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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16화 (116/184)

116화

드래곤이 입은 옷이 따뜻한 바람에 나부끼며 흔들렸다. 금빛 아지랑이가 그의 몸을 감싸며 흐르듯이 요동쳤다.

푸스스하게 떠올랐던 금발이 천천히 가라앉고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방 안을 훑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레어는 여전히 따뜻하고 포근했다. 언제나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마법을 걸어 둔 탓도 있겠으나, 어쨌든 온전히 ‘나만의 장소’라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드래곤에게도 의미가 남다른 것이다.

드래곤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대강 정리하며,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유희를 다녀오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아드리안 헤더가 아니었다. 다리에 어설프게 감아 놓은 붕대를 천천히 풀어 내렸다. 그곳에는 흉터 하나 없이 깔끔한 피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절벽에 매달리느라 더러워진 옷도 드래곤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언제 그랬냐는 듯 새것처럼 바뀌었다.

바사미엘로 출발하기 전에 마셨던 커피 잔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잔에서는 마치 방금 커피를 내린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잔을 들어 올려 후룩, 가볍게 마셨다. 여전히 마시기 딱 알맞은 온도였다.

컹!

그때,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제집인 양 문을 열어젖히고 재빠르게 들어왔다. 늑대는 토끼처럼 껑충껑충 커다랗게 뛰어오르며 꼬리를 쉴 새 없이 흔들어댔다.

“오, 잘 지냈니?”

드래곤은 옅게 미소 지으며 늑대의 이마를 문질러 주었다.

“그때 다쳤던 곳은 다 나았구나. 잘했어.”

회색빛이 도는 늑대의 털은 쓰다듬기 딱 좋을 정도로 푹식푹신했다. 인간들의 덫에 걸려 끙끙거리던 것을 구해 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상처가 있었던 자리에는 이미 부드러운 털이 올라와 있었다. 늑대를 바라보는 드래곤의 금빛 눈동자는 따스한 햇살처럼 밝게 빛났다.

***

미하일은 교장실 한가운데에 서서 데클레어 교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교장실 밖은 학기 중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학생을 추모하기 위한 장례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오갔지만, 다들 청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정성스레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아드리안과 가장 가까웠던 미하일은 그런 분위기와는 정반대였다.

“스승님, 장례식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아카데미에선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교장실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지? 내가 알기론 추모 연설을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말이야.”

그녀는 그런 미하일은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미하일은 입술을 잠깐 짓씹고는 으르렁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직은…… 아직은 장례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미하일의 말에 교장의 눈초리가 매섭게 바뀌었다.

“그래? 아직은…… 아직은 아니라고? 그럼 언제 장례를 치르겠단 거지?”

“아무튼, 지금은 아닙니다.”

교장은 테이블에서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여 미하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두 주먹을 꾸욱 쥔 채 잘게 떨고 있었다. 교장은 알고 있었다. 저것은 견뎌 내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는 것이었다. 미하일은 사건이 벌어진 이후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수색대에게 상황을 알려 주고, 며칠간 이어진 탐사 작업도 빠짐없이 모두 참여했다.

아드리안이 그 절벽에서 떨어진 후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자학 중이라니. 교장은 여전히 미하일과 눈을 마주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미하일.”

“…….”

“그러면 도대체 언제 장례를 치를 건지 물었는데, 왜 대답이 없어?”

“…….”

그러나 미하일은 다시 한 번 침묵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가로젓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교장은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다 한숨을 후, 하고 내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절벽의 높이는 어땠지?”

“…….”

미하일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런 미하일 대신 바로 옆의 타릭 교수가 대답했다.

“……떨어지면 즉사할 정도입니다.”

미하일의 눈동자가 힐끔, 자기 대신 대답하고 있는 타릭 교수에게 향했다.

교수의 대답에 교장이 곧장 새로운 질문을 던져 왔다.

“혹시 수색대가 그의 시신을 찾았나?”

“아니요.”

이미 교장실에 있는 세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미하일은 담담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교장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이건 왜 물어보는 거지? 수색대가 가지고 온 보고서를 함께 읽었다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그 근방의 수색은?”

“이미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며칠 동안 찾았지?”

“일주일하고도 며칠 더 되었습니다.”

