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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18화 (118/184)

118화

둘은 마차를 타고 느긋하게 이동했다.

왕자 쪽에서 굳이 시간을 늘리고 싶다면야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인간과 다르게 드래곤에게 시간이란 무한한 재화였으며 동시에 그만큼 보잘것없는 것이니 말이다.

멋들어진 말 두 마리가 발굽으로 지면을 박차며 비싼 마차를 빠르게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속도라면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한참 걸릴 것 같았다. 벌써 지루해진 드래곤은 푹신한 쿠션에 천천히 등을 기댔다.

“……루스 페니건.”

“응?”

“이게 당신의 진짜 이름 아닙니까?”

드래곤은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스윽, 움직여 미하일에게 돌렸다. 제법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 단어였다. 카를로가 불렀던 이름을 그의 후손이 다시 불러 주다니. 유희를 몇 번이나 나오다 보니 이런 경우도 생기는군. 미하일은 알 턱이 없겠지만 드래곤에게는 무척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샐쭉 눈을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음, 네게 그 이름이 편하다면야, 그렇게 해.”

……또 이상한 대답.

미하일은 고개를 저으며 창가에 올린 팔꿈치에 고개를 가져다 댔다. 루스 페니건이 진짜 이름이면서 왜 모른 척하는 거지? 아까부터 드래곤이 저렇게 대답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미하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똑같이 생겼더라도 저 남자를 아드리안 헤더라고 불러 주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많았습니까?”

“이런 일이라 함은?”

조심스레 물어 오는 미하일의 질문에 루스가 곧바로 되물었다.

“당신을 소환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 말입니다.”

“이번이 처음이야. 말했잖아? 몇백, 몇천 년에 한 번이나 있을 만한 흔치 않을 기회라고.”

“……초대 국왕 카를로의 소원을 들어주신 일도 거기에 포함된 겁니까?”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였지.”

루스는 입을 비죽이며 대꾸했다. 사실 카를로의 소원을 들어준 것은 홧김에 저지른 것이었으므로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날 충동적으로 저지른 결정이 후손인 미하일의 운명에도 영향을 준 셈이었다.

“그렇다면 당신과 초대 국왕 사이의 염문설이…… 아니, 아닙니다.”

미하일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말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문득, 루스타바란 건국 신화에도 남아 있을 만큼 대단했던 사랑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뭐? 하하- 그런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었다고 말해 주지.”

푸훗, 왕자의 귀여운 질문에 루스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을 싫어하진 않지만…… 사랑에 빠져 중대한 결정을 내릴 만큼 좋아하지는 않아서.”

냉소가 잔뜩 섞인 말투였다.

왕자는 그런 드래곤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그를 숭배하는데, 정작 드래곤이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다니. 꽤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때였다.

마차의 앞에 앉은 마부가 말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뒤쪽 손님용 칸의 겉면에 작게 노크했다. 이곳에서 쉬어 간다는 뜻이었다.

“아하, 캐트러리령에서 쉬어 가는 거로군?”

루스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을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다가…… 급하게 드래곤의 얼굴을 살폈다.

“……눈동자 색을 바꾼 겁니까?”

드래곤의 금안이 어느새 칙칙한 갈색 눈동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자 완벽하게 아드리안 헤더와 똑같은 외양이 되었다. 미하일의 질문에 루스가 쾌활하게 대꾸했다.

“응. 금발 정도야 그러려니 해도, 거기에 금안까지 더해지면 인간들이 의심해.”

루스는 살풋 눈을 접어 웃었다. 묘한 웃음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아드리안과 겉모습은 같을지언정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왕자에게는 그 웃음이 묘하기만 했다.

마차를 마을 외곽에 두고, 두 남자는 천천히 마을 입구에 발을 디뎠다. 마차가 워낙 값이 나가 보이는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라 작은 마을에 타고 들어갔다간 마을 전체의 이목이 쏠릴 것이었다.

캐트러리령은 작은 마을답게 돌바닥 길이 시작되는 곳을 입구라고 부르는, 소박한 분위기였다. 입구를 표시하는 표지판도 마을의 장인이 손수 그린 것인지 세밀한 지도까지 붙어 있었다. 수도 근처의 신생 도시와는 다르게 마을 곳곳에 인간들의 손길이 느껴졌다. 오랜 역사가 깃든 마을이었다.

“음식점은 내가 골라도 될까?”

질문이었으나, 진심으로 미하일의 의향을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루스는 이미 마을의 입구를 넘어서 구불구불한 돌바닥 위를 걷고 있었다.

“그러시죠.”

어차피 왕자는 식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루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왕자에게 손짓했다.

