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루스는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피를 힐끔 확인하고는 미하일을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미하일은 무표정으로 드래곤을 마주 보며, 그의 손가락이 스쳤던 뺨 부근을 손바닥으로 스윽 문질렀다.
생포하긴, 무슨.
겉으로 미소 짓는 것과 다르게 루스는 비웃었다. 이렇게 피 냄새를 잔뜩 묻혀 와 놓고서 뻔뻔한 얼굴로 생포했다고 하다니 제법이었다.
"피가 튀었길래."
다섯 모두 사살했거나, 생포되기 전에 자결한 거군.
드래곤은 어른 앞에서 허세 부리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듯 미하일의 거짓말을 귀엽게 넘어가 주었다. 왕족이라더니, 처세술은 은근히 좋단 말이야.
그사이에 화살을 모두 회수한 기사가 미하일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마법 감식 의뢰를 맡기고 혹시 특이한 점이 있으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네, 그럼 다시 주변이 정리되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갑자기 마차를 세워야 해서 불편하셨죠? 빨리 다시 출발을…… 하겠, 하겠습니다……?”
미하일에게 상황 보고를 한 후, 동행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 기사가 멈칫, 몸을 굳혔다.
그제야 막내 왕자님의 동행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네.”
그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루스는 기사에게 인사를 해 주며 옅게 웃었다. 드래곤의 얼굴을 바라본 인간이 숨을 멈추는 것 정도야 무척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사가 놀란 이유는 눈앞의 엄청난 미남의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외모’ 때문인 것은 맞았다. 험악하게 생긴 커다란 덩치의 기사는 천천히 무언가 떠올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오랜 기간 동안 왕가의 수호를 담당해 왔고, 막내 왕자의 호위에도 여러 번 동행했던 터였다.
기사의 눈썹이 소파에 앉아 미소 짓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나면서 벼려진 노련한 눈썰미와 동물적인 감각이 발휘된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초상화 하나가 있었다. 그래, 지금 저 소파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는 그가 힐데케 절벽에서 찾아다녔던 그 ‘아드리안 헤더’라는 학생의 생김새와 완벽히 일치했다.
“혹시…….”
기사가 ‘혹시 아드리안 헤더 님이십니까?’라고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수고 많았어.”
미하일의 팔이 불쑥 튀어나와 기사의 시야를 가렸다.
미하일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 보았자 좋을 것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 정리하는 걸 도와주는 손이 많다면 더 빨리 출발할 수 있겠지. 이제 그만 나가도 좋아.”
“……네. 그럼.”
마차에서 당장 내리라는 뜻이었다.
기사는 해결되지 않은 의문점을 가슴속 깊이 꾹 눌러 담은 채 빠르게 몸을 돌려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모시고 있는 왕족들의 생각을 절대 넘겨지지 않는 것. 왕성에서 일하는 기사의 올바른 마음가짐이었다.
미하일은 기사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한숨을 작게 쉬면서 털썩, 소파에 앉았다. 미하일의 허리춤에 잘 매여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이 그 움직임에 철컥,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왕자가 방금 밖에서 했던 수습은 일반적인 아카데미의 학생이 할 만한 일들은 아니었다. 마차를 공격해 온 적들은 위치가 발각되자마자 입안에 새겨진 자결 마법진을 활성화시켰다. 현장에 직접 나선 미하일을 호위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막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직접 적들의 얼굴을 모두 확인했다. 아마 그 과정에서 뺨에 핏방울이 튄 것 같았다.
루스가 미하일에게 질문했다.
“다섯이 한 번에 공격해 왔다는 건 어떤 조직이 뒤에 있다는 건데…… 짐작 가는 곳이 있나 봐? 그렇게 침착한 걸 보면.”
그러자 미하일의 새초롬한 눈초리가 루스를 향했다.
“별일 아닙니다. 습격이야 이런 변방에선 흔한 일이니까요.”
“그래?”
“의외로 인간사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정중한 말투였으나, 결국 미하일이 내뱉은 속내는 이쪽에 관심 끄라는 의미였다.
