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후우우-
미하일은 빠르게 요동치고 있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숨을 나직하게 뱉었다. 그와 동시에 몇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손에 잡고 있는 검에 집중했다.
아드리안은 도와주겠다며 미하일에게 검기를 피우려면 얼마나 시간을 끌어야 하는지 물었다. 미하일은 오 분 정도면 되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드리안은 “알았어, 십 분 정도 시간을 끌어 볼게.”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풀숲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오더니, 미하일에게 불을 피우는 마법을 써 달라고 해서 시간끌기용 횃불을 만들었다.
***
뒤에서 나무 한 그루가 또 땅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장애물이 많은 숲을 마치 제 집이라도 되는 양 매끄럽게 달리는 아드리안의 뒤로 나무가 보이는 족족 몸 전체로 부딪쳐 부서트리면서 마물이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 아드리안이 마법을 썼다간, 마나를 끌어 모으느라 한층 예민해진 미하일이 마나의 흐름이 변한 것을 알아챌 가능성이 높았다. 주변의 마나 방향이 전부 이쪽으로 향할 게 눈에 훤했다.
아드리안이 든 횃불을 따라 마물이 숲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며 빠르게 달렸다.
촉수 하나가 앞의 먹잇감의 발목을 낚아채려는 듯 쇄도해 왔다. 아드리안은 가까스로 피하기는 했지만, 날카로운 끝에 다리 바깥쪽이 쓸리고 말았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촉수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뜨거운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칫, 아드리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상태에서는 마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마물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가 눈앞에 보이는 굵은 나무뿌리 하나를 훌쩍 뛰어넘는 참이었다.
땅에 발바닥이 닿기도 전에 검은 촉수 하나가 날아와 아드리안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아드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촉수에 가져다 댔다.
찢어질 듯한 괴성을 내며 마물이 빠르게 촉수를 거둬들였다. 그것은 다행이었으나 아드리안의 몸은 바닥으로 처박히며 크게 굴렀다. 발목 한쪽이 뿌리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
으득,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아드리안은 신음을 삼켰다. 아드리안의 턱이 허공으로 들리며 잘게 떨렸다. 비명을 참기 위해서는 입술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쉬고 있을 틈은 없었다. 아드리안은 잠시 멈췄던 몸을 간신히 일으켜 다시 뛰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피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마물이 달려오고 있는 기척이 났으므로.
미하일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잠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불안해졌다. 그는 입술을 세게 문 채로 검기를 끌어모으는 데 다시 한 번 집중하려다가, 풀과 나무가 스치는 소리만 들리는 것에 의문을 느끼곤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괜찮아?”
순간적으로 미하일의 마나 흐름이 끊긴 것을 느낀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넌 검기에나 집중해!”
여기 말고 이 멍청아! 아드리안이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외쳤다. 발목 쪽에서 점점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넘어질듯 말듯 비틀거리면서 나무들 사이를 달렸다. 숲 중앙에서 검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미하일을 확인한 뒤에야 아드리안은 씨익 웃었다.
마나 훈련을 도와준 것이 영 헛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탁! 탁! 탁!
마물을 여전히 아드리안을 바짝 쫒고 있었으므로 그는 미하일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을 때, 방향을 슬쩍 틀었다.
“지금 간다! 준비해!”
아드리안이 소리치자, 미하일이 단번에 눈을 번뜩 떴다. 마치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것 같았다. 그의 손안에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에서 흰 아우라가 스물스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짧은 새에 성공하다니, 용사의 싹이 대단하긴 대단했다. 뭐,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단 몇십 초 남짓이겠지만.
미하일은 숲에서 비틀거리며 나온 아드리안을 바라보고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숲에서 구르기라도 한 건지 온통 나뭇잎이 붙어 있었고,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미하일은 그러나 눈을 한 번 질끈 감아 마음속의 혼란을 몰아내었다. 아드리안이 저렇게까지 도와주었는데 이쪽에서 실수한다면 볼 낯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하일은 이내 억지로라도 평정심을 가다듬으며 아드리안의 뒤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드리안을 뒤따라 나무 수십 그루가 차례로 무너지고 있었다.
온다!
미하일은 검을 위로 살짝 들어 올려 마물을 환영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며 검기를 피워 낸 검을 유심히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용암 동굴에서 이렇게 검기를 피웠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
키이이이익—!
미하일은 나무 한 그루를 머리로 콰직! 하고 부서트리며 모습을 드러낸 마물에게 달려갔다. 휘익, 검이 마물의 이마에서부터 흰 선을 자아내며 아래까지 단번에 그었다. 검기를 씌운 검은 마치 마물을 푸딩처럼 가르듯이 손쉽게 갈라내었다. 동시에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촉수를 횡으로 베어 냈다.
쿵-!
마물이 바닥에 쓰러지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몸뚱이가 끊어진 부분에서는 검은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다란 촉수가 끊겨 그 옆에 툭 떨어졌다. 미하일은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몸통을 부풀려 들숨과 날숨을 반복적으로 내쉬었다. 마물이 혹시라도 다시 일어날 것에 대비하려는 것이었지만, 마물의 잔해는 바닥에 떨어져 미동도 없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 아드리안은 미하일이 마물을 쓰러트린 것을 확인한 후에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얼떨결에 저놈의 고집에 맞춰 주느라 부상까지 당한 것이 그제야 생각난 것이었다.
