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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98화 (98/184)

98화

조용한 오르디나스 클럽실에 깃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가득 찼다. 그들은 점심도 식당에서 가볍게 포장해 와서 먹으며 오르디나스 클럽실에서 연구에 집중했다. 테이블 위는 양피지들과 마시다 만 찻잔 그리고 간식으로 어지러웠다.

“그런데.”

카일이 불쑥, 말을 걸었다. “네, 말씀하세요.” 아드리안은 쓰고 있는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야…… 졸업이 코앞인 사 학년이라 축제날에 여기에 박혀 있다 쳐도, 너는 왜 안 놀아? 첫 세리체인 아니야?”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서요. 저는 이게 좋습니다.”

“그래?”

아드리안의 대답에 카일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히 미하일이 아드리안을 좋아하는 걸로 보였는데. 뭐, 당사자인 아드리안은 모를 수도 있지만.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본선에 진출한 미하일이 당연히 아드리안을 경기장에 초대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미하일이 오늘 본선에 초대 안 했어?”

“…….”

멈칫, 카일의 물음에 물흐르듯 빠르게 움직이던 아드리안의 깃펜이 단번에 멈췄다. 본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들어 맞은편의 카일의 얼굴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오늘이 아니어라!

“……설마, 오늘이 무투대회 본선날입니까?”

“맞는데. 지금까지 모르고 뭐 했어?”

아드리안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교내 방송이 이런 중요한 일에는 방송은 안한다고? 아드리안은 벌떡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끼익- 그의 의자가 갑자기 밀려나며 불쾌한 마찰음이 들렸다.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겠죠?”

카일은 아드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힐끔 클럽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턱을 긁으며 말했다. 벌써 오후 두 시였다.

“……시작은 한참 전에 했을걸?”

젠장, 아드리안은 교복 재킷에 넣어 둔 관람권을 손으로 두드려 확인하고는 “내일 다시 올게요.”라고 말했다.

***

……아직도 안 왔잖아.

미하일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 맞은편의 마도구가 보여 주는 관람석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경기장은 열기로 화끈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화면으로는 가장 앞줄 학생들의 표정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제일 비싼 관람권을 구매했거나, 본선 진출자가 선물한 관람권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 사이에 덩그러니 비워져 있는 의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진짜 안 온다고?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마도구가 비춰 주고 있는 화면이 휙 움직였다. 단상으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럼…….”

끼익- 음량을 조절하려는 듯이 마이크의 소음이 커다란 경기장을 휩쓸었다. 그 소리에 관람석에 앉아 서로 이야기하던 학생들의 말소리가 단번에 멎었다.

본선 진출자들이 앉아 있는 대기실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무투대회에서 대망의 결승을 치를 주인공들을 불러 볼까요?”

철컥, 미하일은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가 다시 밀어 넣었다. 아드리안이 결국 경기장에 오지 않은 것은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우선 그가 집중해야 할 것은 이 무투대회였다. 그의 머리 위에서 숫자 209가 밝게 빛나며 휙, 휙 돌아가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웬만한 학생보다 키가 큰 아드리안은 최대한 다른 학생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으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관객으로 꽉 찬 관람석 중앙으로 걸어갔다. 12, 11, 10. 아드리안은 눈으로 번호를 훑으며 빠르게 가지고 있는 관람권의 좌석을 찾았다.

“아드리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안 오는 줄 알았잖아!”

바로 옆 좌석에 한스가 앉아 있었다. 아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좌석에 털썩 몸을 던졌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에 모든 힘을 다 쓴 것 같았다. 경기장을 보아하니 경기 하나가 끝난 후 쉬는 시간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한숨 돌렸군. 아드리안은 한스에게 가볍게 인사하며 궁금한 부분을 질문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많이 늦었나요?”

“당연하지! 미하일의 본선 첫 경기는 진작에 끝났어. 심지어 그 뒤로 한 경기 더 이겼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겼는데도 이쪽 관람석을 아주 죽일 듯이 노려보던데.”

윽, 다시 떠올려도 소름 돋아. 한스는 아드리안에게 이야기를 하며 몸을 살짝 떨었다. 미하일의 그 차가운 눈빛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아드리안은 그런 한스의 이야기에 쯧, 하고 혀를 찼다. 이 자리가 비어 있는 게 미하일도 보이나? 아드리안은 가볍게 뒷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그래도 이제라도 와서 다행이지. 이게 마지막 경기거든.”

