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주문은 뭘로 해 줄까?”
“응?”
미하일의 목소리에 다른 생각을 하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식당의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주문을 해 준다고? 아드리안은 힐끔 미하일을 확인했다. 그러자 미하일은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뿌듯한 눈빛으로 “내가 살게.”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메뉴판을 턱짓했다.
“……음, B 코스.”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메뉴판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가, 자신의 것과 아드리안의 식사를 함께 주문했다. 그는 식당 직원에게 틸론을 넘긴 후 채광이 잘 들어오는 테이블 하나를 가리켰다.
아니. 자리까지 벌써 잡아 뒀다고? 아드리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하일이 잡아 둔 테이블로 걸어갔다.
갑자기 미하일과 새벽에 펠렌 디프스의 검을 손에 든 채로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미하일은 장식장에서 검을 꺼내고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검집째로 손잡이에 세공된 날개를 보는가 하면,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고 날이 잘 서 있는지도 확인했다. 눈을 반짝거리는 것이 벼르고 벼르던 생일 선물을 마침내 받아 낸 아이 같은 모양새였다. 미하일은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벽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아드리안을 향해 말했다.
“네가 준 틸론, 잘 썼어. 약속대로 이유는 묻지 않겠지만…… 갚는 건 내 방식대로 할 거야.”
“갚는다고? 아니야. 내게 다시 돌려주지 않아도 돼.”
“내 마음이야. 싫으면 그것까지 조건으로 걸었어야지.”
“……뭐?”
아드리안의 거절에 아랑곳 않고, 미하일은 묘한 미소를 짓기만 했다. 그러고는 흰 장검을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당연히 갚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지. 아드리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미하일이 좀…… 이상해진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미하일과 함께 교내 식당의 테이블로 걸어가면서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저놈이 테이블을 미리 잡는 방법을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지금까지는 왜 귀찮게 내가 테이블을 잡아 오기 전까지 기다렸던 거지?
미하일의 태도가 뭔가 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지만, 정확히 뭐가 달라진 것인지 콕 집어서 말하기는 힘들었다.
테이블이 가까워지자 미하일이 몇 발자국 더 빠르게 걸어가더니 슥- 궁중 예법서에서 본 것과 같은 움직임으로 의자를 빼 주었다. 식당에 앉은 학생들이 그 행동을 보곤 눈을 크게 뜨며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방금 봤어?’ ‘당연하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시선들을 한눈에 받는 주인공, 아드리안은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별 생각 없이 평소처럼 미하일의 맞은편으로 빙 둘러 걸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야, 일부러 그러는 거야?”
“어?”
아드리안은 의자에 앉으려던 몸을 멈칫, 굳혔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의자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이쪽을 불만스레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냐고.”
“…….”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옆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를 하던 학생 하나가 심상치 않은 미하일의 말투를 듣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는 맞은편의 친구에게 “……둘이 싸우나 봐.”라고 작게 속삭였다. 미하일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아드리안은 들을 수 있었다.
하아, 미하일은 답답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말하려던 것이 아닌데, 그는 자신의 배려를 무시하는 아드리안에게 순간 짜증이 확 치솟았었다. 그러나 진짜 아무것도 모른단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아드리안을 마주하니 그 짜증이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아니야. 그냥 앉아.”
미하일의 말에 앉으려다 멈춘 상태였던 아드리안이 와그작 표정을 구겼다.
“뭐야. 말은 끝까지 해야지. 놀랐잖아.”
“별거 아니야. 내가 착각한 거야.”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지금 일부러 자신을 무시한 것이 아니란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곤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 아드리안은 원래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짜증을 내는 것은 역효과만 낼 뿐이었다.
아드리안은 저 혼자 짜증 냈다가 바로 풀린 미하일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착각? 그게 무슨-”
아드리안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드르륵, 식당 직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왔다. 미하일이 직원을 눈짓하는 바람에, 아드리안은 말하려고 뗀 입술을 천천히 다물고 자리에 곧게 앉았다.
……계속 이렇게 이상하게 굴면 좀 곤란한데. 아드리안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B 코스와 뜨거운 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
세리체인 축제 둘째 날, 학생들은 무척 들뜬 표정으로 어제 바사미엘을 휩쓴 소문을 조잘거렸다. 바로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가 개교 이래, 그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펠렌 디프스의 검’을 오늘 새벽에 가져갔다는 소문이었다.
누구는 그 소문이 루머라고 말했고, 또 다른 학생 하나는 루머라는 이야기에 자신이 진짜로 본관 중앙 복도의 전시장에서 그 검이 사라진 걸 보았다고 반박했다. 뜬소문은 점심에 당당히 펠렌 디프스의 검을 허리에 차고 나타난 미하일의 등장으로 삽시간에 정리되었다.
