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루스는 피를 흘리고 있는 고룡의 주둥이 옆에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흐릿한 동공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고룡의 덩치가 큰 탓에 그의 눈동자는 마치 동굴의 입구처럼 보였다.
“……당신이었습니까?”
내 유희에 멋대로 참견한 것이?
고룡의 동공은 본래의 색이 바랜 듯이 온통 회색빛이었다. 눈 바로 밑에 루스의 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노화로 인해 시력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루스는 그 사실을 확인하곤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이래로 처음 만난 동족이 이렇게 무방비하게 약점을 노출한 상태라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내가 ‘세계’에 힘을 빌려주었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도대체 왜?”
루스는 고룡의 대답에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왜 자신의 유희에 이 고룡이 참견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륙의 운명을 바꾼 보석을 던전에 놔둔 것도, 자신을 도헤니어 화산으로 보낸 것도 전부? 그는 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불쾌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루스를 향해 미하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왕자는 드래곤의 본체를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 광경에 경외감이 들 정도로 신비했다. 그러나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혼잣말을 하는 겁니까?”
혼잣말? 그게 무슨.
고룡에게 한 번 더 물어보려 입을 열었던 루스는 미하일의 이야기에 멈칫, 입술을 꾹 다물고는 잠시간 침묵했다.
순간 바로 옆에 미하일이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고룡에게 이전 유희를 이야기할 뻔했다. 루스는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온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저 드래곤이 쓰고 있는 건 인간의 언어가 아니니까, 마법을 사용해서 머릿속에 직접 전달하는 전음이야. 네겐 혼잣말처럼 들렸겠군.”
“그가 뭐라고 말했나요.”
미하일은 드래곤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단 얼굴로 루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왕자를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 봤다면 무덤덤해 보이는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겠으나, 루스는 그 얼굴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다.
힐끔, 그는 고룡의 흐린 눈동자를 한 번 살핀 후 미하일에게 이야기했다.
“……이곳으로 나를 부른 게 자신이라고 말했어.”
“이 드래곤은 괜찮은 겁니까? 겉보기에도 피를 많이 흘리고 있는데.”
루스는 미하일의 대답을 들으며 바닥에 고여 있는 검붉은 피를 응시했다. 그와 동시에 고룡이 숨을 쉬다가 피가 목구멍으로 들어갔던지 켁-! 키익, 하는 기침을 토했다. 루스는 팔을 들어 올려 차가운 비늘로 덮인 고룡의 주둥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 참견의 이유를 묻기 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루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언덕의 바람과 섞여들었다.
“회복(Recovery).”
그와 동시에 그의 금안과 함께 마나가 물결치듯 움직였다.
루스가 하려는 것을 알아챈 고룡은 눈꺼풀을 천천히 닫았다가, 다시 꿈뻑 뜨면서 말했다.
[헛수고하지 말거라. 그저 이 몸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끝났을 뿐이니. 마법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늘어날지 모르지 않습니까.”
고룡의 만류에도 루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본래라면 회복 마법을 받고 있는 생명체의 몸 안으로 흡수되어야 했던 마나들은 좀처럼 피부를 뚫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루스는 그것을 확인하곤 미간을 찌푸리며 손바닥에 힘을 꾸욱, 주었다. 다시 한 번 더 짧은 단어가 루스의 아름다운 입술에서 만들어졌다.
“회복.”
그러나 상황은 조금 전에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마나가…… 루스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노려보았다. 무슨 이유때문인진 몰라도 마법이 잘 통하지 않았다.
골드 드래곤은 몇 번이고 회복 마법을 시도하다가 끝내 성공하지 못한 채 손바닥을 고룡의 비늘에서 떼어 냈다.
[그걸로 됐어.]
“하지만…….”
[겨우 회복이나 해 달라고 널 부른 게 아니란다.]
“…….”
루스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단 자신의 손바닥을 슬쩍 움켜쥐었다가 다시 폈다. 왜 마법이 먹히지 않지?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그럼 도대체 왜 부른 겁니까. 왜 이제 와서?”
