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그야 널…….”
답지 않게 풀죽은 목소리로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고백을 하려니 억울해진 탓이었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묘한 표정으로 미하일이 이야기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미하일은 우선 저 화분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제부터 급하게 준비한 깜짝 선물에 대해 실토했다.
“네가 좋아하던 거니까 선물 겸 주려고.”
“……그러니까 갑자기 왜 이걸 내게 주려는 건데?”
퉁명스러운 반응에 미하일은 무척 억울하다는 듯이 얼굴을 번쩍 들어올렸다.
분명 아드리안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무심한 태도인 건지 미하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판을 다 깔아 준 거 아닌가. 눈치를 못 챈 건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백이라는 게 두 사람 중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라면…….
미하일의 예상과 다른 상황이 되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저질러 보기로 했다.
“나도 좋아하니까.”
“…….”
뭐?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점점 붉어지는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휙, 고개를 돌려 뿌리만 드러나 있는 풀 한 포기를 살피곤 입을 열었다.
“……저 약초를?”
“아니, 널 좋아한다고. 나도.”
“……뭐?”
아드리안은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말을 이해해 보려 했지만 의문만 커질 뿐이었다. 이미 새빨갛게 달아오른 미하일의 귀 끝을 보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였다.
“……날 좋아한다고? 네가? 나를?”
“그렇다고! 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건데!”
빨개진 얼굴로 미하일이 버럭 소리쳤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 역시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시선이 맞닥뜨렸지만 둘 중 누구도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드리안이 조심히 말문을 열었다. 방금 미하일이 했던 말 중에서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네가 한 말 중에 ‘나도’……라는 건 또 뭐야?”
“……됐어. 그건 신경 쓰지 마.”
그제야 미하일은 이 모든 게 오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투덜대며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문득 시야에 문제의 잡초가 들어왔다. 그 나름 야심차게 준비한 선물인데, 지금은 시든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당연히 이걸 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미 죽은 거란 말이지…… 하지만.
미하일은 가져왔던 화분을 다시 들어 올려서 아드리안이 다 쏟아부은 흙을 조심히 옮겨 담았다. 중간에 잡초도 심어 넣어 툭툭 손바닥으로 두드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하일. 그건 다시 심어 봤자 소용없어.”
등 뒤로 아드리안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하일은 그것을 못 들은 척 흙을 다 옮겨 담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기가 막혀 하는 아드리안의 얼굴 앞으로 미하일이 화분을 쑥 내밀었다.
“세상에 소용없는 게 어딨어. 이 잡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포기하지 말고 살려 봐. 내 선물이니까.”
“……그거 잡초 아닌데.”
제법 귀한 약초라고.
미하일의 말을 아드리안이 조용히 지적했다. 이렇게라도 고백을 어물쩍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 돌리지 말고.”
“…….”
“대답을 해 줘야지.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미하일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주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정했다. 말하고 나니 이편이 훨씬 더 마음 편한 것 같았다.
“…….”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며 곤란하다는 듯이 옅게 미소 지었다. 미하일은 그 표정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저건…… 사자 조각상 앞에서 여학생의 고백을 차갑게 거절할 때의 표정이었다. 미하일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아드리안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
“……미하일.”
솔직히 그와 거의 일 년간 함께 지내 온 미하일은 뒤에 이어질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진짜 몰랐어.”
“…….”
“내가 널 좋아하는 것처럼 느꼈다면 그건 내 잘못이야.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고…….”
바로 앞에 서 있는 미하일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아드리안은 멋쩍은 듯이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긁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어두워진 표정과 다르게 담담한 미하일의 기색으로 보아 어느 정도 거절의 대답을 예상한 듯했지만, 이쪽이 끝까지 확실한 답을 주기 전까지는 꿈쩍도 안 할 작정인 것 같았다.
하아- 아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번뜩 들어 올리더니 어쩔 수 없이 고백에 대한 답을 꺼냈다.
“네겐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어. 그래서 네 마음을 받아 주기도 힘들어. 이해하지?”
아드리안의 최후통첩이 끝난 후, 기숙사 방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색한 분위기에서 아드리안이 먼저 오르디나스 클럽실에 볼일이 있다며 방을 나섰다. 미하일은 얼떨결에 그런 아드리안에게서 시선을 슬쩍 피한 상태로 “……어, 어.” 하고 어색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 힘없는 대답에 아드리안이 힐끔 시선을 주었지만, 미하일의 표정을 보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켜 주기로 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방에서 나가자마자 간신히 곧은 자세를 유지하던 몸을 침대에 풀썩 던졌다.
