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세리체인 축제의 두 번째 날 오후도 누군가 예상이라도 하고 날을 정한 것처럼 무척 날씨가 좋았다. 화사한 햇살이 대리석 복도를 창문 모양으로 비추고, 창밖의 새들이 발랄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그런 평화로운 날씨와는 달리 미하일은 고민이 많았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아름다운 흰 장검이 발걸음에 맞추어 움직였다.
‘……아드리안은 도대체 왜 나에게 5,000틸론을 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면서 했던 말, ‘너는 펠렌 디프스의 검을 가질 자격이 있어.’ 그 말은 또 뭐냐고.
미하일의 유려한 눈썹이 살풋 찡그러졌다.
그는 지금 중앙 정원에서 의뢰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세리체인 둘째 날 열리는 예술 학부의 전시회에 함께 동행해 달라는 요청이었는데, 평소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의뢰였으나 안타깝게도 이 의뢰가 오늘 자 교내 신문의 <오늘의 의뢰> 중 가장 보수가 높은 것이었다.
그리고 전시회라면 벽에 걸린 그림들을 주욱 둘러보며 걸어 다니는 것이 끝이잖아- 미하일은 생각했다. 산책 한 번에 무려 30틸론이라니.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어찌 됐든 갚으면 그만이야. 덕분에 이 검을 손에 넣긴 했으니까.’
물론…… 이 속도로는 5,000틸론을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이 검 또한 처음에는 손에 넣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아드리안이 그냥 평범한 지인이었다면 그냥 대충 졸업 이후 왕가의 도움을 약속하고 퉁 쳤을 것이다. 하지만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그런 것들에는 관심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말해 봤자, ‘뭐, 너 좋을 대로 해.’라고 말할 것이 뻔하지.’
그래서 전략을 수정한 것이었다. 미하일은 착실하게 다시 틸론을 모아 볼 생각이었다.
‘틸론을 돌려주면 얼마나 놀라겠어. 그러면 나를 다시 보게 될지도.’
아드리안은 당연히 이쪽이 틸론을 돌려줄 수 없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미하일은 복도를 걸으며 두 주먹을 꾸욱 쥐었다. 어느새 기숙사 방 앞에 도착한 미하일은 크게 한숨 한 번 내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발을 딛자마자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제가 재밌나 봐?”
아드리안은 책상에 펼쳐 둔 양피지를 응시하며 미하일에게 말을 걸어왔다. 묘하게 불퉁한 목소리로 들리는 건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룸메이트랍시고 훈련 패턴 같은 건 다 기억하나 보군. 미하일은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축제는 무슨. 요새 훈련 시간을 늘리긴 했지.”
당연히 뒤의 문장은 거짓말이었다.
훈련도 물론 하긴 했으나, <오늘의 의뢰>의 의뢰인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 조금 늦었다. 하지만 의뢰를 들어주고 틸론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미하일의 드높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미하일은 교복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아드리안은 깃펜을 열심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미하일은 책상까지 걸어가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양피지를 내려다보고는 질색했다.
“넌 진짜 하루 종일 방에 있었어? 이번에 졸업하는 건 카일인데, 네가 더 열심이잖아.”
아드리안 앞의 양피지는 지독한 수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하일은 혀를 차더니 책상 오른편에 쌓여 있는 양피지 더미들을 휙휙 들춰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매일 이렇게 오르디나스니 운명이니 그런 이야기들만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겹지도 않아?”
조수랍시고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야? 미하일의 중얼거림에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그는 지금껏 아카데미 학생의 조수로 일해 본 경험이 없었다. 비슷한 경험을 꼽자면 이전 유희 때 어떤 교수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과 비교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겹긴, 원래 연구라는 건 다 이런 식인걸.”
그리고…… 스스로 하겠다고 한 일은 끝내야지.
아드리안은 속으로 생각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바로 옆의 침대 프레임 밑에 조용히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미하일과 자신의 ‘꿰뚫어 보는 눈’을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오늘 새벽, 미하일이 펠렌 디스프의 검을 손에 넣자마자 돌 두 개는 놀라울 만치 가벼워졌다. 그것을 확인한 아드리안은 하, 하고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일 년간 이 같잖은 돌멩이의 원리를 분석하고, 무게를 줄여 보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은 ‘오르디나스’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이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을, 괜히 아등바등 쓸데없는 곳에 힘을 썼던 거지- 아드리안은 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에게 이미 정해진 운명을 비틀 정도로 열망하는 목표는 없었다. 이네하트 가문과는 오르디나스로 지독하게 얽히고설킨 듯했다. 아무래도 카를로에게 피를 주면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아드리안은 엉킨 운명의 흐름을 여기서 끊어 낼 생각이었다. 그는 후련한 듯 슬쩍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는 깃펜을 가볍게 휙휙 움직였다. 그러다가 아드리안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이 “아, 맞다.” 하고, 미하일의 책상을 가리켰다.
