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숙소를 물색하러 나섰던 호위 기사가 미하일에게 다가와 마차로 이동할 것을 권했다.
그가 알아 온 숙소는 이 도시에서는 제일 좋은 숙소라 해도 왕족이 머물기에는 많이 모자란 감이 있었다. 미하일은 마차에 앉아 숙소의 외관을 보곤 슬쩍 인상을 구겼지만, 여기가 제일 좋은 숙소라 하니 어쩔 수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마차 두 대가 정문에 멈춰 서자, 숙소 앞을 지키던 문지기가 앞의 마차로 걸어와 투박한 손짓으로 옆면을 툭툭, 노크했다. 그러자, 앞의 마차에 타고 있던 기사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하쇼.”
문지기는 인사를 하며 마차에서 내린 기사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주욱 훑었다. 돈 많은 평민이 고용할 만한 용병 수준이 아닌 귀족적인 예의 바름과 차가움이 느껴지는 ‘진짜’ 기사처럼 보였다.
기사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네, 뭐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그래,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외부인이지?”
문지기는 뒤에 서 있는 마차를 힐끔 바라보곤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화려하고 값비싼 재료로 만든 마차였고, 외관에 가문의 문양이 없었다. 거기다 그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가 넷이라니, 특이한 그룹이었다. 명망 있는 귀족이 밀회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사랑의 도피? 그는 매우 오지랖이 넓고 귀족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성격이었다.
문지기가 고개를 쭉 내밀어 뒤의 마차를 유심히 보려 하자, 기사가 그를 제지하려 곧바로 질문을 이어 말했다.
“혹시 길 복구는 언제쯤 시작할 예정입니까?”
문지기의 관심을 돌리려는 기사의 시도는 곧바로 먹혀들었다. 그 이야기에 문지기는 마차에서 시선을 떼곤 고개를 위아래로 세게 끄덕였다.
“아하, 또 산 중턱 길로 넘어가려던 여행자들이시구만. 며칠 전에 갑자기 산사태가 났던지 흙이 다 밀려 내려왔더라고. 아직도 여전히 꽉 막혀 있는가?”
“네. 그렇습니다.”
“이런 시골 변두리 마을에서 저런 대규모 공사는 한참 걸리지. 그래도 산 아래로 조금 둘러 가면 괜찮을 거요. 조금 있으면 어두워지니까 하루 묵긴 해야 하지만.”
“여기를 이 마을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추천받았습니다.”
“어이구, 당연하지. 여기가 산 바로 아래라 경치가 제일 좋아. 높으신 분들도 가끔 휴양하러 온다고.”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왕자가 탄 마차로 향했다. 그러곤 이 여행의 결정권을 가진 미하일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미하일이 생각하는 제일 중요한 점은 불필요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다행히 비수기였던지라 숙소 전체를 빌릴 수 있었다. 밝은 은발에 새빨간 눈동자. 그의 외모를 알아보고 어렴풋이 왕족이라 생각하는 직원들의 은근한 시선을 무시하며 미하일은 로브를 눌러쓴 채 걸어가는 루스를 옆에서 힐끔, 확인했다. 그에 직원들의 머릿속에는 모두 ‘사랑의 도피’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왕족으로 보이는 이의 동행자가 이런 외곽 지역까지 와서도 정체를 숨기려는 듯 검은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아주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
그날 밤, 루스는 본인의 방에 딸린 욕실에 서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진짜잖아.”
미하일이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초상화에 그려져 있던 것처럼, 오른쪽 이마 위에 점 하나가 있었다. 왁스나 기름으로 정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두는 탓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내려와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었다. 루스는 점이 찍힌 곳을 손가락으로 슬쩍 매만져 보았다.
“이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나조차도 몰랐는데. 루스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유희를 나갈 때면 언제나 이 모습을 고수했는데, 이마에 점이 있다는 사실은 몇천 년 만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모든 학문에는 능통하면서 제 얼굴에 점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데에 더 오랜 시간과 관심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참에 자신의 모습에 더 관심을 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루스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선 채로 셔츠의 단추를 전부 풀어 내렸다. 그러곤 가볍게 상의를 벗은 채로 몸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오, 여기도 점이 있었네.”
드래곤은 신기하단 듯이 감탄을 터뜨렸다.