그것을 단번에 이해한 루스는 입술 한쪽만 비죽 올렸다. 미하일은 맞은편에 앉은 그런 드래곤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전 호위 기사가 드래곤의 외관을 보고 알아차린 것처럼 힐데케산에 가까워질수록 ‘아드리안 헤더’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이 많아질 터였다. 지금까지는 기사들 모두 거리를 두고 호위하느라 왕자가 지금 누구와 동행을 하고 있는지 가까이서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 일이 또 생기는 건 곤란했으나 그렇다고 초상화를 수거하면서 아드리안 헤더의 수색을 그만두라 명령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미하일은 잠깐 고민하다 말을 이어 갔다.
“다음 마을에선 의류점을 잠시 들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동행하고 있는 것을 알려선 좋을 게 없으니…… 로브라도 걸치는 게 좋겠네요.”
“로브? 그런 건 거치적거려서 싫어. 네가 입을 거라면 뭐, 상관하지 않을게.”
미하일은 드래곤의 유치한 대답에 눈썹 한쪽을 움틀, 움직였다.
방금 그가 제안한 것은 겨우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거절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리고…… 미하일은 짜증스레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제가 왜 로브를 입습니까?”
미하일의 얼굴에 올라온 짜증을 루스가 눈치채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인간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쪽이 입는 거지. 참고로 난 전혀 신경 안 쓰이거든.”
“…….”
미하일은 드래곤의 뻔뻔함에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다시 설명드리자면, 당신과 똑같은 얼굴인 아드리안 헤더의 수색이 아직 한창입니다. 그 얼굴로 거리를 돌아다녔다간 괜히 곤란한 일만 생길 거고요.”
“……수색?”
“심지어 주변 마을에는 그의 초상화도 여러 곳에 붙어 있습니다.”
“하, 초상화까지 붙어 있단 말이지…….”
아예 그냥 실종이라 확신하고 있었군.
루스는 소파에 편하게 기댄 채로 맞은편의 미하일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마차의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절벽에 떨어져 죽은, 아니 그의 입장에선 실종된 아드리안 헤더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디를 저렇게 보는 거지? 루스는 미하일이 바라보고 있는 쪽 외부의 인기척을 슬쩍 확인했으나, 이 마차를 중심으로 넓은 반경 안의 인기척은 마부 외에는 자신과 미하일, 둘뿐이었다. 미하일은 갑자기 거론된 아드리안 헤더에 관련된 이야기에 단번에 울적해진 모양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드래곤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다 보였다.
꽤나 불쌍해 보였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루스는 이미 끝난 유희를 다시 시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알았어. 그런 거라면 의류점에 굳이 들릴 필요는 없잖아.”
생각보다 빨리 수긍하는 루스를 미하일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루스 입장에서는 미하일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점이 여러모로 편했다. 대놓고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평민으로 유희를 하다 보면 마법을 못 쓰는 척해야 하는 것이 제일 불편했다.
물론, 그래서 더 재밌긴 했지만.
사아아- 잘게 빛나는 마나 알갱이들이 루스의 금빛 눈동자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저들끼리 뭉쳐지더니 남자의 금발 머리칼 꼭대기에서부터 천천히 검은 천 조각을 만들어 냈다. 검은 천의 끄트머리의 금색 마나 알갱이들이 미끄러지듯이 남자의 머리, 턱, 그리고 어깨까지 내려왔다. 마치 금빛 실로 검은 로브를 자아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루스를 팔과 등 전체를 완전히 감싸고 난 뒤에야 공중에 살짝 떠 있던 것이 가라앉았다.
루스가 마법을 쓰는 일련의 과정에서 미하일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루스의 금빛 눈동자에는 아직 마나 알갱이들이 부드럽게 흘러 다녔다. 마치 금과 보석을 한데 녹인 것이 움직이는 모양새였다.
이상했다. 아드리안은 마나를 전혀 사용할 수 없었는데…… 가끔씩, 아주 가끔씩 지금의 저 드래곤의 금안처럼 반짝거리곤 했다.
“왜? 검은색 로브는 너무 어둡나?”
루스는 부드러운 질감의 천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물었다. 미하일이 아무 말도 없이 저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을 보니,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요. 그거면 완벽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로브였다.
물론 큰 키와 날렵한 체격까지 완벽하게 가려 주진 못했지만, 얼굴을 가리는 것만으로도 이 동행이 한결 편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의견을 받아들인다니,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드래곤이 초상화까지 붙여 가며 친구를 찾는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 들어준 것임은 꿈에도 모른 채, 미하일은 고민했다.
“그래. 그럼 이걸로 하지.”
루스는 이 대답 이후로 별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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