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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27화 (127/184)

127화

미하일은 허리춤에 매여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드래곤의 살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할 만한 짓은 아니었으나, 마치 그를 부르고 있는 듯한 검의 움직임에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펠렌 디프스의 검이 똑똑히 보라는 듯 철컥, 하고 쇳소리를 냈다. 미하일은 천천히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펠렌 디프스의 검은 미하일의 손가락이 검 손잡이에 닿자마자 정답이라는 듯 그 부분부터 환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미하일은 눈을 멀게 할 듯이 밝은 빛에 팔을 들어 최대한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검 손잡이를 쥔 오른손은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검 손잡이에 고정된 것 같았다. 미하일이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오른손은 천천히 검을 뽑아냈다. 마치 누군가가 대신 그 손에 힘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의 흰 검신이 밖으로 나오면서 그 빛은 점차 면적을 넓혔다.

“승산도 없는 상대에 먼저 검을 뽑아 들다니, 아직 한참 더 배워야겠군.”

탁한 마나 때문에 검은 비늘이 돋아난 루스의 눈이 샐쭉 길어졌다. 마치 눈에 보일 듯한 살기가 루스의 주변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미하일은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그는 시선을 루스에게서 떼지 않은 상태로 검 손잡이를 잡은 손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손은 마치 아교로 접착한 듯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이건, 손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일 뿐.”

미하일은 루스의 말에 억울하단 듯이 중얼거렸다. 스르릉- 그 말과 동시에 흰 장검이 검집에서 모두 빠져나왔다. 펠렌 디프스의 검은 마치 드래곤의 살기에 반응하듯이 눈부시게 흰 빛을 뿜어냈다.

“내게 겨눌 게 아니라면 다시 집어넣지 그래?”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윽, 루스는 그 환한 빛에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끔찍한 두통이 날뛰고 있었다. 머릿속을 검은 마나들이 이리저리 휘젓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비늘이 피어나고 있는 눈가부터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점차 더 멀리 퍼지기 시작했다. 망할, 저 검은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에 거슬렸다.

으득, 루스는 그 고통에 이를 갈았다.

“그 검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니까?”

미하일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미하일이 검을 든 손을 움찔거렸지만 그 이상으론 꿈쩍도 않았다.

잠시간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던 루스가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여전히 검은 비늘이 돋아나 있는 그의 얼굴이 미하일의 눈에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괜찮아 보여?”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지금껏 한 차원 다른 위대한 존재로만 보였던 드래곤이 어쩐지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약해 보였다. 미하일이 그런 루스를 걱정하듯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루스의 팔이 단번에 거리를 좁히며 미하일에게 다가왔다. 미하일이 자신의 검을 향해 뻗어 오는 손을 피하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드래곤의 손이 검에 닿는 순간, 환한 빛이 마치 폭발하듯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갑자기 루스의 두통이 전부 사그라들었다. 루스는 이 이상한 현상에 검에 대고 있던 손을 거둬들였다.

그때였다.

처음엔 뿔이었다. 루스의 머리카락 사이로 커다란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응?”

루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황금빛 홍채 안의 동공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가늘게 좁혀 들었다.

이어서 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루스의 몸집이 천천히 불어났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의 등이 갈라지며 커다란 날개가 뚫고 나왔다. 루스는 그제야 지금 이 상황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던 몸이 본체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마나를 거두어 멈춰 보려 해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힐끔,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놀란 듯 굳어 있는 미하일이 눈에 들어왔다. 저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간 위험할지도 몰랐다.

“내 옆에서 당장 떨어져.”

루스의 몸은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금빛 마나에 완전히 휩싸였다. 인간의 몸으로 지내며 잠시간 잊고 있었던 꼬리의 감각이 천천히 돌아왔다. 멍한 얼굴로 드래곤을 바라보던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를 거의 작은 언덕만한 크기의 무언가가 차지했다.

꼬리 끝부터 머리 위에 난 뿔까지 완벽히 금빛으로 반짝이는 골드 드래곤이었다. 조금 전 영면에 들어간 하얀 고룡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였다. 크기만이 아니라, 넘치는 생명력으로 밝게 빛나는 비늘에서도 고룡과 골드 드래곤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이게…… 이것이 본래 모습이군요.”

미하일은 경외감이 느껴지는 광경에 중얼거렸다.

