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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28화 (128/184)

128화

“내가 그냥 인간이 되었다니…….”

루스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언덕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 서 있던 ‘그냥 인간’인 미하일 또한 당황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는 급히 상체를 숙여 루스의 얼굴을 살폈으나, 이전과 별다른 차이는 느낄 수 없었다.

“모두 사라졌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드래곤의 힘 말입니까? 겉만 봐선 잘 모르겠는데…….”

그러나 지금 드래곤에게는 미하일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루스는 이 절망적인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땅을 짚은 두 손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내가…… 내가,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고?”

루스는 퍽, 땅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냥 속으로만 삼키기에는 분노가 너무 컸다.

“강요하지 않는다면서!”

이미 죽은 고룡을 원망해 보았자 잃었던 힘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었으나, 루스는 무척 억울했다. 아주 잠깐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이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했었는데, 그 벌로 지금 이렇게 나약한 인간의 몸에 갇히고 말았다. 물론 그 망할 오르디나스로서는 적절한 타이밍일 터였다. 드래곤은 실제로 이 세상을 멸망시킬 뻔했으니. 하지만…….

“고작 인간으로 대체 뭘 하란 말이지?”

고룡이 말한 드래곤의 역할을 이 몸뚱어리로 수행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루스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깐 살아가는 유희라면 몰라도, 드래곤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누군가의 멋모르는 검이나, 마법, 심지어는 고작 병으로도 죽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었다.

“…….”

바로 옆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미하일의 표정이 묘했다. 저렇게까지 인간이 된 것에 절망하고 있는 드래곤에게 인간 입장에서 딱히 위로로 해 줄 말이 없었다. 미하일은 한참 동안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충격의 여파로 도통 언덕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루스에게 어렵사리 위로의 말을 건넸다.

“힘은 곧 되찾으시겠죠.”

툭, 툭. 미하일은 언덕에 주저앉은 루스의 등을 두드렸다. 어색한 손짓이었다.

그 목소리에 루스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순간 불이 붙은 듯 번뜩인 것 같았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감히 내게 위로를 해?”

“그런-”

억지가 어딨습니까? 라고 미하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흰 손이 밑에서 확 치고 올라와 멱살을 움켜쥐었다. 루스를 향해 약간 몸을 기울이고 있던 미하일은 그 손힘에 못 이겨 순식간에 억지로 끌어 내려졌다. 다음 순간, 몸이 기울면서 풀밭에 등을 대고 누운 상태가 되었다. 루스가 미하일 위로 올라타더니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난 그냥 조용히 소원만 들어주고 갈 생각이었는데, 네 망할 검이 이렇게 만든 거잖아.”

“……도대체 무슨 일인 건지 모르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아무튼 그 검 내 놔. 당장 녹여서 말발굽으로 쓸 테니까.”

루스의 손이 불쑥 미하일의 허리춤으로 향하더니 펠렌 디프스의 검을 낚아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미하일은 이를 악문 채 그것을 막아서려 검 손잡이와 루스의 손을 함께 세게 쥐었다. 둘은 한동안 몸싸움을 이어 갔다. 드래곤의 힘이 사라지고 보니, 악력이 미하일과 비등비등하단 걸 체감했지만 루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놔! 손가락 뼈 부러지고 싶지 않다면.”

“당신이나 놓으시죠!”

그러나 미하일도 본래 고집이라면 끝내주는 인간이었다.

엎치락뒤치락 검을 뺏으려 움직이던 둘은 끝내 언덕의 완만한 면을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을 누웠다가, 올라탔다가 하다 보니 어느새 언덕 아래의 철문에 미하일의 등이 닿았다. 루스 또한 진이 다 빠졌던지 하늘을 바라보며 누운 채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붉은 미르킨트 꽃들만 제외한다면 여전히 평화로운 언덕이었다. 미하일은 누운 채로 옆의 루스를 바라보았다. 펠렌 디프스의 검을 마지막까지 손에 쥔 인물은 결국 미하일이었다.

“……일단 문이 닫히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루스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심통 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미하일의 말처럼 일단은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루스는 몸을 일으킨 후, 언덕에서 구른 탓에 이리저리 붙어 있는 풀들을 대강 툭툭 털어 냈다. 그러고는 검을 두 손으로 잡은 채로 누워 있는 미하일을 힐끔 바라보더니 무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일시적인 휴전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미하일은 루스의 손을 잡고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언덕의 철문은 다행히 그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둘의 발이 건너편에 닿자마자, 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아악- 바람에 흩어지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미하일은 축 처진 채로 옆에서 걷고 있는 드래곤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소원을 들어주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니까 걱정 마.”

