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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24화 (124/184)

124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드래곤의 눈이 부담스러웠다.

큼, 미하일은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밖으로 나가려면 셔츠와 로브를…….”

미하일은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아드리안과 똑같이 생긴 상대의 벗은 상체를 보고 서 있기란 왕자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기다려.”

드래곤은 그런 미하일을 힐끔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하일은 검은 로브를 입고 다시 나온 드래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허리춤에 매달린 펠렌 디프스의 검이 그가 걸을 때마다 철컥거리는 쇳소리를 냈다.

미하일도 조금 전의 지진에서 바사미엘 아카데미에서 겪은 일이 단번에 떠올랐던 것이었다. 역시 오전에 봤던 산사태의 흔적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옆에서 걷고 있는 드래곤을 힐끗거렸다. 어쩌면 드래곤은 그 흔적을 보자마자 마물을 짓임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왜 그때는 내게 알려 주지 않았지?’

미하일은 속으로 떠오르는 의문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면 루스 페니건은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언제나 인간사에 깊이 관계되지 않으려 애썼다고 고서에도 쓰여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말의 앞뒤가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루스타바란의 초대 국왕 카를로를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이 드래곤 아니었던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편애가 들어간 결정이라 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답게 어둑한 밤하늘에 가로등 대신 달과 별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하일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그가 드래곤을 관찰해 온 바, 드래곤은 의외로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에는 모두 대답해 주는 성정인 것 같았다.

“이 지진의 원인을 파악하신 겁니까?”

미하일의 질문에, 검은 로브 아래로 루스의 금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아니. 나라고 모든 걸 알지는 않아.”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드래곤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었다. 미하일은 루스의 대답을 듣고는 “그렇군요.”라고 수긍했다.

"저는 이런 지진을 전에도 겪은 적이 있습니다.”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그래?”

루스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뗐다. 미하일은 바사미엘 지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드래곤도 지진을 느끼자마자, 그 철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네, 다니는 아카데미의 지하에 문이 있었는데…….”

미하일은 말을 이어 가다 말고 루스를 힐끔 눈짓했다. 그때는 지금 저 드래곤의 얼굴과 완벽하게 똑같은 아드리안이 함께였었다.

“그 문 너머에는 도헤니어 화산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샐러맨더들이 헤엄치고 있는 용암 호수도 발견했고- 어?”

미하일이 말을 하다 말고 그때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낮에 본 산사태 현장과 마찬가지로 그곳에도 흙더미가 높게 쌓여 있었다.

흙더미 바로 위에는 무척 이질적인 모양새의 철문이 육중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것과.”

응? 루스의 시선이 슬쩍 미하일에게 닿았다가 다시 눈앞의 철문으로 향했다. 놀란 표정으로 잠시간 아무 말도 못하던 미하일이 입을 뗐다.

“저것과 똑같은 철문이 지하에 있었죠.”

“신기하네. 옅지만 아주 순도 높은 마나가 느껴지는군.”

루스는 철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어 마나를 확인했다.

“그때는 문 너머에 도헤니어 화산이 있었다고? 과연 이번엔 어디일까.”

드래곤은 무척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커다란 철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철문 너머에서 루스와 미하일을 맞이한 것은, 나지막한 언덕 전체를 새빨간 꽃이 뒤덮고 있는 풍경이었다.

루스는 문 너머를 확인하자마자 멈칫, 몸을 굳혔다. 미하일은 그런 루스를 확인하곤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 저곳은 그냥 평범한 들판처럼 보였다.

“오래 살다 보면, 더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의외로 꽤…….”

드래곤의 표정이 심각했다. 그는 이 문을 넘어서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미하일은 생각했다. 드래곤이야말로 그 존재 자체로 이 대륙 전체를 통틀어 모든 생명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도대체 이 세상에 드래곤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저 언덕의 어디가 이상한 거지?

“비현실적인 장소긴 합니다만…….”

그것 외에는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미하일은 의아한 표정으로 루스의 얼굴을 재차 힐끔거렸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문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저 붉은 꽃을 고대의 인간들은 저걸 미르킨트라고 불렀지.”

“그렇군요.”

저 꽃의 이름이 지금 뭐가 중요하지. 꽃 이야기는 왕자에겐 딱히 관심 없는 주제였다. 응? 아니, 언젠가 이런 대화를 한 것 같은 기시감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그 묘한 기시감에 미하일은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루스의 나지막한 말이 그런 왕자의 표정에 균열을 선사했다.

“드래곤의 피를 먹고 피어나는 꽃이야.”

“……예?”

