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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22화 (122/184)

122화

“그런데…….”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루스를 슬쩍 확인한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조금 전 그가 먼저 로브가 거치적거린다고 투덜거렸던 것이 생각난 것이었다.

“굳이 마차 안에서까지 로브를 입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됐어. 이왕 입은 김에 그냥 이러고 있을 테니.”

루스가 그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미하일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계약을 한 이상, 그것을 이루는 데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를 그냥 두는 것은 드래곤에게도 손해였다.

드래곤이 마나를 실어 인간과 계약하는 것을 용언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드래곤에게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만약 용언을 지키지 않는다면 계약에 실린 마나가 독이 되어 드래곤의 본체를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인 점은 레어에 심어 둔 맨드레이크로 만들어 낸 시신을 미하일이 받아 가기만 한다면 그의 소원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끼익-

갑자기 마부가 마차를 멈춰 세우려 고삐를 바짝 당겼다. 그에 마차를 끌던 말 두 마리가 모두 놀란 듯이 앞다리를 높이 쳐올렸다. 덜컹, 하고 마차 내부가 흔들렸다가 곧이어 마차가 우뚝 멈춰 섰다.

똑똑똑. 마부가 마차 안의 승객들에게 상황을 알리려 노크를 해 왔다. 그 소리에 미하일은 곧바로 마차 앞쪽에 나있는 작은 창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앞쪽 길이 무너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산사태가 났나 봅니다.”

“뭐?”

미하일은 갑작스레 접한 소식에 입술을 비틀었다. 지금 이 루트는 힐데케산까지 직선으로 통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경로를 우회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몇 월이지?”

잠자코 듣고 있던 루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미하일은 뚱한 얼굴로 드래곤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구월입니다.”

“흐음…… 구월에 산사태라.”

창밖으로 향한 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자 지금 마차가 지나가고 있는 이 숲길의 건조한 바닥과 푸릇한 풀, 그리고 깨끗한 나무 그루터기들이 보였다. 뿐만 아니라 드래곤의 시야에는 숲 저 너머의 좁은 물줄기를 만들며 흐르고 있는 갯가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산사태가 날 정도로 폭우가 내렸다면, 아마 저 강은 더 넓은 폭과 빠른 유속으로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숲 상태를 보아하니 폭우도 아닌데. 그러면 지진인가?”

루스의 이야기에 미하일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지진은 아닐 겁니다. 이 곳은 루스타바란에서 내륙에 속하니까요.”

왕국의 해안가 마을에는 가끔씩 지진이 있었지만, 내륙 지방은 지진이 드물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가 특이했던 것이었다. 하긴, 그곳의 지진은 자연 발생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그래? 그럼 잠깐만 둘러보고 돌아오지.”

“예? 굳이 확인할 필요가-”

탁, 미하일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루스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 문을 가볍게 닫았다.

……없을 텐데요?

미하일은 그를 말리려던 손을 천천히 내려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드래곤은 왕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선대 국왕은 저런 성격의 드래곤과 몇 년이나 동행했다니. 새삼 초대 국왕 카를로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앉아 곤란하단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던 미하일이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은 마차의 열린 창문 틈으로 마부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저…… 왕자님? 그러면 경로를 우회해서 이 산 아래의 마을에서 오늘 하루 묵어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해. 일행이 잠깐 밖으로 나갔으니, 그가 돌아오면 마을로 방향을 틀지.”

어차피 마부가 제안한 방법 이외에는 딱히 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미하일은 행로 수정에 동의하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드래곤이 도대체 뭘 확인하러 마차를 나간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길 위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마차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마부가 말한 것처럼 산속에 나 있던 길이 그 흙더미에 끊겨 있었다. 상당히 많은 흙과 바위, 함께 쓸려 온 나무와 같은 장애물이 길을 완전히 덮고 있는 모양새였다.

미하일이 찾고 있는 드래곤은 검은 로브를 잘 걸친 채 고개를 숙여 그 흙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걸어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인은 끝났습니까?”

“응, 뭐. 생각했던 대로야.”

생각했던 대로?

드래곤의 무심한 대답에 힐끔, 왕자의 눈동자가 흙더미를 향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흙더미일 뿐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도?”

“그런 건 없지만…… 이걸로 일정이 조금 늘어나겠군.”

루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하일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네. 오늘은 이 산 아래의 마을에서 묵을 예정입니다.”

“오, 그래?”

미하일의 이야기에 루스가 눈동자를 빛냈다. 이 산 바로 아래의 마을이란 말이지? 드래곤은 “좋아. 그럼 출발하지.”라고 말하며 마차를 향해 휙 몸을 돌렸다. 미하일은 빠르게 걸어가는 루스의 등을 바라보다 옆의 흙더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나 특별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

호위 기사들이 행로를 틀어 도착한 마을에서 숙소를 물색하는 동안, 루스와 미하일은 잠깐 마차에서 내려 마을을 구경했다. 조금 걸어 볼까 하던 차에 루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생겼다고?”