동시에 커다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의 광경이 마치 영상석이 생생하게 녹화한 것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 재생되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제 모습은 꼴불견이 따로 없었다.
아드리안이 고백을 거절하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으으으윽……!
미하일은 침대에 누운 채 옆으로 몸통을 돌려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제기랄! 이렇게 곧바로 거절당할 줄이야! 나도 케이지 리타나랑 똑같은 취급이라고? 솔직히 그건 아니지. 미하일은 두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휙휙 짜증스레 헝클었다.
그러다가 침대에서 번뜩 상체를 일으켰다. ‘포기하지 말고 살려 봐. 내 선물이니까.’라는 헛소리를 하면서 다시 떠넘겼던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화분은 아드리안의 창가에 잘 놓여 있었다. 좀 더 알아보고 선물해야 했는데. 미하일은 눈을 질끈 감으며 어제의 자신을 원망했다.
“……그래도 선물은 다시 받아 줬네.”
미하일은 화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뿌리에 해가 닿으면 죽는다고는 했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닌가. 왠지 모르게 아드리안이라면 저것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저 잡초는 몰라도, 화분은 이름깨나 날리는 장인이 만든 작품인데…… 미하일은 그 짧은 시간 안에 저 최고급 화분을 구해, 왕실의 온실에 있는 식물 하나를 선물한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 행동인지 다시 한번 스스로 되새김질해 보았다.
아마 아드리안도 그런 노력이 가상하여 저 화분을 다시 받아 준 것이 틀림없었다.
“……마음은 바뀔 수 있는 거지.”
그래, 저 화분처럼 다음 기회가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일 학년일 뿐이고, 바사미엘 행정처에 힘을 좀 써 놓는다면 내년에도 아드리안과 같은 방을 쓰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하일은 진지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친구 이상은 아니래도, 싫지는 않다는 거잖아.”
미하일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차갑게 거절당한 경험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이건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이었다.
“그러면 친구 이상이 되도록 내가 노력하면 되는 것 아닌가?”
동시에 미하일의 눈동자가 갑자기 생긴 희망에 불타올랐다. 그는 곧 있을 답사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드리안이 깜짝 놀라서 이쪽을 다시 봐 줄 만한, 그런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아하, 미하일은 무언가 생각난 듯 침대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옷장 문을 활짝 펼쳐 그 안의 옷들을 유심히 살폈다. 조금 있으면 답사를 떠날 것이었다. 그것은 매일같이 입던 아카데미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는다는 말이었다.
미하일은 옷걸이에 걸린 모든 옷들을 한 번씩 확인하며 가져갈 짐을 빠르게 추렸다.
원래라면 사용인에게 대강 닷새 동안 여행에 필요한 짐을 챙겨 달라는 것으로 끝났을 준비였다. 하지만 미하일은 무척 심혈을 기울여 옷들을 골라냈다. 심지어 몇 벌은 결정하기 힘들었으므로, 입어 보거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기까지도 했다. 옷을 고르는 데 이렇게 공을 들인 건 열일곱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기숙사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미하일은 거울을 바라보던 상태로 몸을 멈칫, 굳혔다. 기숙사 방에 들어온 것은 당연히 아드리안이었다. 오르디나스 클럽실에서의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난 듯했다.
아드리안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앞에 옷을 산더미처럼 펼쳐 놓은 미하일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말을 붙여 왔다. 예상은 했으나 조금 전 이쪽이 고백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짐 챙기는 거야?”
“……뭐.”
미하일은 아드리안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평소라면 곧바로 대답했을 텐데 왠지 모르게 시선을 마주하는 것도 힘들었다. 미하일이 잠시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때였다.
아드리안이 먼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제 할 일을 하면서 말했다.
“그 옷, 답사 때 입기에는 화려한 것 같은데.”
미하일은 그 말에 고개를 불쑥 들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입고 있는 것은 파티에 갈 때 입는 정복이었다.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고, 커프스와 단추는 모두 최상급 보석으로 되어 있었다.
“……누가 이런 걸 답사 때 가져간대?”
어색한 말투였다.
미하일은 입을 꾹 다물고는 정복의 단추를 빠르게 풀어 내렸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매일 입던 교복이 아닌 정복을 차려입은 미하일은 제 고귀한 태생을 뽐내듯 옷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그런데 넌 화려한 게 어울리긴 해.”
아드리안은 억겁의 시간 동안 쌓아 온 자신의 심미안에 무척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본래 드래곤이란 족속들은 반짝거리는 보석들을 좋아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반응에 미하일은 “……그래?”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정복을 답사에 가져갈 짐으로 분류했다.
아무리 무겁고 거추장스러워도 꼭 가져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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