오른팔의 윗부분이었다. 그것 외에도 왜 지금까지는 몰랐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벗은 상체 위에는 점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휙, 거울을 유심히 바라보던 드래곤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무언가 특이한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감지한 것이 맞다는 듯, 드드득- 건물 전체가 잘게 떨렸다.
“음?”
이 느낌은…….
익숙한 감각이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에서 느꼈던 그 지진과 동일한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약하게 느껴진 지진이 자신의 존재를 더 드러내고 싶다는 듯 점점 더 세게 건물을 흔들었다. 무거운 거울이 덜컥이며 양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지끈- 이 근방의 지면이 흔들리며 숙소 바로 뒤의 산에서 나무 몇 그루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세기라면, 산사태가 생길 만하군.”
루스는 혼잣말을 하며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밖에 나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바로 맞은편의 방도 문이 열렸다. 이 지진에서 미하일도 바사미엘 지하의 그 문이 생각났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방문을 열자마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맞은편 방에서 나온 드래곤을 위아래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무척 당황한 목소리였다. 루스는 그의 질문에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는 지진 때문에 방을 나온 게 아니었나? 드래곤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나? 지진 때문에 나가 보려고.”
“그 꼴로?”
미하일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듯이 가늘게 좁아졌다. 그는 드래곤의 훤히 드러난 상체를 바라보며 힐난했다. 아무리 본인 몸이 아니라도 그렇지, 상의를 벗은 채로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한 일이었다.
그들이 대화하는 동안 기사들이 지진을 느끼곤 왕자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스는 멀리서부터 그 발걸음을 느끼고 고개를 휙, 돌렸다. 미하일은 드래곤보다 한발 늦은 타이밍에 그들을 눈치채고는 골치 아프단 표정으로 팔을 휘적였다. 멀뚱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드래곤의 껍데기는 아드리안의 몸이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몸을 애먼 사람들에게 보여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손짓에 “왕자님, 지진이-”라고 말을 이으려던 기사들의 발걸음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미하일은 문가에서 한 발짝 더 나와 기사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건너편 방의 루스에게는 나오지 말라는 듯 한쪽 손바닥을 보인 채였다.
“우린 괜찮으니, 볼일들 봐.”
“네. 그럼 편한 시간 되십시오.”
기사들은 왕자와 그의 동행에게 별일이 없다는 것을 멀리서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목례했다. 미하일은 “그래, 그래.”라고 말하며 후다닥 그들을 쫓아냈다. 이윽고 기사들이 모두 복도를 벗어나자, 미하일은 드래곤을 다시 한번 바라보곤 그에게 들릴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스는 미하일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상체를 내려다보고 나서야 깨달았단 듯 중얼거렸다.
“아, 당연히 로브를 걸쳐야겠지?”
미하일이 얼굴을 가리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었다. 그새 잊고 있었군. 루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가 검은 로브를 휙 낚아챘다.
“……그 전에 셔츠부터 입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하일은 어이없다는 듯 덧붙였다. 그의 이야기에 루스는 마침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빠르게 미하일에게 걸어가서는 그의 눈앞에 자신의 뺨 옆쪽을 들이대었다.
“그런데 이 몸의 귀 안쪽에도 점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윽, 미하일은 갑작스런 상대의 움직임에 몸을 조금 뒤로 뺐으나, 곧이어 등이 문가에 부딪혀 옴짝달싹 못 한 상태로 눈동자만 데루룩 움직였다.
“예, 예? 잠깐, 잠깐만 왜 이렇게.”
그는 말을 더듬으며 손으로 드래곤을 밀치려다가, 완연하게 느껴지는 루스의 부드러운 살에 손바닥을 움찔- 떨고는 바로 떼어 냈다. 정작 루스는 그 움직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봐, 색은 연하지만…… 이 안에도 점이 있었어.”
루스는 귀의 어느 부분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마치 그것이 세기의 발견이라도 된 듯 흥분한 목소리였다. 전에도 맡아 본 적 있는 체향이 미하일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미하일은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끌어모아 드래곤의 손가락 끝에만 집중하려고 사력을 다했다.
“네, 네. 그렇네요. 그건 저도…… 저도 몰랐습니다.”
“그래. 이건 너도 몰랐지?”
드래곤이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몸을 떼어 내자…….
미하일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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