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루스와 미하일은 마크가 소개해 준 식당에 앉아 대강 요리 몇 개를 주문했다. 사례비를 받은 마크가 신나서 메뉴를 강력하게 추천해 준 덕에 다행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둘이 앉아 있는 곳은 고급 식당이었지만, 그래 봤자 작은 마을의 식당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옛 스타일을 고수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에 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주위의 테이블들에서 저들끼리 밝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미하일과 루스가 앉은 테이블은 식사가 나오는 동안에도 조용했다. 소원을 매개로 함께하고 있을 뿐인 사이라, 딱히 그들이 나눌 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루스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미하일의 얼굴을 힐끔 확인했다. 분명 힐데케 절벽에서 봤을 때까지만 해도 건강한 혈색이던 얼굴이 몇 달 사이 약간 상한 것 같았다. 충분한 수면과 식사를 못 했나 보지. 루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포크를 움직였다.
그때였다. 미하일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의 시신은 어떻게 찾을 계획이십니까?”
바로 앞에 놓인 음식에는 손도 거의 대지 않은 채였다. 솔직히 식당을 찾은 것은 온전히 인간인 미하일을 배려한 것이었는데, 정작 그는 겨우 몇 입 깨작거리더니 물 한 잔을 다 비운 것이 끝이었다.
루스는 식사를 하다말고 슥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계획?”
딱히 없는데.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포크를 휙휙 움직이다 탁,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우선은 그가 떨어진 곳에 가서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지?”
“걸리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미하일은 물잔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시신을 찾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지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뒤이어 말했다.
“사실 저는 아드리안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응?
루스는 미하일의 단호한 말에 몸을 굳혔다. 그러고는 멋들어진 눈썹을 슬쩍 찌푸린 채 미하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위대한 드래곤에게 이상한 소원을 빈 것 치고는 지나치게 당당해 보였다.
“정말로 죽었다면 지금쯤은 시신을 발견했겠죠. 아니면 그가 죽었다는 흔적이라도 나왔던가요. 그러나 이렇게 깔끔하게 사라지다니. 아드리안 혼자서는 절대로 벌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는 흔적을 지우거나 숨기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평민이었으니까요.”
생각보다 더 눈치가 빠르군.
루스는 최대한 빠르게 소원을 이뤄 준 셈 치고 떠날 심산이었다. 루스타바란 왕국과 더 이상은 엮이고 싶지 않은데,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드래곤을 자꾸 이들에게 데려와 놓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드리안은 오르디나스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 ‘운명’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었죠.”
내가 그러긴 했지. 루스는 미하일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듣고 있으니 더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미하일은 스스로도 이 말을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된다는 투로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도리어 그 반응에 더 궁금해진 루스가 미하일의 결론을 보챘다.
“아드리안이 사라지는 걸 도운 조력자나 단체가 있지 않을까합니다. 찾아보니 다른 신들은 부정하며 오직 우주의 질서로서 모든 것이 정해진 오르디나스만을 열렬히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아드리안과 같이 오르디나스를 연구하던 카일 드바이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었지만.”
“…….”
미하일의 헛소리에 조금 굳었던 몸이 단번에 확 식는 것이 느껴졌다.
루스는 깊은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미하일의 추측에 조금 어이가 없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루스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 꼭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테니, 그 전에 또다시 소환은 하지 않길 바라지.”
넌 모르겠지만, 소환당하는 거 기분 꽤 더럽거든.
루스는 미하일의 주머니를 눈짓했다. 그 주머니 안쪽에는 드래곤의 비늘이 반짝이고 있을 것이었다. 미하일은 뚱한 표정으로 맞은편의 드래곤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루스가 꺼낸 ‘돌아온다’라는 말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네 소원을 들어주기 전까진 이 몸은 비늘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
루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코를 찡그렸다. 미하일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마지못해 동의하는 미하일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루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루스는 손가락을 얼굴 앞으로 가져와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실내에서도 따스한 바람이 넘실거리다 한순간 금빛 알갱이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미하일 맞은편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빈 의자만 남게 되었다.
“어? 일행분께선 먼저 나가셨나요? 그러면 디저트는 한 분 것만 준비하면 될까요?”
