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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14화 (114/184)

114화

카일은 흥, 하고 팔짱을 꼈다. 그는 아드리안과 미하일이 아닌 벽을 향해 고개를 획,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왜, 변명해 보려고? 해 보든가. 뭐, 그래 봤자 달라질 건 없겠지만.”

퉁명스런 말투였지만, 아드리안은 카일의 말에서 약간의 희망을 엿봤다. 그는 지금 여기서 잘만 말하면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먼저 숙소를 나간 겁니다.”

카일이 준 기회를 이용해 아드리안이 재빨리 변명을 시작했다. 있었던 일에 대해 사실대로 말한다면 솔직히 카일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게시판에서 읽은 메모가 말한 것이 검은 마나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심지어 미하일에게 마물을 어떻게 해치울지도 알려 주었다. 이후 위기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미하일을 눈짓했다.

“그런데 미하일이 위험하다며 저를 따라 나왔고요.”

“그때 바로 나한테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 없고?”

“네. 왜냐하면 제가 미하일에게는 그냥 산책을 나가는 거라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아드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미하일이 잘못한 게 있다면 딱 하나, 날 걱정해 준 것 정도지, 아마?

“산책하는 척하다가 숲에 들어간 거예요. 거기서 검은 마나를 확인하려다 마물을 만났고, 미하일이 그 마물을 처리한 거죠. 결국에는 다 잘 해결되었잖아요.”

아드리안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자, 카일이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의  ‘결국에는 다 잘 해결되었다’라는 말에서 이 대책 없는 후배들을 어떻게 혼내 줄지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변명 끝?”

“……네.”

이걸로는 부족한가? 아드리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바로 옆에서 그런 아드리안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 살짝 한숨을 쉬었다.

“장난해? 그게 무슨 변명이야. 그냥 사실을 나열한 것뿐이잖아.”

“제가 설명을 이어서 해도 될까요.”

카일이 짜증을 내며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여태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 오늘 마물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그게 언제 타마힐드 마을을 덮칠지 몰랐으니까.”

미하일은 어두운 숲속에서 만났던 거대한 생명체를 떠올렸다. 검기를 씌우지 않고 베자,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곧바로 상처를 회복하고는 재차  달려들었다. 만약, 숲에 들어간 사람이 평범한 마을 주민이었다면 저항 한 번 못 하고 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도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뭐라도 해야 했어요.”

“……성공 못 했다면 어쩔 뻔했어. 미하일, 아무리 그래도 넌 아직 소드 마스터가 아니잖아. 자유자재로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실력도 아닌데, 겁도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건 큰 실수야.”

“지금 생각해 보니 더 좋은 해결 방법이 있는 것도 같은데, 그땐 너무 당황해서…….”

미하일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아드리안을 곁눈질했다. 응? 조금 전 자신이 이야기할 때와는 다르게 카일이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미하일의 이야기를 경청하자, 아드리안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려고 눈을 찌푸렸다.

미하일은 풀 죽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선배의 말처럼 큰 실수는 맞는 것 같네요. 결국 아드리안이 많이 다치기도 했고. 제 잘못이 커요.”

“……그래, 알고 있으면 됐어.”

카일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미하일이 먼저 숙이고 들어와 반성하는 모습에 그는 큰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둘의 결정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겨우 두 명이서 밤의 숲에 들어간 것은 독단적이었지만, 어쨌든 마을 사람들을 위한 마음에서 마물과 함께 용감하게 맞서 싸우기까지 한 거니까.

하아, 카일은 짧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한숨의 의미는 뭐지? 그의 반응을 유심히 바라보던 미하일과 아드리안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카일은 바로 뒤이어서 말을 이었다.

“알았어, 그대로 내일 아침 일곱 시에 로비로 나와. 아드리안을 답사에서 빼진 않을게.”

아드리안은 카일의 이야기에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 상태로 고개를 돌려 미하일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 미하일 덕분인줄 알아. 둘 중 한 명이라도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니까 봐주는 거야. 알겠어?”

“네!”

