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아름답게 세공된 바사미엘의 분수대가 어두운 숲속에 은은하게 빛났다.
아드리안이 그곳에 던져 넣은 돌맹이 두 개가 수면과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맑은 물속으로 두 개의 돌이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미하일의 ‘꿰뚫어 보는 눈’이라면 이제 지겨울 정도였다.
“이걸로 안녕이다.”
그는 후련하단 표정으로 바사미엘의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일 년 동안 앓던 이를 단번에 뽑아낸 것처럼 개운했다.
실종된 학생의 침대 밑에서 ‘꿰뚫어 보는 눈’이, 그것도 미하일의 것까지 두 개가 발견된다면 두고두고 화제가 될지도. 아드리안은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쳐 탁탁 털었다.
이걸로 바사미엘 아카데미 일 학년 아드리안 헤더의 실종이 완벽히 준비되었다.
물론, 학생 하나가 갑자기 사라지면 아카데미도 잠깐이나마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잠깐’일 것이었다.
그 순간 아드리안의 눈앞을 스쳐 지나간 장면이 하나 있었다. 뺨을 살짝 붉힌 채 고백을 해 오는 미하일의 얼굴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훈련장에 나가는 그의 성격이 그제야 떠올랐다.
흠, ‘잠깐’이…… 맞겠지? 아드리안의 눈매가 슬쩍 좁아졌다. 그러나 곧이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왕족이고, 왕자라 해도 죽은 아드리안 헤더를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때를 대비해서 이렇게 아드리안이 정리를 해 두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뭐, 어차피 다시는 얼굴 볼 일 없는 사이니까.”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어두운 숲속을 천천히 거닐었다.
이따금씩 부엉이가 날아와 아드리안의 머리 위를 휙휙 돌기도 했고, 여우 한 마리가 자꾸 옆을 맴돌며 일부러 아드리안의 바짓단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마치 박자라도 맞춘 듯 서로의 발걸음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샛노란 초승달이 환하게 어두운 밤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
드디어 답사를 떠나는 날의 해가 떴다.
아드리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전날 준비해 두었던 짐을 챙겨 들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미하일을 확인하니, 그도 준비가 다 끝난 것처럼 보였다. 미하일은 심플하지만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일상복 차림이었다.
“준비는 끝?”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질문에 시선을 은근히 다른 방향으로 흘린 채 대답했다.
“……응.”
“…….”
아드리안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짐을 턱, 어깨에 가볍게 걸쳤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작게 저었다.
“그럼, 나가자.”
자신의 짐을 챙겨 바로 뒤를 졸졸 따라 걸어오고 있는 미하일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미하일은 어제 그렇게 갑자기 고백을 한 이후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자꾸 이렇게 불쌍한 강아지처럼 굴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드리안은 빈손을 들어 올려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검지로 문질렀다.
‘음. 이제 곧 바사미엘을 떠나야 하는데.’
그가 곤란한 이유는 유희를 끝내기 전에 카일의 연구 조수 역할을 해 주고, 미하일에게 펠렌 디프스의 검을 줬던 것과 동일했다. 미적지근한 결말로 이번 유희를 끝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걷고 있는 아드리안이 미하일을 슬쩍 떠보았다.
“미하일, 답사를 억지로 가는 건 아니지? 혹시 나한테 맞춰 주려고-”
“걱정 마. 그런 거 아니니까.”
미하일의 퉁명스런 대답이 뒤에서 들려왔다.
“그래…… 그런 거 아니라면 다행이고…….”
아드리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보통 인간들은 고백을 거절당하면 왜 자신을 오해하게 만들었냐며 화를 내고 관계를 끊었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척 민망해하며 다시는 얼굴 보지 않으려 드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는데 이 경우는 특이했다. 미하일은 면전에서 거절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좀 더 확실하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둘은 어느새 본관 정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짐마차를 뒤에 매단 마차 한 대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아드리안조차도 여태껏 몇 번 타 본 적 없었던 커다란 마차였다. 그 마차에 기대 있던 카일이 팔을 크게 흔들었다.
“어, 여기야. 빨리 나왔네?”
카일의 발랄한 목소리가 어색한 둘 사이를 갈랐다. 아드리안은 숨 막힐 듯 어정쩡했던 공기를 바꿔 준 은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카일은 손을 흔들며 “그래! 오늘 진짜 떠나기 좋은 날씨야.”라고 말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이 점점 그와 가까워지자, 그제야 둘 사이의 묘하게 어색한 공기를 읽어 낸 카일이 고개를 기울였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냥 둘의 분위기를 알아채곤 아무 말도 않았겠지만…….
