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흐음. 내년 수업을 못 할 수도 있다고? 하긴 당연히 사소한 일은 아니겠지. 왕성에서 급히 아카데미의 교수의 의견이 필요한 사안이라면.”
-“네, 정확한 일은 가서 봐야 알겠지만, 대륙 전체에 검은 마나가 다시 솟아나는 문제 때문인 듯합니다.”
-“얼마나 걸릴지도 정해지지 않았나?”
-“되도록 빨리 끝내고 바사미엘로 오고 싶지만…… 다수의 전문가들이 달려들었음에도 지금까지 결론이 안 난 문제를 제가 해결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죠.”
-“그래, 그렇지. 아쉽게 됐네. 정령 학부 수업은 이 학년부터가 본격적인데 말이야.”
정령 학부 교수인 올리비아와 데클레어 교장의 목소리가 덤불 벽 너머에서 들렸다. 아드리안은 검지손가락을 여전히 입술 위에 대고 시선을 덤불 너머로 뚫어져라 고정한 채였다.
‘약초학 수업이 정령 학부의 커리큘럼이었던가?’
아드리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슬쩍 찡그렸다.
미하일은 그 상태로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아드리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교장과 교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것을 듣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것도 몰래. 아주 잠시간만 조용했던 미하일은 이내 멋대로 입을 열었다.
“……왜 굳이 숨어서- 읍!”
턱, 아드리안의 손바닥이 열리려던 미하일의 입술을 덮었다. 그는 매우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하라는 부탁을 듣지 않는 미하일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쉬이- 좀 조용히 하래도. 아드리안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마가 닿을 만큼 바짝 다가온 아드리안 때문에 미하일은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뻣뻣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덤불 너머의 인물들은 평범한 이들이 아니었다. 수상한 인기척에 곧바로 데클레어 교장의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녀는 높은 덤불 벽을 슬쩍 위아래로 훑더니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젠장, 벌써 들켰군.
아드리안은 데클레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상황 판단을 끝냈다. 그러고는 미하일의 입술을 꾹 누르던 손을 떼어 내어 소매에 대강 닦더니 몸을 바로 세웠다. 미하일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씩씩대며 아드리안의 손바닥이 닿았던 입술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렀다. 얼마나 세게 문지르는지 괜히 아드리안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내 손이 그렇게 더러워?”
아드리안은 힐끔 자신의 손바닥을 확인하곤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봐도 깨끗하기만 했다. 그런 아드리안을 향해 미하일은 실컷 문지른 탓에 붉어진 입술을 열었다. 아직도 아드리안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입술 위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해. 멋대로 손대지 말라고.”
그때였다.
아드리안의 고개가 왼편으로 휙, 돌아갔다. 데클레어 교장의 인기척이었다. 그녀는 덤불 반대편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는 올리비아 교수를 돌려보낸 후, 확인을 위해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교장은 한창 세리체인 축제를 즐기고 있어야 할 학생 두 명이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곤 입을 열었다.
“미하일 그리고 아드리안. 중앙 정원에서 뭐 하는-”
데클레어 교장의 시선이 미하일의 붉어진 입가로 움직였다가, 우뚝 멈췄다. 미하일의 묘하게 붉어진 뺨과 잔디와 흙이 묻은 교복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멀리서 들린 그들의 대화도 약간 이상했다. 손대지 말라고? 데클레어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회색 머리카락이 살랑 움직였다. 어디에 손대지 말라는 말이었지?
“……아.”
단둘이 중앙 정원에서 비밀스레 만나고 있는 거라면.
미하일과…… 아드리안이 그냥 친구가 아니었나? 어릴 적부터 지켜봐 온 미하일의 아주 사적인 비밀을 알게 된 데클레어의 입이 경악으로 천천히 벌어졌다. 제자의 연애 소식 따위 전혀 궁금해한 적 없었는데!
“음…… 방해해서 미안하다. 난 비켜 줄게.”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교장의 말에 들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뭘 방해했다는 거야?’ ‘……글쎄.’
그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표정만으로 대화를 했다.
“……그래도 세리체인 축제의 첫날이니, 늦지 않게 본관으로 오고. 그럼.”
덤불 벽 반대편에서 몰래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침입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볼일은 끝이었다. 데클레어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서 나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아드리안은 교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년에는 올리비아 교수님의 수업이 없을지도 모른대.”
“그래? 전혀 관심 없는 소식이네.”
미하일은 심드렁한 얼굴로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올리비아 교수의 수업이 없다는 사실이 아드리안에게는 무척 중요한 사안인 듯했다. 아드리안은 얘기를 엿듣고 난 후부터는 어딘가 멍한 표정이었다.
***
휘익!
어슴푸레한 저녁, 아카데미 본관을 배경으로 폭죽 하나가 길게 포물선을 올리며 치솟았다. 그 불빛 한 줄기는 어느 정도 상공에 올라가자 펑! 하고 큰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것과 동시에 폭죽은 여러 갈래로 나뉘며 하늘 전체를 가득 채울 것처럼 펑! 펑! 펑! 하고 연달아 터졌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인가 본데.”
