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식사를 마친 후, 셋은 마차를 잠시 멈춰 두고 타마힐드의 투박한 골목을 거닐었다. 식사를 한 이후에는 조금 걸어 줘야 한다는 카일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카일의 고집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산책에 응해 주었다. 미하일은 “……식전 식후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평소에 운동을 해야지.”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아드리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문득,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아드리안이 몸을 멈췄다. 미하일도 덩달아 발걸음을 멈춘 채 아드리안을 바라보았으나, 카일은 그런 것도 모르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며 걸어갔다.
“왜?”
미하일은 갑자기 멈춰 선 아드리안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 별거 아냐.”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지금 이 근방에 총 세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아드리안은 그 짧은 순간에 그 셋 모두 전부 마차를 계속 뒤따라오던 호위 기사임을 가려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런 호위 없이 왕족과 귀족 자제들을 여행 보낼 가문은 없을 것이었다. 어쨌든 수상한 놈들이 아니라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저 앞에서 카일의 무척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도시가 대륙의 조각가 중 제일이라는 데키베스의 고향이래!”
네, 네. 아드리안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미하일과 함께 카일의 뒤를 따라갔다.
거리를 걷다 보니 타마힐드 마을은 꽤나 드래곤의 취향에 맞는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전통적인 양식의 건축물들과 특히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이 돌바닥의 투박함이 마음에 들었다. 마을 중앙의 커다란 분수대 옆에는 건물 외벽 하나 크기의 게시판이 우뚝 서 있었다. 각종 크고 작은 안내문들과 메모가 잔뜩 붙어 있는 낡은 게시판이었다.
‘이전의 유희에서는 저런 게시판을 매일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마을의 중요한 정보와 의뢰 같은 것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시야에 얼결에 들어온 게시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일은 아드리안의 시선을 확인하곤 “오오.” 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요즘의 수도에서는 한층 더 정교해진 마법 기반 안내가 보편화된 탓에, 카일처럼 어리고 부유한 귀족 집안의 자제들은 이런 게시판을 실제로 볼 일이 없었다.
“이렇게 옛날식 게시판은 처음 봐!”
“그러게요.”
아드리안은 신기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시치미를 뗐다.
미하일은 갑자기 마을 게시판 앞에 멈춰선 둘을 불만스레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둘의 뒷모습이 마치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이 여행을 온 모양새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기로 쭉 내려가다 보면 그 조각가의 생가가 나온대! 저기로 가 보자.”
게시판을 대충 살펴보던 카일은 다시 가던 길을 걸으려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여전히 게시판의 어떤 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그의 등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미하일이 옆으로 걸어왔다.
“왜? 뭔가 걸리는 게 있어?”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나직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어느샌가 바로 옆에 서 있는 미하일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미하일. 이 마을에서 힐데케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었었지?”
“아카데미에서 마차로 여덟 시간 정도 달려왔으니, 대충…… 또 여덟 시간 정도 남았겠는데.”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미하일은 아무렇지 않게 시계를 한번 확인해 주었다. 그 대답에 아드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건 왜?”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질문에 대답 대신, 묘한 표정을 지으며 게시판에 걸려 있는 메모 하나를 검지로 쿡, 눌렀다. 그것은 햇볕에 노출되어 너덜더널해진 양피지 조각이었다. 아드리안은 그 위에 펜으로 휘갈겨 써 진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여기에 ‘숲 초입에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를 발견했으니, 절대 주변에 다가가지 말고 피해 다녀라’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어.”
“검은 액체?”
미하일의 표정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마을은 역사가 오래된 타마힐드였다. 평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이곳에 마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이가 거주하고 있을 리 없었다. 게시판에 붙은 이 메모를 보고도 아무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검은 액체가 아니라 검은 마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너희 왜 안 따라오고 여기에 멈춰 서 있어? 나 혼자 저기까지 갔다 왔잖아.”
저만치 먼저 혼자 걸어가던 카일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게시판의 메모를 함께 읽고 있는 아드리안과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선배, 여기 이걸 보세요. 이 메모. 타마힐드에까지도 검은 마나가 솟아나고 있어요.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검은 마나? 하지만…….”
