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캐서린이 소환한 모래 드래곤은 드넓은 경기장을 절반 정도 차지하는 크기였다. 취익, 그것의 콧바람에 경기장의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듯 움직였다. 그 앞에 검 한 자루를 들고 서 있는 미하일은 그것을 바라보며 잠시간 침묵했다.
“어때? 여기서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캐서린은 손가락을 앞에 뻗은 채 미하일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활성화된 마나에 어두운 머리카락이 부웅 떠올라 있었다. 미하일은 이내 검을 다시 한 번 고쳐 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고는 호승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캐서린 앞의 모래 드래곤이 미하일의 목소리에 커다란 머리를 움직여 그쪽을 응시했다.
“이제야 좀 재밌어지려는 참인데.”
미하일은 캐서린과 모래 드래곤을 경계하다가 힐끔 관람석을 확인했다. 아드리안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아드리안의 반짝이는 금발 머리카락 덕분에 이렇게 여러 학생들과 섞여 있어도 단번에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드리안 앞에서 꼴사납게 항복하는 일은 스스로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흠, 캐서린은 모래 드래곤 앞에서도 여유를 부리는 미하일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우선 잃었던 점수를 빨리 만회해 볼까?”
캐서린은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모래 드래곤이 집채만 한 몸집을 일으키며 쿵-! 하고 경기장 바닥을 발로 내리 찍었다. 드래곤은 커다란 입을 벌리더니 미하일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고는 그를 집어삼키듯 커다란 입을 콱 다물었다. 관람석에 앉은 아드리안의 귀에 헉, 하고 학생들의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하일은 모래 드래곤의 입을 피해 옆으로 굴렀던 몸을 일으켰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드레곤은 빠르게 진로를 틀어 미하일을 향해 팔을 뻗어 왔다. 미하일은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가!”
쇄액! 모래 드래곤을 팔에 미하일의 검격이 먹히면서 모래가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검이 지나간 자리의 모래가 푸스스 흩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모래 병사와 같은 방식이군? 캐서린이 만들어 낸 모래로 만들어진 소환수들은 상처를 수복하긴 했지만 시간이 조금 걸렸다. 미하일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이 모래 드래곤을 격파할 방법을 고민할 때였다.
“미하일!”
관람석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아드리안의 목소리였다. 미하일은 그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쳐들었다. 회복한 드래곤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원형 경기장 내부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칫, 미하일은 속으로 혀를 차며 빠르게 시선을 올렸다. 피냐타가 미하일에게 바짝 다가왔다.
아드리안은 경기장의 시간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
전쟁도 아니고 고작 아카데미 안에서 이뤄지는 경기일 뿐인데 내가 왜 이랬지?
저도 모르게 나간 외침에 관람석에 앉은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향해 있었다.
열심히 보다보니 순간 몰입한 탓이었다. 아드리안은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옆자리에 앉은 한스의 묘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네! 확실한 유효타입니다.”
피냐타의 판정에 관람석의 학생들이 손뼉을 쳤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허점을 내보인 적 없던 이번 무투대회 최고의 루키에게 드디어 적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특히 한스는 그 이야기에 “캐서린! 잘했어!”라고 크게 외쳤다.
“그러면 캐서린이 일 점을 획득해서 두 참가자가 동점이 됩니다!”
미하일의 칼이 가까스로 모래 드래곤의 발톱을 막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미하일의 목에 스칠 거리였다. 피냐타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조금 전 캐서린에게 물었던 것과 동일한 질문을 했다.
“209번, 항복하시겠습니까?”
“안 합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피냐타의 마이크를 통해 경기장을 울렸다. 피냐타는 “좋아요. 그럼 십 초 뒤에 다시 경기가 재개됩니다.”라고 말하며 단상을 다시 경기장 위쪽으로 움직였다. 미하일은 십 초 뒤 시간 마법이 해제되자마자 고개를 최대한 깊게 숙여 발톱을 피했다.
촤악- 뺨부터 관자놀이에 뜨끈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시야에 방해가 된다. 미하일은 그것을 소매로 거칠게 스윽 닦으며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다시 날아오는 드래곤의 발톱에 검을 휘둘렀다. 그에 미하일의 피가 묻어 묻은 발톱이 스릉 하고 툭 땅에 떨어졌다.
그것을 확인하고 미하일은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눈을 꾹 감았다. 검날은 바닥을 향한 채였다.
“……뭐야?”
캐서린은 갑작스런 미하일의 돌발 행동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캐서린이 모르는 어떤 특별한 검식이었거나…… 아니면 마나 훈련인 것 같았다. 그런데 마나 훈련을 왜 지금?
캐서린의 고민은 짧았다. 무슨 검법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미하일이 사용하는 것은 검이었고, 이쪽의 모래 소환수에게 검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다. 캐서린은 빠르게 모래 드래곤을 미하일이 서 있는 곳으로 움직여 커다란 입을 벌리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미하일은 눈을 감은 상태였다.
