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아드리안은 호위 기사들의 기척을 살폈다. 그들은 카일을 따라 정상까지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안전한 중턱에서 대기할 아드리안과 미하일보다는 험준한 꼭대기로 올라가는 카일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마차 안에서 기다릴 거야?”
미하일은 카일 쪽에 시선을 주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아드리안은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양옆으로 천천히 저었다.
“아니, 마차는 하루 종일 타고 왔잖아. 지겨워. 여기라도 둘러볼래.”
“그러든가.”
마차가 지겹긴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시원한 바람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숲을 거닐기로 했다. 숲속을 산책을 하면서 나무 그루터기를 찾을 때마다, 미하일은 그곳을 눈짓하며 질문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두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널찍한 바위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좀 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 괜찮아.”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다리를 다친 사람을 배려해 주는 거겠지만, 필요 없는 친절이었다. 울창한 숲속에서 가끔씩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두 청년의 머리칼을 간질였고, 새들이 저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니까 어젯밤 소동이 완전히 꿈같네.”
아드리안이 옅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푸른 나뭇잎과 화창한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러게.”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간 바람에 살랑이는 아드리안의 머리카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있을까.”
화산의 검은 마나부터 검투 대회까지,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지.
미하일은 무척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 진심은 밖의 심드렁한 표정과 정확히 반대였다. 미하일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보다 지금이 훨씬 다음 학기가 기대되었다. 아드리안과 함께라면 그 누구보다 재미있는 학기를 보낼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드리안에게 보이지 않는 쪽의 주먹을 꾸욱 쥐었다. 앞으로 삼 년이 남았다. 졸업 전에는 꼭 다시 한 번 아드리안에게 마음을 표현하리라. 그땐 아드리안도 다른 답을 주지 않을까.
“내년이라…….”
흠, 아드리안은 미하일이 했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건 사고라는 단어에 아드리안은 동의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약초학을 배울 생각만 했던 것 치고 생각보다 여러 일들에 끼어들었다. 심지어 정작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기도 전에 유희를 접게 되었고 말이다.
자신이 내년에도 바사미엘에 있든 말든 미하일의 운명에는 별 지장도 없을 것이다. 미하일은 애초부터 용사가 되기 위해 태어났고, 내년에 어떤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든 결국 그 운명에 순응할 것이다.
“항상 평화롭기만 하면 재미없잖아.”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은 온전히 운명을 짊어질 자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아드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아마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그의 미래의 곳곳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이겨 내길, 그 안에서도 작은 재미를 찾아내길 바라면서 드래곤은 눈앞의 어린 인간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아드리안은 나무 그루터기에 자라난 풀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척을 했다. 대륙 전반에 걸쳐 서식하는 평범한 종이었으나 어차피 미하일에게 이것은 희귀한 약초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풀들을 뒤적여야겠어?”
아까부터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미하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드리안은 미하일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려 코를 찡그렸다. 지독한 자식, 그만 좀 따라다녀라. 그는 호시탐탐 미하일과 멀어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에 뒤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미하일이 “왜?”라고 말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약을 마차에 두고 내렸어. 아까 먹었어야 했는데.”
“뭐? 그렇게 중요한 걸 까먹으면 어떡해.”
“몇 시간 정도 늦는다고 안 죽어.”
다급한 미하일과는 다르게 아드리안은 풀숲에 앉은 채로 빤히 미하일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가져다 달라고?”
미하일은 그 눈빛에서 아드리안이 원하는 것을 읽어 냈다.
“응. 그래 주면 고맙고.”
아드리안은 이제야 알아챘냐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왕족에게 이런 잔신부름을 시킬 배짱이 있는 왕국의 국민은 아드리안 외에는 아마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저런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러나 이것조차 아드리안다웠다.
미하일은 격식 따위는 다 집어치운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저 다리로 마차까지 걸어가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그래. 넌 여기서 기다려.”
“아, 그리고.”
미하일이 등을 돌려 걸을 때였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앉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차 한 잔도 부탁해. 약이 많이 쓰거든.”
“……알았어.”
차까지 가져오려면 그래도 약만 가져오는 것보단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드리안은 밝게 씨익 웃으며 미하일을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그러고는 미하일에게 감사 인사를 먼저 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에는 이런 인사를 할 겨를이 없을 것이었으므로.
***
응? 어디 간 거지? 마차에 갔다가 돌아온 미하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아드리안이 앉았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미하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드리안의 목소리에 미하일이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 거기 서서 뭐 해?”
미하일은 손에 든 약통과 찻잔을 천천히 바위 위에 올려 두면서 말했다. 뭔가 이상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느낌. 그가 아드리안과 함께 지내며 가끔씩 느꼈던 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 끝에 서 있는 아드리안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완전히 들어왔다.
다친 다리로 저기까지 언제 갔지? 미하일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절벽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아드리안을 향해 한 발짝 걸어갔다.
“미하일.”
“……약 먹어야지. 이리 와, 아드리안.”
미하일은 가져온 약통을 손짓하며 다시 한 발짝 아드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양옆으로 저을 뿐이었다.
그리도 다시 한 번 더 미하일이 한 발짝 더 앞으로 걸어가자…… 턱! 아드리안의 다친 쪽 다리가 딛고 있는 지반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그에 균형이 흐트러졌는지 아드리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 이어 아드리안의 몸이 천천히 뒤로 쓰러지는 것이 미하일의 눈동자에 맺혔다. 미하일은 스스로 자신이 달려가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할 속도로 절벽 끝까지 달려갔다.
“아드리안!”
그는 절벽 끝까지 달려가 무릎을 꿇고는 빠르게 그 아래를 확인했다. 다행히 절벽의 튀어나온 틈을 붙잡고 있는 흰 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눈가를 찡그리며 그 틈을 붙잡고 매달려 있었다. 미하일은 급하게 숨을 내쉬며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미하일은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 쓰지도 않고 절벽 끝에 몸을 눕혔다. 그러고는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아드리안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팔을 내밀었다.
“……다행, 다행이다. 괜찮아, 내가 잡아 줄게.”
잘게 떨리는 듯 흔들리는 미하일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미하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선 맑은 눈동자로 미하일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저런 얼굴을 할 줄도 아는구나. 아드리안은 틈을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힐끔 확인했다. 다소 잔인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이 유희의 끝을 증명해 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적당한 실종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미하일은 최대한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으나 조금, 아주 조금 멀었다. 그는 손가락을 좀 더 뻗어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아드리안에게 닿지 않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가락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손 잡아!”
윽, 미하일은 식은땀을 흘리며 팔을 최대한 밑으로 더 내렸다. 간당간당한 거리에 손가락을 움직여 아드리안의 손을 낚아채려했으나 닿지 않았다.
“잡으라고!”
아드리안의 결 좋은 금발 머리카락이 휙- 바람에 휘날렸다. 그 바람에 아드리안의 표정이 드러났다. 그는 미하일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미하일은 그 표정에 온몸의 피가 단번에 식는 것을 느꼈다.
“……아드리안?”
그리고.
아드리안은 절벽의 끝을 붙잡고 있던 두 손을 가볍게 놓았다.
울창한 숲속, 나무들 사이로 누군가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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