카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머릿속에 루스타바란 왕국이 자리한 대륙의 지도가 펼쳐졌다. 그들이 연구하는 검은 마나의 발견 기록은 대륙 바깥쪽 해변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힐데케 절벽이 있는 산 또한 대륙의 외곽 지역이었다.
“발원지로부터 검은 마나가 움직이고 있다는 예상이 적중했네요. 점점 루스타바란의 수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아드리안은 카일의 생각을 읽은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검은 마나는 대륙의 외곽에서 솟아나다가, 이후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대륙 전역을 확- 한 번에 덮었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이 타마힐드 마을에서도 검은 마나가 솟아난 것은, 마물들이 그 안에서 뛰어올라 인간들을 덮쳐 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 확인은 한번 해야겠네. 저 쪽지에서 말하고 있는 게 검은 마나가 아닐 수도 있잖아?”
카일은 자신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는 문득 옆의 미하일을 확인했다. 안 그래도 왕자님은 검은 마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했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는 정보를 가지고 괜히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아드리안이 흐음, 하고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럼 확인은 내일 해 볼까요?”
“뭐? 지금 당장이라도 가 봐야지.”
아드리안의 이야기에 미하일이 곧장 반박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오후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마을의 작은 숲 정도는 걸어갔다가 돌아올 힘은 충분했다.
“미하일. 밤의 숲을 과소평가하지 마. 게다가 저게 정말 검은 마나라면 더 위험해. 괜한 위험을 감수하고 어두운 저녁에 확인할 필요는 없잖아.”
카일이 단호한 목소리로 결정했다. 이 답사의 결정권자는 카일이었으므로 그가 결정하는 것이 맞았다. 아드리안은 그의 결정에 동의하며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곳에 함께 가 보자고 말했다.
미하일은 그 결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중요한 결정을 혼자 멋대로 내릴 정도로 제멋대로인 왕족은 아니었다. 미하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은 잘 생각했다는 듯이 씨익- 크게 웃어 주었다.
그러고는 아드리안과 미하일을 오늘 묵을 숙소로 안내했다.
카일이 예약해 둔 숙소는 타마힐드 마을에서 가장 좋은 곳이었다. 그는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열쇠를 각각 하나씩 나눠 주며, 내일 몇 시에 일어나 중앙 로비로 나와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그러고는 하루 종일 마차를 타고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어서 들어가 쉬라며 아드리안과 미하일의 등을 세게 떠밀었다.
“알았지? 내일 아침 일곱 시에는 로비에 나와 있어야 해!”
카일은 극성맞은 보호자처럼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며 소리쳤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그런 카일의 잔소리를 대강 흘려들으며 각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하지만 아드리안은 이대로 잠들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둑한 밤이 되었을 때, 아드리안은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던 몸을 단번에 일으키고는 망설임 하나 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벽 너머에 귀를 기울여 보니 카일은 이미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고, 미하일은…… 아직 자는 것 같진 않았지만 움직임이 없는걸 보니 곧 잠에 들 것이었다.
아까 느껴졌던 호위 기사 셋도 같은 건물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따돌리는 것은 드래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방문을 슬쩍 열고 나왔다.
바로 옆방에서 누군가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미하일의 방이었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으며 ‘이렇게 늦은 시간에 훈련을 나가려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옆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디 가?”
깜짝이야.
미하일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은 순간 지었던 뜨금한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옆방에서 나온 미하일을 향해 말했다.
“……잠시 어디 좀 나갔다가 오려고.”
“어디를?”
“음, 잠이 너무 안 와서 한 바퀴 걷을 거야.”
아드리안은 머리카락을 슬쩍 쓸어 넘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안 돼. 같이 가.”
“…….”
뭐라고?
아드리안은 답지 않게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안 된다니? 이렇게 오지랖 넓은 참견이 그에게는 무척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안 되는 게 어딨어? 내가 나갔다 올 거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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