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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20화 (120/184)

120화

“짠, 오래 안 기다렸지? 내가 말했잖아.”

갑작스레 들린 맞은편의 나직한 목소리에 미하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드래곤의 얼굴 주위로 금빛 마나 알갱이가 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루스 페니건의 두 눈동자에서 마나 알갱이들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책을 읽던 미하일의 두 눈이 그런 드래곤을 빤히 향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니 왕족이라 해도 인생에서 몇 번 직접 볼 수 없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하일을 바라보며 루스는 씨익 웃어 주었다. 어쨌든 또 소환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려 주었으니 칭찬해 줄 만했다.

그때였다.

잠시간 미하일의 곧은 눈과 마주 보던 루스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흐음.”

드래곤의 멋들어진 입술 사이로 짧은 고민이 지나갔다. 루스의 눈동자는 밖의 풍경이 빠르게 휙휙 지나가고 있는 마차의 창문에서 멈춘 채였다.

“그런데……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나?”

루스는 그 상태로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

무슨 말이지? 미하일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의 결 좋은 은발이 그에 따라 살짝 흔들렸다.

“이 마차를 호위하는 인원이 대체 몇 명인지 알고 있나?”

아카데미의 아드리안 헤더와 똑같이 생겼지만, 딱 하나 그와는 다르게 빛나는 금안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웃고는 있지만 입꼬리만 잔뜩 올린 모양이라 묘하게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아마…… 넷일 겁니다.”

미하일은 그런 드래곤의 고압적인 기세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자세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가 데려온 호위는 총 네 명이었다. 그들은 아마 이 마차를 중심으로 조금 간격을 벌려 말을 타고 달리고 있을 터였다.

“그래?”

미하일의 대답을 들은 드래곤은 무심한 얼굴로 한쪽 팔을 마차 밖으로 걸친 채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조금 문제가 있군.”

미하일은 드래곤이 꺼낸 이야기에 반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궁금해?”

드래곤은 마차의 창에 기댄 자신의 팔에 자신의 얼굴을 옆으로 괴었다.

“그게 소원이라면 대답을 해 주고.”

“……말을 마시죠.”

미하일은 루스의 김빠지는 대답에 고개를 획 돌렸다.

“아하, 많이 궁금하진 않구나.”

하하, 드래곤이 그의 금색 눈을 빛내며 슬쩍 웃었다.

비록 인간과 한 계약이지만 드래곤에게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소원의 주인인 왕자가 죽는다면 어쩔 수 없이 계약을 이행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순간 드래곤의 금안이 번뜩 빛났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마차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드래곤은 창에 기댔던 몸은 그대로 둔 채,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였다.

팍!

드래곤이 기대어 있던 창을 뚫고 화살이 들어왔다. 동시에 미하일이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러곤 팔에 힘을 세게 줘 드래곤을 마차의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이놈은 가끔씩 자신이 어떤 위대한 존재와 함께 하는지 잊는 것 같았다. 루스는 미하일의 팔 힘에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마차 바닥으로 움직여 주었다.

눈동자를 슬쩍 들어 확인해 보니 화살이 마차 벽에 절반 정도 박혀 있었다. 암살 시도인가? 왕족의 마차란 증거는 없을 텐데. 그냥 이 근방의 도적 떼일 수도.

“괜찮아?!”

미하일이 다급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 왔다. 이쪽은 아주 괜찮다만? 드래곤은 왕자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미하일은 순간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아드리안이라고 착각한 게 분명했다.

루스는 그 상태로 담담하게 제안을 시작했다. 드래곤은 이동 마법을 써서 이 마차 안에 도착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지금 이 마차를 네 호위 인원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둘러싸고 있거든.”

왕자는 드래곤의 말에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자신의 호위들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왕족 특유의 오만함을 아직도 고치지 못한 건지 둘 중 하나였다. 아, 아니면 내 말의 진위를 의심하는 것일 수도. 셋 중 뭐가 되었든 알 바는 아니지만.

“지금 당장 소원을 바꾼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들어주지. 어때?”

미하일은 ‘또 그딴 소리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됐습니다.”