드래곤의 피라고? 그러면 그 꽃이 언덕 전부를 뒤덮고 있다는 것은…….

그때였다.

마치 드래곤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끼이익- 불쾌한 쇳소리가 들리며 철문이 움직였다.

미하일은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옆의 드래곤에게 물었다.

“들어갈 겁니까?”

“…….”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차가운 표정으로 루스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러다가 끝내는 인상을 구기곤 말을 내뱉었다.

“모르겠어. 어쩔까?”

“이 철문을 만든 것이 무엇이든…… 저희에게 해를 끼칠 의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그거야말로 아무도 모르지.”

루스는 순진한 미하일을 차갑게 비웃었다.

그때 도헤니어 화산에서도 몇 번이나 내가 구해 준 것 같았는데…… 제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턱대고 다른 이의 의도를 좋게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었다. 그래서인지 드래곤은 멋대로 철문을 만들어 낸 이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직접 모습을 드러내거나 원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나았다. 드래곤은 눈앞의 미심쩍은 철문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제자리에서 미동도 않았다.

그때였다.

“……문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알아.”

미하일의 말에 루스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듯이 입을 비죽였다. 지금 타이밍에 문이 움직인다는 건, 빨리 넘어 들어오라는 의도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알았다고. 들어가면 되잖아.”

옆의 미하일에게 하는 말이 아닌, 참을성 하나 없는 그 위대한 존재에게 투덜거리며 루스는 넓은 보폭으로 철문 안에 발을 디뎠다. 그들이 서 있던 시골 마을의 어두운 밤하늘과는 달리 문 안은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새파란 하늘이라, 그와 대비되었다. 언덕을 완전히 뒤덮은 붉은 미르킨트만 아니었다면 루스도 좋아할 만한 그런 한적한 공간이었다.

미하일은 드래곤을 뒤따라 문 안으로 성큼 발을 내밀었다. 이상하게 낯익은 이 느낌이 혹시 아드리안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드리안의 실종은 뭔가 석연치 않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는 힐데케 절벽에서 마치 ‘스스로’ 떨어진 것처럼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 왜? 그 이유는 아직까지 알아낼 수 없었다.

아드리안이 실종되고 난 후, 미하일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헤데라 상단의 가주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의 집안이 오래전에 가문의 연을 끊고 나갔다는 사실 밖에는 얻어낸 것이 없었다.

“아드리안 헤더? 헤데라 가문의 사람은 맞긴 하지만 워낙 멀고 먼 사촌지간이었어서…… 네, 초상화를 봐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외숙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군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 이렇게 그 가족이 모두 죽었 줄이야…….”

안타까워하는 가주의 표정을 미하일은 물끄러미 바라보았었다. 주름살과 세월의 흔적이 빼곡한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리 봐도 아드리안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 아드리안 헤더를 알고 있다며 나선 사람들은 전부 포상금을 얻어 가기 위해 거짓말하는 사기꾼들이었다.

미하일은 휘익- 산들바람에 머리칼이 흔들리자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의 발밑에는 붉은 꽃들이 빼곡히 피어 있었고, 언덕에는 넓은 간격을 두고 거대한 동물의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 햇볕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동물의 뼈지?”

커다란 고래의 뼈 같아 보였다. 하지만 여긴 전혀 바닷가처럼 보이지 않는데.

미하일은 커다란 갈비뼈에 손을 슬쩍 대 보며 혼잣말을 했다. 상아빛 뼈는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의 혼잣말에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드래곤.”

“예?”

미하일은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빠르게 잡아 뺐다.

그와 반대로 루스는 여전히 감정 한 톨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눈동자로 그들의 앞에 솟아 있는 작은 둔덕을 살폈다. 그 위에는 이끼와 잡초들이 무성히 나 있었다. 얼핏 보면 언덕과 들판 사이에서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형체였다.

루스의 눈동자가 그곳에 닿자, 둔덕 끄트머리의 무언가가 번뜩,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마차만 한 크기의 흐린 동공이 드러났다.

미하일과 루스 앞에 있는 것은 둔덕이 아니었다.

[아이야. 드디어 왔구나.]

죽어 가는 고룡이었다. 그가 말하자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전음처럼 언덕이 울렸다.

그의 거룩하고 부드러운 음성 앞에서 어린 드래곤은 침묵했다.

켈룩, 켁, 고룡은 고통스럽게 숨을 쉬다가 기침을 했다. 커다란 드래곤의 주둥이가 크게 열렸다 닫히며 가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주륵, 그러다가 검붉은 색의 피가 주둥이 사이에서 줄줄 쏟아졌다.

그의 주둥이 밑에는 새빨간 미르킨트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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