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미하일은 전시회에 가느라 차려 입은 정복의 옷깃을 검지손가락으로 정리하며 볼을 조금 붉혔다.
“아니, 그냥 말로 할 것이지.”
웃으려 하지 않아도 절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흠, 흠. 미하일은 그런 자신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진정시켰다. 의뢰를 마무리 한 후 30틸론을 받기 전까지, 이렇게 바보같이 웃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던 미하일이었다.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는 의뢰자는 그의 마음을 이미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좋을 때네, 좋을 때.”라고 말했었다.
피식, 그 말을 떠올리며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좋을 때는 무슨. 겨우 세 살 차이 주제에.”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지금 당장 아드리안의 얼굴을 봐야 성에 찰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아드리안의 심정은 이해했다. 아무리 지금은 같은 방을 쓴다 해도 이쪽은 왕족이었다. 게다가 여태까지 서로 그리 살갑게 대하진 않았으니, 선뜻 먼저 다가오긴 힘들었겠지.
미하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그랬단 말이지.”
왜 그동안 아드리안이 이상하게 굴었는지 알게 된 미하일은 뿌듯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미하일은 기숙사 방 앞에 도착했다. 미하일이 문을 열자마자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빨리 왔네? 전시회는 어때.”
그는 여전히 책상에 앉은 채였다. 아마 하루 종일 저기에 앉아서 연구 내용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 뻔했다.
“뭐, 전시회가 전시회지.”
미하일은 그의 입에서 나온 문장의 내용과는 별개로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평소와 같이 심드렁한 얼굴로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었다. 저렇게 표정 관리를 잘하니 이쪽이 못 알아채는 것이 당연한 거지.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의 요상한 시선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무슨 일 있어?”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아무 말없이 샐쭉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아드리안의 짝사랑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 주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미하일은 짧은 편지 하나를 써 내려갔다. 그러고는 곧장 왕성으로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왕성의 온실 가장자리의 잡초가 필요. 위치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으나 푸른 꽃봉오리가 달렸고, 커다란 열대 나무들 사이에 있었음. 그걸 캐내어 바사미엘의 기숙사로 전달 바람.
※ 화분은 잡초와 어울리지 않아도 좋으니 최고급으로!
***
평화로운 날씨의 바사미엘이었다. 학생들은 곧 끝나는 세리체인 축제를 아쉬워하며 그간의 축제에서 재미있었던 점들을 조잘거렸다.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아침에 카일의 연락을 받고는 식당에 도착했다.
카일은 이미 테이블에 앉아 미하일과 아드리안을 발견하고는 “여기야!”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식당 직원을 불러 그들을 위한 차 두 잔을 주문했다.
식당에 딸린 야외 테이블 위에는 뜨거운 차 세 잔과 디저트가 각자의 앞에 놓였다. 카일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밝은 목소리로 곧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내일이면 세리체인 축제가 끝나잖아, 그래서 사전 점검차 내 연구 조수로 답사에 함께 갈 둘을 불렀지.”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카일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그럴 시간이 다 되었군,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렇군요.”
바로 옆의 미하일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바닥에 신발을 몇 번 툭툭 두드릴 뿐이었다. 타이밍이 약간 애매했다. 출발하기 전까지 화분을 받으려면 아슬아슬하겠는걸? 미하일은 오늘 저녁에 편지를 다시 한 번 쓰기로 마음먹었다.
“답사는 주말 이틀과 평일 사흘을 합쳐서 총 닷새 동안 나갈 계획이야. 그러니 각자 닷새 동안 사용할 짐을 챙겨서 출발하는 날 아침에 본관 앞으로 나오면 돼.”
“네.”
“짐칸이 딸린 커다란 마차를 빌릴 거라 짐은 많아도 상관없어.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면, 아마 둘이 따로 챙겨야 할 짐은 거의 없을 거란 거야. 대부분 다 구비해 두었거든! 야영에 필요한 텐트와 침구, 답사 기간 동안 해먹을 음식들까지 다 따로 챙겨 가는 거니 옷이랑 개인 짐만 들고 나오도록 해.”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왕자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번에는 왜 이렇게 늦었어.”