카일은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너희 분위기가 뭔가 이상한데, 왜 이래?”
응? 카일은 떠보려는 듯이 아드리안의 팔을 툭 주먹으로 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시도였다.
곧바로 카일을 향해 미하일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휙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누구 팔을 그렇게 건드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미하일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뭔진 몰라도 좋은 분위기는 아닌가 보군. 눈치 빠른 카일은 천천히 주먹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어…… 룸메이트끼리 싸우고 그럴 때도 있지.”
그 말에 아드리안은 묘한 표정으로 아무 말없이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싸운 건 아니지만, 비슷하긴 했으니까.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서로를 바라만 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미하일이 고백한 일은 카일에게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둘만의 일이었다.
***
마차 안은 커다란 크기답게 편안했다. 아드리안은 푹신한 소파에 앉은 채로 창가에 기대어 바사미엘의 숲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 년 동안 틈 날 때마다 산책을 했던 곳이었다. 아드리안은 창에 올려 둔 제 팔에 턱을 괴었다.
그의 따뜻한 밀빛 눈동자를 어두운 숲 너머에 고정한 채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저기에 묘목 몇 그루를 심었었는데.’
열매 맺는 것도 못 보고 가네. 물론 묘목들은 갑갑한 온실에서 자라나는 것보다야 저 숲에 버려지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옅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레어에 있는 정원을 떠올렸다. 모두들 제자리에서 여행을 떠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큼, 카일이 말 한마디 오가지 않는 마차 안의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힐데케까지는 꼬박 하루를 달려야 해. 가는 길에 먹을 식당과 숙소는 나름대로 좋은 곳으로 예약했어. 조금 뒤에 도착할 타마힐드에서 점심 식사를 위해 내려야 해.”
“메뉴는?”
미하일의 목소리가 그 이야기에 갑자기 끼어들었다. 카일은 그에 응? 하고 반응했다. 카일은 곧바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타마힐드에 엄청 유명한 훈제 스테이크 식당이 있거든.”
아드리안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선택이었다. 그는 미하일이 교내 식당에서 언제나 스테이크가 나오는 A 코스를 고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 마차 밖의 숲을 바라보는 아드리안을 미하일이 힐끔 확인했다.
‘스테이크를 안 좋아하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거야.’
모든 일에 저딴 식이지.
미하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살풋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잠시간 입술을 비죽이다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이러다간 마차가 곧장 스테이크 가게로 달릴 기세였다.
“……지금은 딱히 안 당기는데. 다른 곳으로 가죠.”
“그래?”
카일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행선지를 바꾸는 것이야 별로 어렵지는 않았으나 미하일이 스테이크를 먹기 싫어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마차 선반에 올려 두었던 종이를 휙, 꺼내 들고는 접혀 있던 지도를 크게 펼쳐 들었다. 무척 커다란 지도라서 셋이 앉아 있는 마차의 테이블 위가 모두 덮였다. 그 탓에 창밖을 바라보던 아드리안과 미하일의 눈동자가 모두 그 지도로 향했다.
“그러면 여기도 괜찮고, 아! 그리고 여기도 추천받았었다.”
카일은 지도 위에 검지를 움직이며 가게 몇 개를 골라냈다. 미하일은 카일이 가리키는 가게들을 유심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디가 좋아?”
어? 자신에게 한 이야기인 줄 알고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카일은 맞은편의 아드리안에게 한 질문임을 알아차렸다. ‘역시 출발하기 전에 둘이 싸운 게 맞구나.’ 카일은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곤 미하일과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일 분이라도 빨리 화해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아드리안의 시선이 힐끔 그런 카일을 향하자, 그는 두 손바닥을 들어 올린 채 자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졸지에 메뉴까지 정하게 생긴 아드리안은 곤란하다는 듯 뺨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내가 고르라고? 난 다 좋아.”
“그러니까 저 중에서 어디가 좋은데?”
“…….”
아드리안의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그는 방금 카일이 짚었던 곳들 중 그냥 눈에 바로 들어온 식당을 검지로 가리켰다.
“……여기.”
“그럼 저기로 하죠.”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손가락 끝을 확인하고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카일은 이에 잘됐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어쩐지 둘이 화해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좋아, 좋아. 여기도 가 보고 싶었어. 고급스런 해산물 요리를 파는 식당이거든.”
아드리안은 그 말을 들으면서 “그렇군요.”라고 대답했다. 마침 그가 스테이크보다는 더 좋아하는 메뉴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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