아니, 정리되었다기보다는 더 뜨겁게 끓어올랐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었다.
“왕자님, 즐거운 점심시간 되셨나요?”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에 복도를 걸어가던 미하일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감히 자신의 가던 길을 막아선 학생의 볼일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넥타이 색을 보아, 사 학년 인듯했다. 옆에서 따라 걷고 있던 아드리안 또한 복도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검, 정말 펠렌 디프스의 검이 맞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학생은 눈을 반짝이며 미하일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최대한 예의를 차리려는 말투였으나, 그 말에 숨겨진 검에 대한 호기심은 숨길 수 없었다.
“……맞아.”
학생은 미하일은 퉁명스런 대답을 듣고는 밝게 웃으면서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어물쩍거리며 왕자에게 말을 붙인 진짜 이유를 이어서 덧붙였다.
“그러면…… 혹시 한 번만…… 한 번만 검집에서 꺼내 봐 주실 수 있나요? 다름이 아니라 매년 전시장에 검집째로만 봐 왔는데, 그 검집 안의 검신이 항상 너무 너무 궁금했었거든요.”
그는 ‘너무, 너무’라는 단어를 특히 강조했다.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그 학생을 쳐다보고 있는 미하일을 힐끔 확인했다. 아직 왕자의 성질머리에 대해 모르고 있는 학생인 것 같았다. 아니면 왕자의 짜증을 듣는 것보다 펠렌 디프스의 검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훨씬 간절했거나.
그러나 미하일이 이어서 보인 행동은 아드리안을 놀라게 만들었다.
미하일은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긴 했으나, 눈앞의 학생을 향해 고개를 아주 미약하게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검 손잡이에 턱, 손을 올리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러고는 손에 힘을 주어 긴 장검을 앞으로 주욱 뽑아냈다. 흰 검집에서 마찬가지로 새하얗고 날카로운 빛을 내는 검날이 천천히 존재를 드러냈다. 복도를 걷던 학생들 모두 그 장면에 가던 길을 멈춘 채 “우와아아……” 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처음 그 요청을 부탁했던 학생은 거의 신을 영접한 듯이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당연히 그래야지’라는 표정으로 검을 완전히 뽑아 꺼내 들었다.
“와……. 이거 정말…….”
그는 아직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였다. 미하일은 검을 한 손에 가볍게 들어 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 <세기의 영웅과 검>에 나오는 삽화랑 똑같지?”
“……!”
미하일의 무심한 말에 학생의 표정이 경악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미하일의 검을 보면서 방금 들은 말과 정확히 똑같은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진짜 그 삽화와 똑같네요!”
“맞아. 그런데 <세기의 영웅과 검>에 나오는 이 검의 삽화는 그럴듯한데, 직접 사용해 보니 또 디테일 몇 부분이 조금 다르더라고.”
“그런가요? 전 사실 명검을 휘둘러 본 경험은 없어서요. 어떤 게 다르던가요?”
“책에는 검날이 손잡이부터 칼끝까지 똑같은 너비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아주 미세하게 칼끝으로 가면서 면적이 좁아지거든.”
미하일은 무척 진지한 눈빛으로 펠렌 디프스의 검을 들어 올린 채, 검지손가락으로 너비를 확인시켜 주었다.
“오오…….”
맞은편의 학생은 미하일의 말에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면서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아드리안은 그들을 바라보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하일의 주위에 다른 학생들이 점차 몰려들고 있었다. 다들 검 하나씩은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을 보아 하운즈에 들어간 학생들처럼 보였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과 학생들 무리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학생들과 펠렌 디프스의 검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던 미하일의 눈동자가 곧바로 날카롭게 따라붙었다. 미하일이 아드리안을 부르려고 할 때였다.
“그리고요?”
클럽 하운즈의 학생 중 하나가 질문했다.
미하일은 그 질문을 고민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아드리안이 있던 자리에는 다른 학생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미하일은 고개를 움직여 모든 학생들의 얼굴을 확인했으나, 아드리안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에 눈앞의 학생들 모두 눈을 반짝이며 미하일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손잡이의 세공 방식을 보면-”
미하일은 다음으로 생각했던 차이점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주위에 있는 학생들은 미하일이 이야기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감탄을 했다. 단체로 견학 와 있는 꼴이었다.
아드리안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열성적인 견학 현장에서 완전히 걸어 나와 소란스러운 복도를 천천히 벗어났다.
그의 등 뒤로 미하일과 학생들이 모두 열정적으로 검에 대한 담론을 이어 가는 것이 들려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