드래곤은 고개를 천천히 숙여 미하일과 눈을 맞추었다. 위대한 생명체다운 고아한 움직임이었다. 후우욱- 드래곤의 따뜻한 숨결이 미하일의 은발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곤란해. 폴리모프 마법이 영 들어 먹질 않아.]

미하일의 머릿속을 어떤 음성이 가득 채웠다. 그 목소리에 미하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법을 이용해서 말하는 드래곤의 전음이었다.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겁니까?”

[그럼 또 누구겠어.]

금빛 비늘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아무래도 네가 들고 있는 이 검 때문인 것 같은데.]

드래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단 듯이 전음으로 투덜거리며 미하일이 아직도 들고 있는 검에 주둥이를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툭, 드래곤이 콧잔등으로 검을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환한 빛이 그 둘 사이를 가득 채웠다.

[으응?]

커다란 몸집을 뽐내던 드래곤의 몸통이 눈 깜짝할 새에 줄어들었다.

위엄 있는 골드 드래곤이 있던 자리에는 마차만 한 크기의 사슴이 기다란 목을 쭈욱 내민 채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뿔이 사슴의 존재감을 빛냈다.

[역시 저 빌어먹을 검 때문인 게 맞군. 감히 나랑 한번 해 보자는 건가.]

사슴은 펠렌 디프스의 검을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며 앞발굽으로 땅을 긁었다. 미하일은 그 행동에 멈칫 몸을 굳혔다. 저건, 일반적으로 사슴들이 눈앞의 것을 뿔로 들이받기 직전에 하는 동작이었다.

“……설마.”

여기로 달려드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아쉽게도 미하일의 예상은 완벽히 적중했다. 마차만 한 크기의 사슴이 네발에 힘을 싣더니 뿔을 내민 채 미하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처 피할 겨를 이 없던 미하일은 검을 쥔 손을 들어 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이어질 굉음과 충격을 예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눈을 감은 미하일의 몸통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툭, 하고는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미하일은 이상함을 직감하고는 눈을 하나씩 떴다.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사슴이 나았어.]

사슴이 있었던 자리에는 주먹만 한 노란 카나리아가 날고 있었다.

“……거기서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카나리아는 한 손에 잡힐 듯 무척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루스는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하일의 검을 향해 가볍게 날아왔다. 그 순간 흰 빛이 카나리아를 다시금 감쌌다. 미하일은 그 밝은 빛에 눈을 살풋 찡그렸다.

검이 내뿜은 밝은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자 그 안에서 루스 페니건이 보였다. 그를 둘러 싼 탁한 마나와 살기는 물론, 눈가의 검은 비늘까지 모두 사라진 인간의 모습이었다. 무슨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입고 있던 옷도 그대로였다.

“…….”

“다행히 다시 돌아오셨군요.”

미하일은 아드리안 헤더의 모습을 되찾은 드래곤을 향해 말했다.

어느새 펠렌 디프스의 검은 원래의 평범한 상태로 돌아갔다. 슬쩍 검신을 빼내어 확인해 봐도 평소 같은 검신만 보였다. 마치 제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듯이. 미하일은 마치 굳은 것처럼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자신의 손목을 이상하다는 듯 몇 번 비틀어 보더니 철컥, 검을 빠르게 다시 검집에 밀어 넣었다.

루스는 그동안에도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대로 잘 돌아온 게 맞나? 루스는 허공에 남아 있을 마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평소라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간단하게 움직였을 마나들이었을 텐데. 눈 씻고 찾아봐도 알갱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미하일.”

“네.”

최악의 결론을 내리기전에 확인이 필요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 마나의 흐름이 어떻지?”

루스는 묘한 표정으로 언덕을 크게 한 번 둘러보며 미하일에게 질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풍부하게 흘러넘치던 마나들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 이상했다.

“대기의 마나 상태가 많이 안정되었고, 당신 주변으로도 그 흐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미하일은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마나를 숨 쉬듯 다루는 고대의 생명체인 드래곤이 인간에게 묻기에는 이상한 질문이었다. 루스는 멍한 표정으로 미하일이 검지로 그린 마나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애써 보려는 듯한 눈짓이었다.

“말도 안 돼.”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손바닥을 향해 고개를 내린 루스가 중얼거렸다.

“모두 사라졌어.”

“……예?”

미하일의 반문이 들리지도 않는지 루스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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