“아까 보니까 전시회 초대장이 왔던데? 내가 발견해서 저기 놔뒀어.”
뭐? 전시회에 가는 건 비밀로 하려 했는데.
미하일은 낭패란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의 책상 위에는 아름다운 레이스로 장식된 예술 학부 사교 클럽의 전시회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미하일이 그 초대장을 펼쳐 그 안의 드레스 코드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전시회까지 가다니! 아닌 척하면서 세리체인을 아주 제대로 즐기고 있네. 예술 학부 클럽의 전시회라면, 한스의 연주를 들으러 가는 건가?”
“아니.”
내가 그럴 리가. 미하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스랑 그 정도로 친분 있는 사이도 아니란 걸 알 텐데? 아드리안은 그 대답에 “하긴, 그건 그렇지.”라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나 보네.”
“그럴 리가.”
미하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그제야 아드리안이 끼익- 의자를 살짝 뒤로 뺀 채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것도 아니라니, 이유를 맞혀 보려는 호기심이 생긴 탓이었다.
“아, 거기도 콩쿠르 마지막 라운드만 남았으니 그걸 보러 가는구나.”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아드리안은 세 번 만에 김이 샜는지 뒷목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그러고는 팔을 천천히 흔들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래? 아무튼 재밌게 잘 다녀와.”
초대장을 보아하니 동행인의 이름도 적혀 있었는데, 미하일에게 친구가 많아지는 것은 이쪽에서도 환영이었다. 반대로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을 불만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다 휙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
“와 저기 좀 봐- 미하일?”
응?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미하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에게 말을 건 이는 가벼운 드레스 차림의 전시회 동행인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에이드 한 잔을 손에 들고는 전시회의 분위기를 돋우는 악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악단이 하프를 마법으로 연주하고 있다는 걸 말해 줄려고 했는데-”
미하일은 여기에 동행인으로 참석한 것도 까먹었던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의뢰자는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야 이 전시회에 혼자 나오기 싫어서 의뢰를 넣은 거긴 하지만……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니야?”
그녀는 에이드를 한 모금 마시고는 운을 떼었다. 미하일은 스스로도 조금 찔렸던지 퉁명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성의가 없다니. 전시회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나랑 잠깐 이야기하는 척 정도는 해.”
그것 때문에 의뢰한 거거든.
그녀는 동시에 눈짓으로 전시회 한 구석의 어떤 학생을 가리켰는데, 그 남학생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는 뻣뻣한 걸음으로 반대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며 의뢰인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고백할 용기도 없어 저렇게 맴도는 걸 봐. 아까부터 저기에 계속 서 있었다니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졸업하기 전까진 꼼짝없이 대치 상태일걸.”
아니, 이러다 그냥 졸업해 버리면 어쩌려는 거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남학생이 이상한 자세로 자리를 피하고 있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미하일이 입술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자 에이드를 마시던 동행인이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놈이 당신을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아닐 수도 있잖아.”
푸핫, 미하일의 진지한 말투에 학생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옆의 이 오만하고 차갑기만 한 왕자님이 갑자기 조금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매일 훈련장에만 모습을 드러내어 검을 휘두르고, 식당이나 교실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 이 도도한 왕자님의 이미지가 단번에 희석되었다.
저런 질문이라니, 딱 지금 이 나이대의 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보이지 않는가!
“절대 아닐 리가 없거든. 왜냐하면 이든은 외출할 때마다 내가 생각났다며 선물을 가져오고, 식당에서 매번 식사를 사 준다고. 아닌 척하면서 내 모든 활동에 관심이 많기도 하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시험이나 콩쿠르 때문에 불안해할 때마다 응원해 줘.”
미하일은 아닌 척하면서 무척 열심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문장들에서 몇 몇 장면들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넌 펠렌 디스프의 검을 가질 자격이 있으니까.”
펑! 그때 공중에서 폭죽이 터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치 햇빛이 안에서 밝게 반짝이듯 빛나던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미하일의 눈앞을 스쳐 갔다. 그러고 보니 이유는 묻지 말라고 말했었지. 그럼 그게 고백하기는 부끄러워서……?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듣던 미하일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면, 설마 누군가 내게 5,000틸론을 준다면…… 그건 나를 좋아해서일까?”
뭐어?
미하일의 말에 여학생이 눈을 반짝거렸다. 5,000틸론이라니! 누가 왕자님에게 그렇게 통 큰 고백을 할 수 있단 것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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