아드리안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친 것도 이쪽이고, 혼나는 것도 이쪽만 혼난 것 같지만…… 어쨌든 힐데케 절벽으로 가는 것이 취소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이제 방에 들어가서 자, 또다시 멋대로 돌아다니면 그땐 바로 끝이야.”

카일의 마지막 잔소리에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네.”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카일은 허 참, 하고 허탈하게 웃더니 말했다.

“대답만 잘하지 아주.”

그제야 로비의 괘종시계가 카일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벌써 새벽 두 시란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멈추더니 아드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방에 들어갈 거면 부축해 줄까?”

음, 아드리안은 소파에서 일어나 붕대를 감은 발목을 움직여 보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하게도 아직 상처가 다 회복되지 않아 움직이면 아팠다. 그런 아드리안의 팔을 누군가 덥석 잡아왔다. 미하일이었다.

“제가 부축할게요.”

그는 무심하게 이야기하더니 그런 목소리와는 다르게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팔을 뻗어 아드리안의 어깨를 품에 감싸 안았다. 아드리안이 미하일의 표정을 힐끔 확인했으나 별다른 숨은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마자 아드리안은 마음 놓고 부상을 입은 다리에서 힘을 풀었다. 미하일의 어깨에 살짝 기대서 걸으니 생각보다 걸을 만했다.

카일은 그런 미하일과 아드리안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내가 엄한 데 끼어들려고 한 거냐?”라고 말하고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엄한 데라니요?”

아드리안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카일의 등에 대고 물었지만, 그는 웃으며 팔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많이 아파?”

미하일은 그런 카일의 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품으로 기대어 오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프지.”

아드리안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는 걸어가며 자신의 발목에 감겨 있는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뭐, 그래도 곧…….”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드리안의 혼잣말에 미하일은 고개를 기울였지만, 어깨에 기대 있는 아드리안은 뒤이어 생각에 잠긴 듯 조용했다.

***

다행히 아드리안이 고대하고 있는 절벽 답사는 계속되었다.

카일이 몇 번이나 강조한 ‘아침 일곱 시’에 맞춰 방문을 열자, 미하일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아드리안의 발목 쪽을 힐끔 바라보곤,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리는 어때?”

아드리안은 붕대를 감은 발목을 들어 공중에서 살짝 흔들어 보여 주었다.

“뭐, 그럭저럭 걸을 만해.”

당연했다. 새벽에 잠들기 전, 붕대 안의 상처를 마법으로 치료해 뒀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강 다시 붕대를 감아 놓았으므로 눈으로 보기엔 똑같았다. 이 상태로 아주 가끔씩 아픈 척을 해 주면 될 것이다.

“그럼 다행이고.”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발목에서 느리게 시선을 뗐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도착한 로비에서는 이미 카일과 숙소의 직원들이 마차에 짐을 싣느라 분주했다. 이미 떠날 준비가 거의 끝난 것 처럼 보였다.

카일은 제시간에 로비로 나온 후배들에게 잘했다는 듯 씨-익 웃어 주었다. 목적지까지는 아침 일찍 출발해서 거의 하루의 절반을 마차를 타야 했으니 갈 길이 멀었다.

***

몇 시간 만에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우뚝 멈췄다.

그곳은 힐데케 산 중턱보다 조금 더 높은 지점이었다. 최대한 마차로 올라올 수 있는 곳까지는 왔으나, 이 이상은 마차를 이용하기 힘들었다.

카일은 마차의 짐칸에서 탐사 장비를 이것저것 꺼내더니 꼭 가지고 올라가야 하는 것들을 골라냈다. 그에 아드리안도 자신의 짐을 달라며 팔을 내밀자, 카일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힐데케 산 정상에는 나 혼자 다녀올 거야. 지금 네 다리로는 무리니까 넌 미하일과 여기서 기다려.”

여기서요?

아드리안은 카일의 이야기에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예상했던 것 만큼 높지는 않았지만…… 그의 계획에 높이는 큰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아드리안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연구에 열정적인 것 처럼 보였는데, 끝까지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도 전혀 실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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