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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26화 (126/184)

126화

“정해져 있는 일에 순순히 따르는 일…… 그런 것 따위 안 할 겁니다.”

[순순히 응할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어.]

루스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고룡의 전음에는 아무런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대답했었지.]

크르릉, 고룡이 목울대를 울리자 지면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웃고 있는 것이었다. 고룡은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그의 커다란 주둥이가 살짝 열린 채 잘게 떨렸다. 그가 웃을 때마다 흰 몸통 위위로 자란 이끼와 풀이 흔들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언덕의 풀들이 박자를 맞추듯 흔들렸다. 고룡의 거대한 흰 몸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광경을 만들어 냈다.

곧이어 웃음을 멈춘 고룡의 전음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강요하지는 않아. 그러나 어느 순간 너도 모르게, 이 세계의 흐름에 합류하게 될 거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강요가 아님을 느껴야 합니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흐름에 합류하는 것.

어린 드래곤이 제일 싫어하는 대목이었다. 그 감정을 발산하듯 루스의 갈색 눈동자에서 차가운 냉기가 폴폴 풍겨 났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룡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내려 감을 뿐이었다.

어린 드래곤과의 만남이 고룡의 머릿속에 한동안 잠겨 있었던 옛 추억들을 하나둘 불러 일으켰다.

첫 유희였다. 엘프로 폴리모프하여 첫 화살을 쏘았던 순간의 짜릿함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왕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읽은 인간들의 역사서와 그 이야기에서 종종 등장하는 드래곤들이 어찌나 신기했던지. 새의 몸으로 유희를 즐겼을 때, 어느 천재 마법사의 반려동물이 되어 그의 아카데미 설립을 지켜본 것은 또 어땠던가, 그리고 포악한 군주의 시종으로 일하며 직접 보았던 그 암투와 모략들은?

그 모든 삶들. 반복되고, 길었지만……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고룡은 푸후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코와 주둥이로 바람을 크게 한 번 불었다. 숨결이었으나, 그 안에서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생명의 밝음과 푸릇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고룡에게는 더 이상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고룡은 한때 이 세상의 모든 찬란한 것과 더러운 것을 보았으나,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흐린 눈을 떴다가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로 내리눌렀다.

[알려 준 것으로 나의 역할은 끝이다. 이제는 영원한 평안과 안식을 기다릴 뿐.]

후우욱, 거대한 드래곤의 숨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고룡은 커다란 눈꺼풀을 감은 채 잠에 들려 했다.

“당신…… 그냥 이렇게 내게 할 일을 떠넘기기만 하고 죽을 생각이었어?”

그제야 고룡이 왜 자신을 불러낸 것인지 알아챈 루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이 세상에서 눈을 뜬 후 처음 만난 동족이었다. 그에게 이것 말고도 물어볼 것이 수만 가지는 있었다. 그런데 혼자서 저런 평화로운 표정이라니, 어떻게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루스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는 고룡을 이렇게 쉽게 보내 줄 수 없었다.

“그렇게는 못 두지.”

루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언덕의 바람과 섞여 들었다.

“회복(Recovery).”

그와 동시에 그의 금안과 함께 마나가 물결치듯 움직였다.

루스가 하려는 것을 알아챈 고룡은 눈꺼풀을 천천히 닫았다가, 다시 꿈뻑 뜨면서 말했다.

[소용없대도.]

“시끄러워.”

고룡을 향해 손을 뻗자, 루스의 밝은 금발이 마나가 일으키는 바람에 나부꼈다. 그에 화답하듯 그의 빛나는 눈동자가 환하게 불타올랐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 전과 동일했다. 아무리 열심히 마나를 퍼부어도, 고룡의 몸은 좀처럼 이 회복 기운을 받아 가지 못했다. 오히려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마나의 양이 더 많았다. 루스의 미간이 점점 더 좁아졌다. 이 근방의 모든 마나를 사용한대도 좋았다. 그는 이 고룡을 다시 살리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나머지 한 팔마저 뻗었다.

입술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루스는 개의치 않고 두 손바닥 전부를 고룡의 비늘에 바짝 가져다 댔다. 흡수되지 않는 마나들을 그렇게라도 고룡의 피부에 쑤셔 넣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눈을 떠!”

그는 이마를 고룡의 차갑고 거친 비늘에 내리누르며 외쳤다.