아드리안은 아카데미 호수의 나무 밑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저녁부터 무슨 파티를 한다고 들었으나,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건 미하일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미하일, 어설프게 숨지 말고 나와서 앉아.”
그는 피식 웃고는 아무도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호숫가를 바라보며 옆자리를 툭툭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 손짓에 나무 뒤편에 숨어 있던 미하일이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쓸데없이 기척에 예민해서는.
미하일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뒤에서 걸어 나와 아드리안에게 걸어갔다.
“……숨은 거 아니거든.”
“그러면 그렇다고 치자고.”
아드리안의 무덤덤한 대꾸가 곧바로 들려왔다. 펑! 펑! 미하일이 아드리안 옆에 자리 잡는 동안에도 어두운 하늘을 색색의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미하일에게 힐끗 시선을 한번 보낸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교복이야? 오늘 파티는 사복이라던데. 무투대회 우승자가 이렇게 밖에 나와 있으면 어떡해.”
미하일은 대답 없이 심드렁한 얼굴로 달빛이 비치는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아드리안도 교복을 입고 나와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이놈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넌?”
“나? 난…… 알잖아? 그런 파티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래. 그러면 나도 그렇다고 쳐.”
퉁명스런 대답이었다. 둘은 잠시간 아무 말도 없이 잔잔하게 움직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장면처럼 보였으나, 사실 미하일은 호수보다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힐끔대기 바빴다.
또 그 표정이었다. 눈앞의 모든 일들에 전혀 관심 없는, 평소의 따뜻한 눈빛은 꾸며 낸 가짜라는 것을 알려 주는 무심한 표정. 미하일은 입술을 한 번 감쳐물고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의 솔직한 대답이 듣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그것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공존했다.
“재미있긴 해?”
슥,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미하일의 얼굴 위로 움직였다. 이상한 질문이었다.
“미하일, 질문을 하려면 알아듣게 제대로 해야지.”
“아카데미를 다니는 게 재미있긴 해? 파티도 그렇고 무투대회도 그렇고, 넌 식물 키우는 것 이외에는 전혀 관심 없잖아.”
“……아까 정원에서 나더러 이상하다고 한 이야기의 연장선인가 봐?”
아드리안의 시야에 진지한 미하일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표정을 마주한 채, 아드리안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펑!
폭죽 하나가 본관 쪽에서 또 터졌다. 그러나 그 커다란 소리에도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본관 쪽에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폭죽이 터질 때마다 미하일의 맑은 눈동자 안에서 빛 알갱이가 밝게 빛나며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질문이 뭐였지? 재미있기는 하냐고? 아드리안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갔다. 전혀. 전혀 재밌지 않았다. 그러나 미하일에게 곧이곧대로 말한다 한들 이 상황이 재미있어질 리가 없었다. 내년에는 고대하던 약초학 수업 덕에 그나마 조금 흥미로울 참이었다. 그런데 약초학 수업이 없어진다고? 그것 때문에 겨우 꾹 눌러 참고 있었던 지루함이 빠르게 아드리안을 덮쳐 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잔뜩 냉소가 걸렸다.
“만약에 지금 모든 일들이 무언가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거라면 말이야.”
“…….”
미하일은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한 아드리안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것이야말로 좀처럼 잘 내보이지 않는 그의 속마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의 표정에서 이 상황을 가볍게 모면하려고 대강 뱉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무투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면. 그리고 그걸 네가 경기장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
아드리안의 단호한 음성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너도 재미가 없었을 거야.”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게 무슨 소리지? 허무맹랑한 운명론이 갑자기 왜 나와.”
미하일이 아드리안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질문에는 대답을 않고 미하일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할 뿐이었다.
미하일은 조금 더 고민한 후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정해져 있다고? 도대체 누가 정하는데?”
“그건 모르지. 그런데 여기서 ‘누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건 이미 모든 게 정해져 있다는 거야.”
“그게 제일 중요한 것 아닌가? 내 운명을 누가 정하겠어? 내가 정하는 거지.”
그래, 미하일이라면 저렇게 대답할 거라 생각했었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니까, 그런 네 마음도 누군가 이미 정해 놓았다고.”
“……또 이상한 이야기.”
피식, 미하일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드리안다운 진지한 질문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안 그래도 요즘 조수로 돕고 있는 카일의 연구 주제가 오르디나스였으니, 매일같이 둘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것이 저런 운명론일 거였다.
그동안 매일 저런 고민을 그렇게 골똘히 했던 걸까? 미하일은 그제야 실마리가 풀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 주제에 속으로는 이런 철학적인 고민을 한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귀여워 보였다.
……비슷한 눈높이의 다 큰 룸메이트가 귀엽게 느껴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과했다.
“뭐, 맞아. 네겐 그냥 이상한 이야기겠지.”
얼굴을 굳히고 진짜 속마음을 잠깐이나마 내비쳤던 아드리안은 금세 표정을 풀었다.
그래, 지금 이 대화로 아드리안은 무언가를 결정했다. 그는 손등을 후- 불어 지금 가지고 있는 틸론을 확인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