이걸로 일 점 더! 캐서린의 명령에 맞추어 모래 드래곤이 미하일을 한 입에 삼키려는 순간이었다. 번뜩, 미하일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그의 새빨간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빛을 냈다. 그러나 곧이어 모래 드래곤의 입에 삼켜져 미하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캐서린의 고개가 휙, 피냐타가 서 있는 단상으로 향했다. 그는 단상에 선 상태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경기장 저 끝에 서 있는 캐서린과는 달리 공중에 자리 잡은 피냐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 있었다. 피냐타의 묘한 미소에 캐서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왜 멈추지 않지?’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청량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캐서린의 시선이 모래 드레곤의 입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푸쉭, 모래 드래곤의 입가로 진흙 한 덩이가 철퍽이며 흘러내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드래곤의 얼굴이 천천히 진흙이 되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미하일의 멀쩡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마치 커다란 물방울 안에 들어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탁! 그가 가볍게 경기장 바닥으로 착지하자, 머리를 잃은 모래 드레곤의 몸뚱이가 버둥거리며 발을 옮기다가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경기장에 그 집채만 한 몸집을 눕혔다.
“……끝까지 마법은 안 쓰려 했는데.”
미하일은 작게 투덜거렸다. 그의 투덜거림에 지금껏 잠자코 경기를 지켜보던 하운즈에서 우우우! 하는 야유가 크게 들렸다. 정반대로 앰버들은 눈을 반짝이며 왕자의 놀라운 마법 실력을 감탄했다. 미하일은 관람석의 반응을 뒤로한 채, 빠르게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캐서린 앞까지 도착했다. 그녀의 앞에는 이제 모래 드래곤도, 모래 병사도 없었다.
그의 검날이 번뜩이며 캐서린의 목 앞에 도착할 때였다. 다시 한 번 경기장의 흐름이 비정상적으로 우뚝 멈췄다.
“이렇게 이 점입니다. 38번, 항복하시겠습니까?”
피냐타의 물음에 캐서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은 멈춰 있지만, 시간 마법이 풀리는 순간 저 검날은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목에 치명상을 날릴 것이었다. 그녀는 분하다는 듯이 이를 악물며 미하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했다. 그러나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항복합니다.”
조용한 경기장에 캐서린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시간 마법이 풀릴 때를 상상하며 검을 날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던 미하일의 시선이 패배를 인정하는 캐서린의 얼굴을 확인했다.
당연히 계속할 줄 알았는데? 그는 생각보다 냉철한 캐서린의 상황 판단 능력에 속으로 미소 지었다. 멋모르고 마법을 풀었다면 분명히 그녀는 치명상을 입을 것이고, 그 정도 상처를 입은 마법사는 반격을 할 수 없이 곧바로 나머지 일 점을 빼앗길 것이 뻔했다. 여기서 한 번 더 경기를 재개하는 것은 피차 시간 낭비였다.
“그럼…….”
캐서린의 항복 선언에 관람석의 모두가 피냐타가 다음으로 할 말을 예상하고는 빠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길고 길었던 무투대회의 우승자가 나왔습니다!”
캐서린은 피식, 웃으며 미하일의 손을 맞잡았다. 무투대회에서 일등을 하지 못한 것은 아까웠지만…… 뭐, 이등 정도면 충분하지.
퍼엉! 우승자를 밝히며 경기장 중심에서 커다란 폭죽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마법으로 쏘아 올린 폭죽은 맑은 하늘 위에 떠오른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라는 글자를 환하게 비추었다가, 어느 순간 흩어졌다. 이후로도 여러 색깔의 폭죽이 여러 번 쏘아 올려졌다.
피냐타는 폭죽을 배경으로 빠르게 단상을 움직여 관람석 전체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그는 경기장 중앙의 미하일 바로 옆에 멈춰 서더니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우승자에게 지금 바로! 우승 상금 5,740틸론이 입금되었습니다!”
맑은 멜로디와 함께 미하일의 머리 위에 있던 숫자가 빠르게 촤르륵 올라갔다. 그러다가 우승 상금인 5,740틸론 표시에서 멈추어 환하게 빛을 냈다.
와아아!
학생들이 환호했다. 누군가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고, 또 다른 학생은 엄청난 경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 벅차오른 듯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내 말이 맞지? 이길 거라고 했잖아!
미하일은 잔뜩 신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 이 순간 이 느낌을 함께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순간을 위해서 그 사람을 본선 대회에 초대했었다. 미하일의 눈동자가 관람석에 앉은 아드리안을 향해 휙 움직였다. 그러자 이제는 익숙한 반짝이는 금발 머리가 미하일의 시야를 채웠다.
미하일이 눈을 반짝이며 아드리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을 때였다. 아직 날이 밝아 눈을 가늘게 좁혀 떠야 멀리 관람석에 앉아있는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린 미하일이 경기장 안에서 우뚝 몸을 바로 세웠다.
미하일은 그 상태로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
관람석에 앉은 그의 표정은…….
아드리안의 얼굴에서는 놀랍도록 아무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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