맛이 안 날 텐데요.”
루스는 이상한 말을 들었단 듯이 왕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식다니? 지금 전부 먹을 거야.”
“…….”
그게 가능한가?
미하일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이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드래곤도 생각이 있어 저런 선택을 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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