처음보다 훨씬 거센 마나의 폭풍을 두 팔로 막으며 미하일은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다. 루스는 늙은 드래곤을 살리려는 모양이었다, 미하일이 보기에도 별다른 차도가 없어 보였다. 그의 마나들은 고룡을 비껴갈 뿐이었다. 그러나 억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루스 페니건 자신일 것이었다.

루스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내가 이딴 세상에 관심이나 가질 줄 알아? 천만에.”

고룡은 루스의 혼잣말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영원한 수면에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느낀 루스는 한쪽 입술을 차갑게 비틀어 올렸다. 고귀한 존재인 드래곤이 짓기에는 다소 비열한 미소였다.

“다 죽는다 해도 난 상관없거든. 그래, 이미 모든 것이 정해진 거라면, 더 살아 있을 의미가 없잖아. 안 그래?”

루스의 눈가에서부터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그의 피부가 작은 조각이 되어 갈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비늘이었다. 악한 마음이 드래곤의 영혼을 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바람을 팔로 막아 내는 와중에 그 광경을 목격한 미하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스…… 루스 페니건!”

하지만 루스는 미하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고룡의 피부에서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계속해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룡의 목숨을 늘려 달라는 루스의 바람은 운명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결국 고룡의 마지막 숨결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소리가 루스의 귀에 닿았다.

사아아아- 마치 사막의 바람이 커다란 모래 언덕의 부드러운 모래를 쓸어내리는 소리 같았다.

고룡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었다.

두 손바닥으로 온전히 그것을 느낀 루스가 차갑게 웃었다. 그래, 이것도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스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룡이 죽어 더 이상 치료 마법을 행할 생명체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는 주변의 모든 마나를 계속해서 자신의 손바닥 아래로 불러 모았다. 죽은 것을 되살려 본 적은 없으나, 한 번쯤 시도해 보는 것도 좋겠지.

“루스!”

미하일은 루스에게 다가가려 한 발을 떼 내었으나, 루스를 중심으로 거세게 부는 바람에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더. 그는 발을 뒤로 옮기며 이를 악문 채 외쳤다.

“정신 차려!”

그때였다.

고개를 한껏 숙이고 있던 루스가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대낮에 뜬 달처럼 희게 빛나며 미하일을 마주 보고 있었다. 미하일은 그 이질적인 광경에 표정을 굳혔으나, 조금 전처럼 뒷걸음치지 않았다. 루스는 미하일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고룡에 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그래, 네가 있었지. 미하일.”

“…….”

미하일은 분노한 드래곤을 마주한 채,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드래곤의 눈 주변에 검은 비늘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것과 마주한 순간, 온몸의 잔털이 곤두서며 삽시간에 피가 차게 식는 착각이 일었다.

왕자는 잘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를 힐끔, 움직였다. 그는 처음 그들이 걸어 들어왔던 철문이 아직 언덕 아래에 존재하는지 확인했다. 거대한 철문은 문이 열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건너편 세계의 어두운 저녁 하늘까지 잘 보였다.

“왜?”

루스는 미하일의 그 눈짓을 곧바로 알아채곤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졌나?”

눈치가 여간 빠르단 말이지.

고룡의 사체가 언덕 위에서 휙 불어오는 바람에 모래처럼 흩어졌다. 그러자 고룡의 커다란 몸집이 있던 자리에는 미하일과 루스가 처음 이 언덕에 발을 디뎠을 때 보았던 그 거대한 흰 뼈만 남게 되었다. 루스는 무표정으로 그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기울였다.

“……!”

미하일의 붉은 두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엄청난 살기가 단번에 미하일의 온몸을 덮쳐 왔다. 달칵, 미하일의 허리춤에 매달린 펠렌 디프스의 검이 쇳소리를 냈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마치 스스로 움직인 것 같은 소음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눈앞의 루스와 마주 보느라 그 소리가 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였다. 달칵, 달칵.

둔한 주인을 나무라듯, 검대에 매인 검이 다시 한 번 더 움직였다. 조금 전 보다 거센 움직임이었다. 그제야 자신의 검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미하일의 시선이 허리로 향했다.

그러자 펠렌 디프스의 검이 똑똑히 보라는 듯 철컥, 하고 쇳소리를 냈다. 미하일은 천천히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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