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13. 같이가용
이러한 일련의 사건 끝에 드래곤이 왕성의 접객실에 앉아 있게 된 것이었다.
드래곤은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맞은편에 앉은 미하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자의 얼굴에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기색이 만연했으나, 드래곤은 그것을 완벽히 간파할 수 있었다. 미하일은 아직도 아드리안 헤더의 시신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허벅지에 올려둔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미하일의 방문을 절도 있는 박자로 노크했다.
미하일은 맞은편에 앉은 드래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방문 밖까지 들리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라고 해.”
그러자 문 밖의 시종이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것이…….”
무슨 일이지? 미하일은 인상을 찡그리며 문을 노려보았다. 문밖의 시종이 작게 문을 다시 두드리며 말했다.
“왕자님, 하오나 지금-”
“그만하면 되었다. 문을 열어 주고 자리를 비키거라.”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왕비의 목소리였다. 왕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면서, 그 사이로 당황한 시종과 중년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미하일은 쳇,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왕궁에서는 막내라 그런지 아직도 애 취급이었다.
“며칠간 방 안에 있던 아들에게 잠깐이라도 산책을 나가라 명했는데…… 이렇게 금방 돌아오면 이 어미의 마음이 찢어지지 않겠니, 미하일.”
“……머리를 다 식혔으니 들어온 것 아니겠습니까.”
순간, 미하일은 왕비의 말에 대답하다가 뒤늦게 생각난 드래곤의 존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드리안 헤더와 완벽히 똑같이 생긴 드래곤은 그곳에 없었다. 응? 어디로 간 거지? 미하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차를 마시고 있었구나.”
“네.”
머리 식힐 겸해서요.
미하일은 여전히 자신의 방을 훑으며 드래곤을 찾으려 열심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혼자서 두 잔이나 사용하면서?”
“…….”
아, 드래곤의 찻잔이 남아 있었지.
테이블 위에는 찻잔 두 개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미하일은 입을 꾹 다물고는 그것들을 노려보았다. 두 잔 다 따뜻한 김이 오르고 있는 채였다. 이에 아르민 왕비는 곤란하다는 듯 관자놀이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미하일.”
왕비는 한 나라의 고귀한 존재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아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때로는 그저 놓아주는 법도 알아야 한단다. 알잖니.”
죽은 자를 위한 찻잔이라니.
미하일이 이러는 것도 아드리안 헤더와 관련 있는 일임이 분명했다. 분명히 아들이 아카데미에 가서 친구를 사귀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친구가 죽었다니, 그것도 바로 앞에서…… 그러니 충격이 클 것이라는 데 왕비도 백분 동감했다.
하지만 이미 몇 달 전 죽은 사람을 추억하며 방 안에 처박혀 슬퍼하는 아들을 지켜보는 왕비의 심정은 무척이나 속상했다. 무엇을 하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낼 수도 없을 텐데 이 아이는 왜 아직 헤어나지 못하는 걸까.
“……네, 알고 있습니다. 차차 나아지고 있는 것 같으니 큰 염려 않으셔도 됩니다.”
미하일은 시선을 내리깐 채로 왕비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제가 찾아뵐 테니 오늘은 이만 하시죠.”
“……그럼 기다리마.”
“……네. 좋은 하루 되시길.”
그러자 왕비는 잠시 서 있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사를 남기고 방을 떠났다.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던 미하일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께는 죄송한 일이나, 드래곤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려 봤자 좋을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드래곤을 소환해 아드리안 헤더의 시신을 찾아달라는 소원을 빌었다는 것을 알았다간 저 걱정이 한층 더 깊어질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더 애틋한 모자 사이군.”
드래곤의 목소리가 미하일의 번뜩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미하일이 고개를 돌리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응접실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 계셨습니까?”
“나? 계속 여기에 앉아 있었지.”
그는 멋들어진 얼굴에 슬쩍 미소를 띤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조금 전 대화를 다 듣고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단 말이지? 불만스레 드래곤을 바라보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왕비의 오해는 아드리안의 시신을 찾기만 하면 곧바로 해소될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도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서 해방될 거니까.
미하일은 우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드래곤님이라 부를 순 없잖습니까.”
“그냥 아드리안 헤더라고 불러. 어차피 똑같이 생겼다며.”
솔직히 드래곤은 이 상황의 모든 것이 귀찮았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계획했던 유희도 아니었고, 상정했던 변수 내의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저번 유희의 부스러기 같은 연장선이었으므로 그때 불렸던 이름을 사용하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미하일은 그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입을 작게 벌렸다. 허,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대답이었다.
“……그 이름 말고 당신의 진짜 이름을 묻는 겁니다.”
왕자는 예의를 차리며 차갑게 다시 질문했다. 미하일은 이미 드래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루스 페니건, 루스타바란 왕국의 옛 기록에 간간히 등장하는 남자의 이름.
아드리안과 똑같이 생겼지만 저 남자는 드래곤이므로 둘 사이에 선을 그어야 했다. 미하일에게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미하일의 목소리에는 왜 일부러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느냐는 추궁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내 진짜 이름?”
드래곤은 왕자의 표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인간들은 아주 복잡한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드래곤의 그것보다 발전한 것인지, 아니면 진화가 덜 된 것인지는 드래곤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이름에도…… 진품과 가품이 있나 봐?”
드래곤은 흥미롭다는 듯이 왕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까지는 이름을 묻는 질문에 적당한 이름을 대기만 해도 인간들은 그것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모두가 그 이름으로 불러 주었다. 그들은 한 번도 드래곤에게 그의 ‘진짜’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됐습니다. 제가 알아서 적당한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는 뜻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왕자는 드래곤의 질문을 비꼬는 것이라 여겼는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어린것이 여간 성격이 괴팍한 게 아니군. 드래곤은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왕자가 도대체 자신을 뭐라고 부를지 무척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글쎄, 이 몸에 어울리는 ‘적당한’ 이름은 많지 않을 텐데.”
“…….”
미하일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드래곤을 노려보더니, 화제를 빠르게 전환했다.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지금 출발 준비를 하라 이르겠습니다.”
어차피 드래곤에게 볼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미하일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단어를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힐데케산으로.”
왕자가 눈을 내리깔고 그들의 목적지를 다시 한번 짚었다.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미하일에게 말했다.
“그런데 준비? 무슨 준비지?”
“왕궁에서 헬데케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으니 마차나 말 같은 채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미하일은 뭘 별것을 묻느냐는 듯이 대꾸했다.
드래곤은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어깨를 넓게 폈다. 아카데미의 아드리안 헤더는 못 했던 것을 보여 주지-라고 생각하면서. 거만한 표정이었으나, 겨우 이 정도의 오만함이 그의 능력을 바래게 만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드래곤이 가진 무한한 능력을 굳건히 뒷받침할 뿐이었다.
“이 몸이 친히 순간 이동 마법을-.”
“순간 이동 마법은 필요 없습니다.”
미하일이 차갑게 일갈했다.
대륙에서 마나가 줄어들고, 마법사가 귀해진 지금에 와서는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는 없었다. 그래서 왕족인 미하일조차도 순간 이동 마법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왕자는 순간 이동 마법을 부탁할 만큼 눈앞의 드래곤을 신뢰할 수 없었다. 순간 이동 마법은 사람을 출발 지점에서 사라지게 만든 후, 도착 지점에 나타나도록 만들어야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동하는 사람은 시전자에게 자신의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좋을 대로.”
드래곤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차피 시간을 끌어야 하니 마차로 이동하는 것이 더 좋은 걸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마법까지 써 가며 왕자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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