타릭은 보고서를 힐끔 확인하고 대답했다. 그도 교장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워낙 오랜 시간 그녀의 밑에서 일해 왔던 타릭은 순순히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혹시 실종자 신고는 없었고?”

“네. 없었습니다.”

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타릭이 이야기해 준 것은 그녀가 보고서로 확인했던 정보와 완벽히 동일했다. 그녀는 스윽 테이블 바로 앞에 서 있는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런데?”

교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미하일에게 질문했다.

“……예?”

그에 오히려 타릭 교수가 자신에게 질문한 줄 알고 되물었으나, 교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무슨 근거로 ‘아직은’이라는 거지? 아직 아드리안 헤더가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낼 수 있는 근거가 우리의 대화 중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데, 넌 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는 말이야.”

미하일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교장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미하일의 가슴속 깊이 콕콕 박혀 왔다.

“하지만!”

미하일이 주먹을 쥔 채 소리쳤다.

“아직 시신을 못 찾았지 않습니까!”

“지금껏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실종 사건이 얼마나 많았는지,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알려 줘야 하는 거냐?”

차가운 말투와 냉정한 판단이야말로 지금의 미하일에게 필요한 진단이었다. 그는 친한 친구가 눈앞에서 죽었는데도, 여태 눈물 한 번 흘리지 않고 수색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왕성의 기사들까지 동원해서 힐데케산을 샅샅이 뒤졌다. 지난 며칠 동안은 잠도 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저 상태로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눈 주변이 시큰해지면서 울컥 치밀어 오른 뜨거운 감각이 미하일의 감정을 일깨웠다. 그는 최대한 참아 보려는 듯했지만, 슬픔이 밖으로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주륵, 미하일의 오른쪽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하일의 눈물에 그를 차갑게 몰아붙이던 교장이 주춤 몸을 굳혔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냉정하게 살피는 것을 원하긴 했지만 정작 저렇게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제자의 모습을 보자 죄책감이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아드리안은 마법도 못 쓰고, 다리도 다친 상태였어요. 만약에 살아 있다면……!”

“만약에.”

데클레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격앙된 미하일의 외침을 조심스레 멈추었다.

“만약에 그가 살아 있다면 반겨 주면 될 일이야. 수색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잖아.”

“…….”

뚝, 미하일의 맑은 눈물이 교장실 바닥에 떨어졌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미하일은 나직하게 “아무튼 오늘 추모회는 취소하세요.”라고 속삭이며 크게 몸을 돌렸다.

쾅!

교장실 문이 세게 닫혔다.

미하일이 교장실을 나서자마자, 테이블 옆에서 곧게 서 있던 타릭은 굵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곤란한 듯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왕자님이 지금 얼마나 슬플지…… 짐작도 못 하겠군요. 그렇게 친한 친구는 처음이었을 텐데.”

“극복할 거야. 누구나 그렇듯이.”

담담하게 말하는 교장을 향해 타릭이 너무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하시네요. 왕자님이 어렸을 때부터 거의 키우다시피 하셨던 분 아닙니까.”

“……그거랑은 상관없잖아.”

교장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며 중얼거렸다. 타릭은 그런 교장을 재차 떠보았다.

“이럴 때에만 유독 너무 차갑게 구십니다.”

“타릭.”

“네?”

불만스럽게 교장을 탓하던 타릭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턱을 손목으로 괸 채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때에‘만’이 아니야. 미하일은 이제 엄연한 기사다.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라 가르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죽음을 인정해야한다는 것 정도는 배워야지.”

교장과 타릭은 둘 다 이미 죽음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기사였다. 검술이 노련해지고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 모두 그들이 노련한 기사가 되기 위해 감내해 온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혹한 처사였다.

타릭은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오랜 상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교장은 그런 타릭의 시선을 눈치채곤 테이블 위의 찻잔을 가볍게 기울여 그 안을 확인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가 식었군. 한 잔 더 부탁해도 될까?”

“……네.”

타릭은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의 차가 담겨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교장실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추모회는 잠시 미뤄 둬. 어차피 추모 연설도 준비가 안 된 것 같으니 말이야.”

교장의 결정에 타릭이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는 한 팔을 책상에 댄 채 턱을 괴고 있었다.

“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타릭은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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