아무리 봐도 닮은 구석이라곤 금색 머리카락과, 흔해 빠진 갈색 눈동자뿐이잖아. 루스는 벽을 뚫어져라 살피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푹 뒤집어쓴 장신의 남자가 실종자를 찾고 있는 전단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퍽 수상해 보일 법도 했다. 그래서인지 길을 지나가던 사람 몇 명이 이쪽을 흘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금 루스에겐 그런 사소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상한데.”

루스는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스윽 뺨을 매만지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움직임에 로브가 움직이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미하일이 첨언했다.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 화가에게 의뢰를 넣었지만, 직접 보면서 그린 그림처럼 완벽하진 않죠. 그리고 그때는 급하게 수색대를 꾸리느라 어쩔 수 없이…….”

드래곤은 벽에 붙은 초상화를 보자마자 단번에 미하일의 아픈 부분을 꼬집었다. 미하일 스스로도 초상화가 완벽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다. 어쩔 수 없었던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던 미하일이 말을 우뚝 멈췄다.

아니, 지금 내가 왜 드래곤에게 변명을 하고 있지? 라는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었다.

루스는 잠자코 미하일의 이야기를 듣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의 눈은 여전히 벽의 초상화에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로브를 굳이 안 입어도, 어차피 아무도 못 알아볼 것 같은데. 이런 초상화를 승인한 놈도 형편없군.”

“무슨,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이런 초상화를 승인한 놈’인 미하일이 그 말에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엉망이라니? 도대체 어디가? 미하일은 벽에 붙은 초상화를 다시 확인했다. 그래도 나름 수색에 도움이 될 만큼 닮게 그려졌는데. 이 초상화로 목격자를 물색하고, 포상금을 걸기까지 했건만 정작 찾는 대상과 닮지 않았다니. 그건 조금 심각한 문제였다.

루스는 초상화의 이마 부분을 검지로 툭,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봐, 이 초상화엔 여기 오른쪽 이마에 점이 하나 있잖아. 이런 틀린 정보 가지고는 실종자를 찾을 수 없거든. 분명히 실수로 물감이 튀었거나, 의뢰를 넣은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거지.”

“…….”

미하일은 그런 루스의 손가락이 향한 부분을 잠시간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저 점이 뭐가 문제지? 그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루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로브 안 쪽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이건 혹시 고대의 농담입니까?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만.”

“농담이라니?”

루스는 놀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방금 한 말이 농담은 아니란 소리였다. 미하일은 잠시간 고민한 후 나직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잠깐, 실례.”

응? 그 갑작스런 움직임에 루스는 가만히 미하일이 하려는 일을 관찰했다. 어차피 인간이 드래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었으므로 내버려 두었다.

미하일의 기다란 손가락이 로브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리고는 우아한 움직임으로 로브의 천을 살짝 들추었다.

스륵, 로브 윗부분이 벌어지면서 어두웠던 시야에 밝은 해가 들어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로브에 가려져 있던 밝은 금발이 드러나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왕족의 것치고는 조금 거친 감이 있는 미하일의 손이 루스의 금색 머리칼에 가까워졌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이마에 살짝 걸린 루스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웠다. 그 자리에는 아주 조그만 점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잘못된 정보가 아닙니다. 정말로 여기에 점이 있는걸요.”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스륵, 정면의 루스를 향해 움직였다. 같이 방을 쓴 사이였지만,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얼굴에 손을 대본 것은 처음……이었다. 부드러운 뺨이 손가락 너머로 만져졌다. 그리고 이렇게 있으니 아드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슥-! 미하일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빠르게 손을 잡아 뺐다. 그러고는 다시 로브의 후드 부분을 위로 끌어 올려 남자의 외관을 다시 가렸다.

“……소환된 이후로 거울을 제대로 보신 적이 없나 봅니다.”

“뭐, 그렇긴 하지만.”

드래곤은 묘한 표정으로 이 일련의 돌발 행동을 해 온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이 몸을 아예 다른 인간의 몸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억겁의 시간 동안 드래곤이 사용해 온 몸이었다. 다시 말해, 아드리안 헤더라는 이름으로 유희할 때도 이 몸을 쓴 것이다.

‘아드리안’을 좋아한다더니, 누군가를 좋아하면 이마 위의 작은 점까지도 알게 되는 건가.

루스는 초상화와 같은 위치의 점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그 옆에서 미하일은 저도 모르게 저지른 행동을 되짚으며 땀이 밴 손을 꾸욱 쥐었다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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