차가운 말에 미하일의 시선이 힐끔, 루스를 향해 움직였다.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고룡은 루스의 차가운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흐린 눈을 크게 한 번 움직이고는 말을 이었다.
[드래곤들이 세계에 섞여 생활하는 것을 유희라고 하지.]
조금 전의 피 섞인 기침 때문인지 목울대를 긁으며 나는 불쾌한 쇳소리가 그릉그릉 지면을 울렸다. 그러나 막상 루스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드래곤의 전음은 죽어 가는 짐승의 것이라기에는 무척이나 또렷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희를 왜 한다고 생각하느냐?]
“할 수 있으니까.”
날카로운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루스는 짐승 특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목울대를 울리며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다. 그가 질문한 것과 전혀 관련 없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해 오는 고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룡은 어린 드래곤의 짜증을 알아차리곤 푸흐흐, 콧바람을 크게 불었다. 마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그래, 물론 그 이유도 있겠지.]
“…….”
루스는 그런 고룡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 세상 모든 종의 삶을 찰나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때였다.
켁, 케헤엑! 숨 쉬기 힘들었는지 고룡의 주둥이가 크게 벌어지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루스는 그것을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옆에서 드래곤 둘을 바라보던 미하일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하며 천천히 고룡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루스를 힐끗거리며 고룡 쪽으로 팔을 뻗었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그 고갯짓에 미하일은 자신의 손바닥을 고룡의 주둥이에 머뭇거리며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비늘에 순간 놀랐으나, 미하일은 이내 쓰다듬고 있는 것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조금 안정이 되는지 고룡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따뜻한 아이구나.]
루스는 그런 미하일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면.”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루스가 입을 간신히 떼어 냈다.
“……당신이 오르디나스라는 겁니까.”
오르디나스라는 단어에 미하일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고룡은 담담한 목소리로 되물을 뿐이었다.
[오르디나스? 그게 뭐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 말입니다.”
[신? ……신이라니. 이렇게 죽음을 기다리는 신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
오르디나스라는 단어는 인간들이 만든 단어라, 고룡은 모르는 것일 수 있었다. 루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찬찬히 머릿속으로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질서.
운명. 인간들은 오르디나스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너는 상상도 하지 못할 먼 옛날, 인간들은 우리를 숭배하며 우리에게 자비를 빌었다. 그들은 우리의 힘이 마치 신의 것인 양 떠받들었지. 하지만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고룡의 대답은 지금껏 루스가 생각했던 것과 동일했다. 드래곤은 이 세상 모든 생명체 중 가장 강하고 오랫동안 살아가는 존재였지만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드래곤 또한 죽을 수 있었고, 다칠 수 있었으며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었다.
[왜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할까.]
드래곤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 그런 게 어딨어.
아무런 대답이 없는 루스를 향해, 고룡은 죽어 가는 와중에도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수많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겪어 온 일을 담담하게 알려 주려는 것이었다.
[세계에는 우리가 필요하고, 드래곤 또한 세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어. 마계가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있고, 마물이 존재하기에 용사가 존재한다. 네가 말한 오르디나스, 운명이란 건 결국 이 흐름을 뜻하는 것일 수 있겠구나.]
피가 목을 넘어갔는지 고룡이 켁켁 대며 짧은 기침을 토했다. 루스는 그런 고룡을 찬찬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여러 번 질문드린 것 같은데, 도대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보다시피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고룡의 말을 증명하듯, 그의 주둥이 아래에는 붉은 피가 흥건했고 사이사이에 미르킨트가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껏 이 세상은 몇 번이나 마계와의 균형이 깨져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 위기를 헤쳐 나갔다. 세상은 용사를 만들어 내고 그 용사는 마물을 처치하는 방법으로. 물론 거기에는 드래곤의 역할 또한 존재했다.]
드래곤의 역할?
루스는 비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내가 싫다고 하면?”
루스는 고룡을 향해 날을 잔뜩 세운 채 경계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삐딱하게 대꾸하는 루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저런 표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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