“마지막이요?”

“오늘 본선에서 열 명이 경기를 한 번씩 치렀고, 다섯 번의 경기에서 패배한 참가자는 경기장을 나갔어. 그리고 세 번 더 경기를 치러서 이제 남은 건 단 두 명이야. 이제 캐서린이랑 미하일이 결승에서 싸울 차례라고!”

한스는 마치 자신이 본선 경기에 나가는 것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라고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끼익- 음량을 조절하려는 듯이 마이크의 소음이 커다란 경기장을 휩쓸었다. 그 소리에 관람석에 앉아 서로 이야기하던 학생들의 말소리가 단번에 멎었다. 누군가 긴장감에 휩싸인 채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이쪽까지 들렸다.

“올해 무투대회에서 대망의 결승을 치를 주인공들을 불러 볼까요?”

우와아아!!

경기장 중앙의 단상에 선 피냐타가 발랄한 목소리로 경기 시작을 알렸다. 관람석의 학생들이 빠르게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며 그 시작을 열렬하게 축하했다.

스윽- 말가면을 쓴 피냐타가 한 팔을 공중으로 크게 뻗었다. 마법을 쓴 듯 그의 머리 위쪽에 경기장 위쪽에서도 보일 만큼 커다란 공이 둥실 떠올랐다. 그 안에는 두 개의 흰 공이 들어 있었다.

‘두 개밖에 안 남았는데 뭐하러 뽑는 거야. 이미 정해져 있잖아.’

아드리안은 투덜거렸으나, 피냐타는 무투대회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고 이어 가고자 팔을 크게 들어 올려 커다란 공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이 큰 목소리로 “10!”이라고 외쳤다. 참가자를 뽑는 카운트다운이 이어질수록 그 안의 흰 공들은 서로 먼저 나가려고 아우성치듯 세차게 부딪쳤다.

피냐타는 커다란 공을 가볍게 컨트롤해서 안의 공들이 더 잘 섞이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관람석에 앉은 학생들이 카운트다운에 더욱 열렬히 동참했다.

덜그럭! 흰 공 하나가 구멍에 걸렸다가 데굴데굴 굴러 경기장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에 질세라 나머지 공 하나도 곧바로 뒤따라 바닥에 떨어졌다. 피냐타는 바닥에 떨어진 공을 확인 한 후, 씨익 미소 지었다.

“이번 무투대회 진짜 재미있네요! 이 둘이 맞붙는 모습을 결승전에서 보게 되다니! 이 참가자, 앰버에서 올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선수죠. 작년 무투대회에는 참가조차 않았지만, 올해 이 대회에 등장해서 모든 마법사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피냐타의 이야기에 학생 모두가 예상한 참가자였는지 와아아아! 하고 함성을 질렀다.

“38번 캐서린 에스테반!”

피냐타가 함성에 호응하듯 38번이 적힌 흰 공을 들어 올리더니 객석을 향해 흔들었다. 뒤따라 학생 모두가 입을 모아 이름 하나를 외쳤다.

캐서린! 캐서린!

옆의 한스가 눈을 빛내며 팔을 흔들어 댔다. 캐서린 에스테반도 결승에 왔구나. 아드리안이 무심한 얼굴로 환호성으로 들끓는 경기장을 둘러볼 때였다. 피냐타가 나머지 흰 공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도구가 날아오더니 공에 적힌 번호를 커다란 중계 화면에 꽉 차게 보여 주었다.

당연하게도 그 숫자는 209이었다.

“그리고…… 바사미엘의 루키! 209번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입니다! 두 참가자 모두 대기실에서 나와 주세요!”

관람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윽고 뚜벅뚜벅, 원형 경기장의 양 끝에서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두 참가자의 모습이 보이자 응원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관람석이 움직이며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경기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미하일의 밝은 은발이 햇빛에 반짝였다.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미하일이 있는 경기장의 왼편만 훑고 있을 때였다.

번뜩, 그의 붉은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이쪽을 향했다. 미하일의 눈동자가 타오르기라도 하듯 울렁이고 있었다. 마침 그쪽을 바라보던 아드리안의 눈이 가늘게 좁혀 들었다.

늦게 왔다고 화내는 거냐, 속 좁은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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