“이 마을에 숨겨진 맛집이 있거든. 따라와.”

“네.”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드래곤의 뒤를 따랐다.

왕성의 전속 요리사가 자신 있게 내오는 코스 요리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우는 그였다. 이렇게 작은 마을의 음식점이 대단해 봤자 거기서 거기일 게 뻔했다. 그는 배가 고프기에 식사를 하는 것이었지, 맛을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세심한 성격은 아니었다.

마을 전체에 깔린 돌바닥의 우둘투둘한 표면이 발끝에서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아카데미와 왕성에서 잘 마감된 대리석 바닥만 걸어 다녔던 미하일은 발바닥의 느낌을 오롯이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왕자보다 앞서 가볍게 발을 옮기는 루스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미하일은 그 발걸음을 쳐다보면서 뒤따르다가, 루스가 멈추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기라고?

“여기야.”

드래곤이 자신 있게 왕자를 안내한 곳은 표지판도 없는 음식점이었다.

아니, 여기가 음식점이 맞는 건가? 미하일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민가처럼 보이는데.

“음식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미하일의 말에는 ‘당신 그렇게 자신 있어 하더니, 혹시 길 잃은 것 아니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음식점 맞아, 내 기억은 정확하다고.”

루스는 왕자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민가처럼 보이는 건물의 나무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그 기운찬 소리에, 원래 이 마을에선 이런 식으로 영업을 하는 건가? 라고 왕자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나무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것은 가슴께까지 닿는 키를 가진 소년이었다. 지금까지 낮잠을 자고 있었던지 짜증이 난 얼굴이라 미하일은 아이를 보자마자 드래곤이 실수한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뭐요.”

아이는 불청객 때문에 억지로 일어나야 했던 것이 불만이었던지, 퉁명스럽게 문을 두드린 잘생긴 남자에게 말했다.

“여기가 호라이야 음식점 아니니?”

루스가 상체를 굽혀 아이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금실처럼 넘실거리는 금발이 살짝 흔들리며 반짝였다.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본 것이 인간 같지 않은 남자의 외모라 아이는 멍하니 그 움직임을 바라보기만 했다. 루스는 그런 상황이 익숙한지라 “응?” 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아…….”

아이는 멍했던 정신을 차리고 불청객이 물어보았던 것을 되새겼다.

“여기가 호라이야 음식점…….”

남자가 말한 음식점의 이름은 아이도 아는 것이었다. 아이는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었었죠……? 아마 몇십 년 전에…… 잠깐만요.”

아이는 그제야 남자의 용건을 알아차리고 집 안으로 고개를 돌려 엄마를 불렀다. 그러자 집 안쪽에서 “왜? 누구셔?”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응? 몇십 년 전에……?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자신 있게 왕자를 데려온 음식점이 몇십 년 전에 있던 것이라니. 아이의 부름에 늙은 여자 한 명이 천천히 문으로 걸어 나왔다. 여자는 갑자기 자신의 집에 찾아온 불청객 두 명의 외관을 살피고는 무척 의아해했다. 그들은 작은 시골 마을까지 찾아올 만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눈동자에 가득 찬 의문을 알아챈 미하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추천할 만한 음식점으로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사례비를 드리죠.”

충격받은 듯한 얼굴의 드래곤을 보아하니 어쨌든 그가 안내하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해결하긴 힘들어 보였다.

“마크, 그럴 수 있겠어?”

“응!”

여자에게 마크라는 이름으로 불린 소년이 왕자가 꺼내 든 동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아이에게 몇 가지 음식점 이름을 말해 준 뒤, 고개를 들었다. 늙은 여자의 시선은 루스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고 있었다.

“혹시…….”

잠시간의 침묵 끝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요?”

늙은 여자가 의아한 투로 드래곤에게 말했다. 루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럴지도요.”

이곳은 향신료를 쓴 닭 요리를 전문점이었다.

드래곤은 수도 근처에 볼일이 있을 때면 이 마을의 호라이야 음식점을 즐겨 찾았다. 그렇게 여러 번 가게를 방문하다 보니 주방장과도 친해졌고, 가끔 그가 데려오는 딸과도 재미있는 장난도 쳤다.

몇십 년 전에.

호라이야 음식점 주인장의 딸이 저렇게 컸구나. 인간이 저렇게 자랄 동안 드래곤은 티끌 한 점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호라이야의 닭고기 로스트는 무척 맛있었는데. 드래곤은 아쉬워하며 마지못해 발을 뗐다.

아마 소년이 안내할 곳이 어디든 호라이야만큼의 음식을 파는 곳은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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