발목에서는 뜨끈한 열기와 올라왔고, 그와 함께 촉수가 스친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흐르며 바닥에 핏자국을 냈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으려다가 그냥 벌러덩 땅에 누워 버렸다.
“아드리안!”
미하일은 뒤쪽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외쳤다. 그는 아드리안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응.”
나 안 죽었다. 정신 사납게 흔들지 마.
아드리안은 쓰러진 김에 바닥에 누워 있는 채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도와주려다 괜히 발목만 나갔네. 그는 발을 몇 번 움직여 보다가 눈가를 찡그렸다. 윽, 뼈도 부러진 것 같은데.
마법을 써서 치료하면 순식간에 원상 복구가 되겠으나, 지금은 좀 곤란했다. 몸 이곳저곳에서 미하일의 잘게 떨리는 손이 느껴졌다. 횃불은 어느샌가 데굴데굴 굴러 바닥 저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미하일은 그 횃불을 재빠르게 주워 와 다리 부근의 상처를 확인했다.
이런, 생각보다 큰 상처에 당황했는지 미하일이 호흡을 잠깐 참는 소리가 들렸다. 미하일은 손바닥에 느껴지는 미지근한 피를 눈 바로 앞으로 가져갔다. 자신의 눈동자와 같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괜찮아? ……! 이건 피잖아!”
정작 그의 관심을 받고 있는 아드리안은 골치 아프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미하일. 내가 아까 말한 건 다 잊었어? 숲속에선 좀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지금 그딴 게 중요해?! 제대로 서지도 못해서 누워 있는 주제에……. 어서 빨리 마을로 돌아가서 의사를-”
“호들갑 떨지 마.”
아드리안의 단호한 목소리가 미하일의 혼란스러운 정신을 일깨웠다. 다친 주제에 신음 하나 뱉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드리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제 상태를 변명했다.
“이건 괜히 어두워서 더 심해 보이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깊은 상처는-”
“아니라고?”
그 말에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상처 주위를 만졌던 자신의 손바닥을 아드리안 바로 앞까지 들이밀며 말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상태도 모르고 있는 멍청한 놈에게 현실을 알려 주려 애썼다.
“충분히 심해. 흘리는 피만 봐도……! 이것 봐!”
그의 손바닥은 질척한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피가 이리저리 묻어 번진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피는 많이 흘리긴 했네. 아드리안은 할 말이 없어 잠시간 미하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 잠깐만.”
그러고는 주저앉아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발목을 다친 탓에 제대로 서기는 좀 힘들었다.
미하일의 걱정을 들어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아드리안에게는 지금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스윽, 툭. 발목 한쪽이 이상한 탓에 걸음걸이가 볼품없었다.
“움직이지 마. 그 꼴로 어딜 가게?”
“저걸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니야.”
아드리안은 다친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인상을 찡그리며 마물의 잔해를 향해 절뚝이며 걸어갔다.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기다려. 내가 가져다주면 되잖아.”
미하일은 아드리안을 빠르게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물을 흔적을 확인했다. 베어 내고 난 뒤에는 검은 연기가 많이 솟아났었는데, 지금은 아주 가느다란 연기만 힘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손대면 안 되는 건 알지?”
등 뒤에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직도 포기 못 했던지 열심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하지. 어?”
미하일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중얼거렸다.
“왜? 무슨 문제- 이런…….”
결국 이쪽까지 걸어온 아드리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그곳에는 흔적도 없이 연기로 기화되어 날아간 듯 검은 자국만 남아 있었다.
***
싫다는대도 또 한 번 미하일의 고집을 꺾지 못한 아드리안이 그의 등에 업혔다. 업히고 보니 의외로 편하고 안정적이긴 했다. 다리를 다쳐 만약에 스스로 걸어왔다면 한참이 걸렸을 것이다.
“편하긴 하네.”
“……알았으니까,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지 마.”
“아니, 마을 사람들은 다 자고 있을 텐데 크게 말할 순 없잖아?”
아드리안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윽, 너무 가까워. 미하일은 그 목소리에 몸을 살짝 떨고는 귀 끝을 붉게 물들였다.
아드리안이 빨개진 미하일의 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내가 걸을까?”
“아니. 그냥 조용히만 해.”
미하일은 잠시 숨을 삼키더니 이내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숙소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카일을 마주쳤다. 카일은 깜빡 잊고 나눠 주지 않은 물건을 들고 아드리안과 미하일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사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곤 로비의 소파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너희 꼴이 왜 이래?”
젠장, 아드리안은 그제야 미하일과 자신의 외관을 확인했다. 나뭇잎이 온통 붙고, 자잘한 생채기로도 모자라 이쪽은 다쳐서 업혀 있기까지 했다.
“…….”
세 명의 청년은 숙소의 복도에 선 채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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