아주 잠깐 동안 아드리안 헤더의 시신을 찾아 달라고 했던 자신의 소원을 잊고 있었던 미하일은 루스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펠렌 디프스의 검이 드래곤의 마법에 특이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드래곤의 힘을 뺏은 이후로 검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내뿜던 흰 빛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미하일은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슬쩍 바라보곤 혀를 짧게 찼다.

루스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풀썩, 침대에 몸을 파묻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고 있으니 위엄 있는 드래곤이 아닌 그저 실의에 빠진 청년처럼 보였다. 루스는 이불 속에서도 미하일의 시선을 느꼈던지 그 안에서 웅얼거렸다.

“신경 쓰지 말고 내 방에서 나가. 거슬려.”

미하일은 문가에 기대어 서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신경을 안 쓰려 해도 저절로 시선이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일 점심에 다시 출발할 예정입니다.”

“알았어. 시간은 잘 지킬 테니 빨리 나가래도.”

미하일은 침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드래곤과는 어떤 대화를 하셨던 겁니까?”

미하일의 질문에 루스는 뒤집어쓴 이불을 휙 치웠다. 그러자 침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미하일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뭐가 궁금하지?”

아무리 들어도 아드리안과 똑같은 목소리였다. 미하일은 애써 시선을 돌린 채, 조금 전 언덕에서 마치 모래처럼 뼈만 남기고 사라진 고룡을 떠올리며 말했다.

“정말로 그가…… 오르디나스였습니까?”

루스의 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아니.”

냉정한 대답이었다.

미하일은 침대에 누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루스를 마주 응시했다. 아마 그도 고룡과의 만남을 되새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운명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말은요? 그것도 사실입니까?”

루스의 입꼬리가 옆으로 슬쩍 기울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러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되돌아온 드래곤의 물음에 미하일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아드리안 헤더가 죽고, 제가 당신을 소환하고, 당신에게 소원을 말한 이 모든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요?”

그의 머릿속에선 바사미엘 아카데미 축제날의 불꽃놀이가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펑! 황금색 빛이 어두운 저녁 하늘을 덮었고, 아드리안의 맑은 눈 안에서도 그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반짝였었다. 고작 십수 년 살아온 청년치고는 지독히 냉소적인 표정이었다.

“오늘 무투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면. 그리고 그걸 네가 경기장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 ……너도 재미가 없었을 거야.”

아드리안은…… 이미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그는 마법을 사용하지도 못하는 평민이었다. 이 세상의 흐름 같은 것을 깨우칠 만한 나이도 아니었으며, 고작 아카데미의 일 학년 학생의 지식으로는 혼자 알아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하일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 이 검을 손에 넣는 것조차도?”

“그래.”

드래곤은 미하일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했다.

루스의 눈이 힐끔, 미하일의 검에 닿았다. 제 손으로 미하일에게 넘겨주었던 검이었다.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는 아주 빌어먹을 검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이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먹이사슬의 한참 아래인 인간의 몸에 갇히게 되었다.

“도대체 뭘 위해서일까요?”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에 의문이 가득 차올랐다. 이 운명의 흐름 제일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무언가 또한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었다. 그게 행복한 결말일지, 불행한 결말인지 미하일은 어떤 것도 예상을 할 수 없었다.

“우선은, 날 위해서는 아니란 건 확실해.”

드래곤이 투덜거렸다. 지금 그의 꼴을 보면 그건 정말인 것 같았다. 루스는 잠시간 눈을 굴리며 다른 생각을 하다가 몸을 홱 뒤로 돌렸다.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몸짓이었다.

***

다음 날 점심, 미하일은 로비에서 루스를 기다렸다. 왕자는 이미 운동 후, 간단한 아침 겸 점심 식사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는 숙소의 직원들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명한 후 로비에서 루스가 준비를 끝내고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이 한참 지나도 그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분명 점심에 출발한다 말했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미하일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루스의 방문 앞까지 걸어왔다. 그러고는 절도 있는 자세로 똑똑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왜?”

“출발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미하일이 말하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더니 잠시 간격을 두고 “곧 나갈게.”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어제처럼 풀이 죽어 있나? 미하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방문을 열자 보인 침대 위에는 커다란 청년이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왜 아직도 누워 있어? 여태 준비도 안 하고. 미하일이 짜증을 내려던 찰나였다.

“……아무래도 무슨 병에 걸린 것 같아.”

“예?”

루스의 말에 미하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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