그는 드래곤의 안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차를 이끌던 말 두 마리가 사납게 발길질을 해 댔다.

그에 맞추어 마차가 이리저리 무척 거세게 요동쳤다. 이렇게 있다간 밖의 괴한들에게 칼을 맞기 전에 마차의 천장에 부딪혀 죽을 지경이었다.

윽, 미하일은 흔들리는 마차에서 일어서려다 쓰러지려는 순간이었다. 탁, 드래곤이 왕자의 팔을 잡아채 그를 곧게 일으켜 세웠다. 곧고 흰 손가락들은 겉보기만으로는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센 악력을 냈다.

“지금 나가서 뭐 어쩌게.”

드래곤은 왕자의 목숨이 걱정되어 물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질문했다. 기사들을 호위로 데려왔으면 호위로 사용하는 것이 맞았다.

“나가서 죽지는 않을 테니 걱정마시죠.”

미하일은 짜증스럽게 내뱉으며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드래곤의 팔을 떨쳐 냈다. 죽을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닌데? 오히려 죽기라도 하면 소원을 들어줄 필요가 없어지니 기꺼워할 순 있겠지.

그러나 어차피 드래곤은 알고 있었다. 미하일은 지금 이 사소한 습격에 죽을 정도로 하찮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미하일과 드래곤이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화살을 쏜 놈을 찾았습니다!

-저쪽이다!

밖에서 기사들의 외침과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이쪽과 얼굴을 맞댄 모양이었다. 멀리서 위협하는 화살만 날리는 것이 아닌, 본격적인 습격이었다. 누군가 승객의 안전을 위해 마차와 말을 연결한 줄을 끊은 건지, 다행히 마차의 격한 움직임은 멎은 상태였다.

스륵, 미하일은 드래곤의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제가 잠시 자리 비우겠습니다.”

“그러든가.”

왕자가 드래곤에게 말했다. 드래곤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 소원을 바꾸는 변덕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거든.”

루스의 말에 미하일은 한 손에 검을 든 채로 마차의 문을 발로 냅다 걷어찼다.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문에다 괜히 화풀이를 하는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감정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드래곤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자세로 마차를 나서는 왕자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작게 중얼거리기만 해도 들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비록 뒷모습이지만 왕자가 귀한 입으로 욕을 지껄이는 것이 들렸다. 드래곤은 그 욕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작게 중얼거리만 해도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다고 바로 조금 전에 말했는데?

아무튼 그는 부드러운 마차의 소파에 몸을 편하게 다시 기댔다. 옆의 벽에 꽂혀있는 화살의 기세가 무척 흉흉했으나, 인간의 규격을 넘어선 생명체의 얼굴이 벽에 기대자 그의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소품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

루스는 마차에 편하게 앉아 있다가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입을 떼었다. 문을 연 것은 미하일이었다.

“그래, 다섯 모두 생포한 건가?”

미하일은 마차 안에서 마치 밖의 상황을 보고 있던 것처럼 말하는 드래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바로 옆 벽에 박혀 있는 화살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루스는 마차에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 두죠.”

미하일은 드래곤의 질문에 잠시간 고민하다가, 별일 아니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대답하며 다시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기사 하나를 손짓으로 불러오더니 마차 안의 화살을 가리켰다.

“저것도 회수해 가.”

“네.”

마차 안으로 몸을 잔뜩 구긴 채 들어온 호위 기사는 “안녕하십니까,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어 박힌 화살대를 휙 잘랐다. 그러자 그 밑을 받히고 있는 커다란 손바닥에 툭, 하고 화살촉만 깔끔하게 떨어졌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쇳조각이 빛났다. 평민들이 사냥에 쓸 만한 화살이 아닌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미하일.”

흠? 미하일은 갑자기 불린 자신의 이름에 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지를 들어 자신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다는 듯 왕자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루스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미하일은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드래곤의 손가락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을 헤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에게 옅게 웃어 주며 슥, 손가락으로 왕자의 흰 뺨을 훑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어 주었다. 붉은 피가 드래곤의 검지에 묻어 있었다.

미하일은 드래곤의 손가락이 지나간 부분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다시 닦았다. 드래곤이라 그런지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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