평소에는 그렇게 부지런하게 다니더니, 하필 이번에만. 미하일은 본관 건물에 등을 기댄 채로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왕가의 전령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예? 제가, 제가 늦었나요? 늦은 건 아닌-”
“이제라도 왔으니 됐고, 그건 어딨어?”
미하일은 전령을 말을 단번에 끊었다. 그러고는 그가 가지고 온 짐을 확인하려 들었다. 전령은 그런 미하일에게 재빨리 가지고 온 것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건 왜 필요하신 겁니까?”
루스타바란 왕가의 막내 왕자가 이번에 요청한 것은 그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했다. 온실 한구석에 있는 잡초를 화분에 담아서 와 달라니. 일반적인 왕족이 보내올 만한 요청은 절대 아니었다. 전령이 방금 내민 화분의 값어치는 평민 한 명의 한 달 생활비와 맞먹었는데, 물론 그 값은 유명한 아틀리에에서 구워 낸 화분이기 때문이었다.
저 잡초가 대체 뭐길래? 전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진 단 한 번도 재촉하신 적 없었는데, 이번에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오셨다. 무척 중요한 사안이라는 거였다.
막내 왕자님은 그 화분을 받아 들고는 마치 보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혹시 더 볼일이 있나?”
차가운 목소리가 전령의 정신을 번뜩 깨웠다.
“아, 아니요. 그럼. 왕자님, 가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복귀하도록.”
미하일은 빠르게 인사하며 휙, 몸을 돌렸다. 품에 안은 화분의 잡초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다행히 답사 출발하기 전에 화분이 도착했으니, 이제 할 일은 딱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미하일은 긴장한 듯 화분을 들고 있는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후, 하고 깊게 숨을 한 번 내쉬고는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곧바로 답사를 떠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 아드리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하일, 짐 싸다 말고 갑자기 어딜 다녀온 거야?”
아드리안은 가방 안에 물건을 넣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힐끔 문가에 여전히 서 있는 미하일을 확인하다가…… 그의 품 안에 있는 화분을 보고는 시선을 멈췄다.
미하일은 그 시선을 깨닫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걸 가져오느라-”
저벅저벅 아드리안이 빠르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기숙사 방 안을 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격렬한 반응에 미하일이 눈썹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휙, 아드리안이 미하일의 품 안에 있던 화분을 낚아채어 갔다.
“너, 이걸 왜?”
뭔가 이상했다.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기쁜 것보다는 화난 것처럼 들렸다. 미하일은 화분을 뺏긴 채 멍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이걸 왜 캐냈어?!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한 이 화분은 뭐고!”
응? 미하일은 갑자기 소리치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화분을 창가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화분에서 잡초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드리안은 들어 올린 잡초의 밑 부분을 유심히 바라보며 흙을 조금씩 털어 냈다.
미하일은 여전히 기숙사 문가에 선 채였다. 그는 그 상태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때 네가 좋아했던……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휙, 아드리안의 날카로운 눈빛이 미하일에게 날아들었다. 미하일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로 말을 이었다.
“그게 네가 좋아하는 잡초가…… 아니었나 보네.”
“미하일.”
차가운 목소리였다. 미하일은 불퉁한 얼굴로 아드리안이 서 있는 창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앞에는 잡초 하나가 파헤쳐져 흰 뿌리가 보이는 상태로 놓여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마치 지금 미하일의 마음처럼.
“이 풀은 뿌리에 절대로.”
아드리안은 말을 하다 말고 잠깐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햇볕이 닿으면 안 돼. 이걸 흙에서 파낸 순간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왜 갑자기 이걸 파헤친 거야? 원래 식물에는 관심도 없었잖아.”
“그게…….”
미하일은 답지 않게 풀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고백을 하려니 억울해진 탓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길래……. 그걸 주려고.”
“……그러니까 갑자기 왜 이걸 내게 주려는 건데?”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보면서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지었다.
“……그야 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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