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래, 지금 이 대화로 아드리안은 무언가를 결정했다. 그는 손등을 후- 불어 지금 가지고 있는 틸론을 확인했다.
[5,104틸론]
펑! 폭죽 하나가 다시 한 번 아카데미 본관 위로 밝게 치솟았다. 아드리안은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위로 휙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곧바로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미하일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미하일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하일, 그때 그거 생각나?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던 일.”
“응?”
아드리안의 담담한 목소리에 미하일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는 그러면서도 아드리안의 표정을 살피는 시선을 조금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일이라면 그거였다. 파티에 동행하는 조건으로 했던 약속.
“당연히 기억하지.”
“지금 그걸 쓰려고.”
“…….”
지금? 미하일은 조금 몸을 굳힌 채 부탁을 말한다는 아드리안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지금 이 순간에 그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미하일의 귀에는 연신 터지는 폭죽 소리와 그 사이로 호수가 잔잔하게 물결치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손등을 두드려 틸론을 조정했다. 그러고는 슥, 미하일의 바로 앞에 한 팔을 길게 뻗었다.
“이걸 가져가.”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하일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저 손짓은 틸론을 조정하는 것이었고, 가져가라는 뜻은 틸론을 준다는 말일 것이었다.
“……그게 부탁이야? 넌…… 아무래도 부탁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아드리안의 손등을 노려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미하일의 목소리가 어쩐지 차갑게 들렸다.
“네 틸론을 내가 갖는 게…… 그게 어떻게 네 부탁을 들어주는 거야. 나만 이득인걸.”
어두운 호숫가에서도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아니.”
그것은 마치 야생동물의 것처럼 샛노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미하일의 머릿속까지 샅샅이 살펴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내 부탁은…… 지금 네가 이 틸론을 가져가고, 그 이유는 묻지 말아 달라는 거야.”
“…….”
미하일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아드리안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네 틸론을?”
“……”
그리고 이유를 묻지 말라는 게 부탁이라고…….
미하일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그 뒤로 입을 굳게 다물고는 말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미하일의 미간이 와그작 구겨진 채 다시 펴질 줄을 몰랐다.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빨리 가져가라는 듯 손목을 더 쭈욱 내밀었다.
아무래도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끝내 미하일은 양쪽 손을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이게 진짜 네 부탁이라면.”
“응. 그래 주면 고맙겠어.”
미하일은 웃으며 대답하는 아드리안을 향한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손을 뻗었다. 아무리 봐도 저쪽이 손해인데, 이렇게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평균보다 살짝 차가운 아드리안의 손등에 검지손가락을 올린 후, 미하일은 “……진짜 가져간다?”라고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에 아드리안은 작게 웃으며 “가져가라니까. 진짜로.”라고 말했다.
미하일은 잠시간 더 망설이다가 어느 순간 마음먹은 듯 검지손가락을 주욱 길게 움직였다. 곧바로 틸론 계약이 완료되었다는 표시로 미하일의 손등이 작게 반짝였다. 손등을 눈앞에 가져가 그 위에 떠오른 숫자를 확인하던 미하일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였다.
[10,752틸론]
뭐? 지금 내가 가진 게 1만 틸론이 넘는다고?
미하일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오늘 무투대회 우승금으로 받은 틸론을 제하고 계산해 본다면, 조금 전 아드리안이 보낸 것은 5,000틸론이었다.
“…….”
미하일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이내 곧 닫혔다. 방금 들은 부탁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그 움직임을 확인하고는 씨익 미소 지었다. 이유를 묻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잘 지킬 모양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는 미하일의 어깨에 툭, 손을 얹었다.
“넌 그걸 가질 자격이 있어.”
“……그거라니?”
네 5,000틸론을? 미하일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묘하게 구체적인 액수라 더더욱 그의 마음속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아니. 펠렌 디프스의 검.”
아드리안의 담담한 목소리와 동시에 펑! 하고 폭죽 하나가 하늘로 쏘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폭죽의 샛노란 빛깔이 마나 알갱이처럼 반짝이며 반사되는 것을 미하일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이 순간, 요정이 마법을 부린 듯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이렇게 세리체인 축제의 첫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
이른 새벽, 미하일은 본관 중앙 복도의 전시장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곧바로 그를 뒤따라오던 이도 발을 멈췄다.
“……굳이 이렇게 이른 새벽에 와야겠어?”
아드리안이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미하일 옆에 자리 잡았다.
미하일은 그런 룸메이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귀찮아하는 것치고 눈은 초롱초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작은 이랬다.
미하일이 축제 둘째 날 새벽에 일어나, 본관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기숙사 방을 나설 준비를 할 때였다.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아드리안의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린 미하일은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두 개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 아드리안은 잠에서 방금 깨어난 사람답지 않은 맑은 목소리로 “검을 받으러 가게?”라고 물어 왔다. 그는 미하일의 “……관심 있으면 따라오든가.”라는 말에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오는 길 내내 계속 투덜거리긴 했다.
“아무도 없을 때 가져가는 게 편하잖아.”
미하일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날개 문양이 아름답게 새겨진 새하얀 검 하나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가장 윗자리에 전시되어 있었다. 벽에 편하게 등을 기댄 아드리안은 예전에 읽은 적 있었던 장식장 옆에 붙은 설명을 나직하게 소리 내어 읽었다.
“……‘태그에 쓰여 있는 금액만큼의 틸론을 모아 와, 장식장 위에 틸론의 계약을 진행할 손을 올리면 상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아카데미 본관 복도를 채웠다. 어제 세리체인 축제를 즐기느라 밤늦게까지 모여 놀았던 후폭풍인 듯했다. 어차피 축제 기간에는 수업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니 아마 모두 편하게 늦잠을 잘 것이었다.
“…….”
미하일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검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뭐 해. 빨리 꺼내 봐.”
얼마나 대단한 검인지 보자고. 아드리안은 그런 그가 답답했던지 옆에서 재촉했다. 미하일은 그런 그를 슬쩍 노려보고는 호흡을 고르듯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이걸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미하일은 손등을 후- 불어 지금 가지고 있는 틸론을 확인했다.
[10,752틸론]
어제의 일들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듯 그가 가진 틸론은 그대로였다. 그러면…… 미하일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옆의 벽에 기대 있는 아드리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장식장을 검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미하일은 마치 전장에 나서는 기사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장식장에 오른손을 천천히 뻗었다. 오른손의 손가락이 투명한 유리에 닿자, 손등 위에서 빛을 내던 숫자들이 갑자기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미하일의 손이 유리면에 닿는 면이 더 많아질수록 더 크게 요동치며 저들끼리 부딪힐 때마다 밝게 빛을 냈다. 그 빛 덩어리는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 가면서 미하일의 말간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미하일의 손등에서 빛을 내던 숫자가 움직임을 우뚝 멈추었다.
[10,752틸론]
곧이어 그 숫자는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빠르게 내려갔다. 틸론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미하일은 틸론을 가져가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식장 너머의 펠렌 디프스의 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이제 내 것이라니. 쉽사리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손등의 숫자가 딱 [752틸론]까지 내려갔다.
그러자 악주단이 낸 것과 같은 팡파르가 조용했던 바사미엘의 중앙 복도를 크게 울렸다. 그 팡파르가 끝나자마자 장식장 제일 위 칸의 유리가 스윽- 사라졌다. 손바닥을 대고 있던 유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미하일은 슬쩍 손가락을 휘익 움직이더니 장식장 안으로 팔을 조금 더 뻗었다.
탁,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검의 감촉이 느껴졌다. 미하일은 그것을 검대에서 들어 올려 천천히 밖으로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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