식당의 서버가 트레이를 끌고 가다 테이블 위의 찻잔 두 개를 곁눈질하며 물어 왔다.
“아니, 디저트는 건너뛰겠어.”
미하일은 빈 의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자신의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그걸 어디에 놔뒀더라?”
드래곤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을 뒤로 휙휙 던졌다. 그가 있는 곳은 레어 한구석의 커다란 동굴 안이었다.
탁! 뎅구르르륵. 드래곤이 던진 값비싼 순금 팔찌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거친 동굴 바닥을 굴러갔다.
“물건이 너무 많아도 문제라니까.”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만큼 아무리 물건을 줄이려 해도 잠깐일 뿐, 특히나 희귀한 보석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드래곤의 창고는 반짝이는 것들의 천국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이 산더미 같은 창고에서 뭔가 찾으려면 한참 걸렸다. 오랜 시간 모아 온 덕에 드래곤의 뛰어난 기억력도 물건 찾기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분명 여기에 뒀는데, 흠. 루스는 금덩이들 사이에서 비슷한 색으로 빛나고 있는 자신의 금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아!”
반짝이는 금화 더미를 헤쳐 보니, 투박한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루스는 먼지를 털어 내듯 금화와 보석들을 옆으로 치우면서 그것을 들어 올렸다.
“여기 있었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어떤 작은 화분이었다. 그것은 새싹 한 줄기도 피어나지 않은 검은 흙만 담겨 있었다. 화분에는 아직 자라지 않은 만드라고라가 흙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는 화분을 들고 동굴을 빠르게 걸어 나갔다.
어두운 동굴을 나가자, 한적한 잔디밭과 평화로운 호수가 드래곤을 한껏 반겨 주었다. 따스한 햇볕이 푸른 잔디에 내리쬐고 있었고, 그 위를 뛰놀던 소동물들이 드래곤의 존재감을 느끼고는 번쩍 자그만 고개들을 들어 올렸다.
루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약초들과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펴 있는 화단 중 하나에 손짓하자, 흙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 자리에는 만드라고라를 심을 수 있을 만한 깊이의 구멍이 만들어졌다. 그는 그 구멍에 화분의 내용물을 모두 탈탈 쏟아붓고는 들어 올렸던 흙으로 그 구덩이를 막았다.
“나 참. 시체라…… 이렇게 까탈스런 소원은 처음이군.”
쯧, 드래곤은 혀를 짧게 차고는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단정한 손톱이었지만 마치 칼로 가르는 것처럼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핏줄기가 뚝, 뚝 천천히 팔의 곡면을 따라 움직였다. 루스는 팔을 슬쩍 움직여 그것의 방향을 화분으로 틀었다.
주르륵.
손목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작은 화분 위로 떨어졌다. 화단의 검은 흙 위로 핏방울이 그 위로 떨어질 때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완벽하게 스며들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루스는 그것을 전부 확인하고는 맨손으로 상처 위를 매만졌다. 그러자 방금까지 피를 흘리던 그의 손목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 마나로 만들어진 것은 어쭙잖은 마법사들에게 들통나니 어쩔 수 없지.”
미하일과 맺은 계약은 드래곤의 비늘이 매개된 용언이었다. 그것은 소환자뿐만 아니라 소원을 들어주는 드래곤 또한 납득 가능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마법으로 쉽게 뭔가를 만들 수는 있지만, 마나로 만들어진 것은 티가 날 것이다. 마나는 언제나 다시 그들의 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려 흩어지는 특성이 있으니 점점 형체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한다는 소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드래곤에게 이런 소원을 빈 인간은 아마 미하일이 유일할 것이었다.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드래곤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무 아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드래곤 곁으로 어느새 소동물들이 뛰어와 쏘옥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고민을 하느라 이렇게 심각한 것인지 궁금해진 탓이었다.
그런 동물들을 잔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드래곤은 레어에 왔던 것과 동일한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잘게 부서지는 밝은 금빛 마나 알갱이들이 드래곤의 형체를 둘러싸다가, 조금 뒤에 바람에 날아가듯 흩어졌다. 그러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흰 토끼들만 고개를 공중으로 쳐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존재했던 드래곤을 찾으려 코를 찡긋거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