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12. 자체 퇴장
혈기 넘치는 학생들끼리 서로 실력을 겨룬다니, 저 나이대에는 싸우지 말고 가만있으라 해도 말을 듣지 않을 시기였다. 그러니 무투대회에 대한 이야기로 이렇게 온 아카데미가 시끄러울 만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피냐타가 상쾌한 열두 시를 알립니다! 벌써 다음 주면 세리체인 축제라구요. 특히 오늘 발표된 무투대회 본선 진출자 리스트가 아주 재미있던데요. 물론 신문 구독자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10틸론이 아까워 신문 구독을 하고 있지 않은 학생들을 위해서 제가 기꺼이 알려 드릴게요.”
활기찬 점심시간, 피냐타의 교내 방송이 비어 있는 기숙사 건물 전체를 울렸다. 곧이어 열 개의 이름이 차례로 호명되었다. 이미 교내 신문에서 읽었던 내용이라 아드리안은 심드렁하게 기숙사 침대에 누워 독서 중이었다.
“우리 앰버의 숨겨진 보물 캐서린 에스테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무투대회를 휩쓸고 있는 루키, 미하일 왕자님까지! 이렇게 열 명이 최종 선발되어 본선 진출 확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본선에서는 예선 경기와는 차원이 다른 숙련자들의 결투를 응원할 수 있기를 바랄게요!”
교내 방송은 언제나 그랬듯이 멋대로 시작해서 멋대로 끝났다.
아드리안은 가볍게 책장을 넘기며 옅게 미소 지었다. 미하일이 본선에 진출할 것이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교내 방송이나 신문처럼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소식을 듣고 나니 확실히 실감이 났다.
“예선 경기는 애들 장난이라더니…… 그래도 실력은 괜찮나 보지?”
전에 상의를 벗었을 때 드러난 근육이나, 훈련에서 움직이는 자세를 봤을 때에도 꽤 그럴싸하긴 했다. 과연 아직 어리긴 해도 용사의 싹이다 이거지?
“물론 이쪽의 실력을 따라잡으려면 모자라겠지만.
아드리안은 스스로 말하고도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었다. 고작 인간과 드래곤의 실력을 비교하기에는 시간 따위로는 메우지 못할 간극이 있지 않은가!
“…….”
이전에도 분명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드리안은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는 억겁의 시간 동안 쌓아 온 기억을 잠시간 더듬었다. 사소한 것 하나 쉽게 잊기 힘든 기억력을 가진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드리안은 곧이어 이 기시감의 원인을 찾아냈다.
아하, 카를로였군. 아드리안은 ‘특출난 능력이 있는 인간을 만나면 언제나 이런다니까.’라고 생각했다. 카를로 또한 미하일의 나이 정도쯤에는 동시대 검사들의 실력을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다.
다시 책을 읽기 위해 다시 집중하려는 아드리안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가 있었다. 밝은 은발 머리에 마치 그의 눈동자의 색처럼 새빨간 피가 투둑,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그 회상에 아드리안의 책장을 넘기려던 손가락이 멈칫 굳었다. 에이, 괜히 몰입만 깨졌네- 그는 미간을 살풋 찡그리며 읽던 책을 턱, 하고 덮었다.
그때였다.
기숙사 방문이 벌컥 열리고, 소문의 루키가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미하일은 들어오자마자 뭔가를 휙, 던졌다. 아드리안은 누워 있던 상태로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물체를 날렵하게 낚아챘다. 전에 자신도 편지를 이렇게 전달한 적이 있었으니, 전달 방식이 싸가지 없다며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뭐야?”
“저번에 말했던 거.”
응? 말했던 거라니. 이상한 대답에 아드리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낚아챈 종이를 얼굴 앞에 가져왔다. 화려한 금박 장식이 되어 있는 두꺼운 종이였고, 오른쪽 끝에는 쉽게 자를 수 있도록 칼선이 새겨져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를 입으로 소리 내어 읽었다.
“……‘세리체인 무투대회 본선 관람권’.”
“준다고 했잖아.”
미하일은 교복 재킷을 벗으며 가볍게 씨익 미소 지었다. 그는 스스로 내걸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뿌듯했다.
A열 9번 중앙 좌석, 아드리안은 관람권 왼쪽 아래에 적혀있는 번호를 확인했다.
“좋은 자리잖아?”
표를 유심히 살펴본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숫자를 보아하니 제일 앞자리 표였다.
“당연하지. 꼭 보러 와. 어차피 너는 축제 때 할 일도 없잖아.”
“……넌 항상 뒤에 안 붙여도 될 말을 해.”
“왜. 혹시 따로 할 일 있어?”
미하일이 재킷을 정리하며 눈을 치켜떴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아드리안은 멋쩍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없지.”
기분이 나쁜 것과 별개로 언제나 미하일이 말한 것이 사실이긴 했다.
“뭐, 알았어. 보러 갈게.”
“그래. 잘 생각했어.”
아드리안의 대답에 미하일이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화가 끝난 후 미하일은 욕실로 빠르게 걸어가 문을 탁 닫았다. 그러고는 문을 닫자마자 입을 꾹 다문 채로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드리안에게서 알겠다는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 벌써 대회에서 승리한 기분이었다.
아, 방금 경기를 보러 온다는 대답에 좋아하는 티는 안 났겠지? 미하일은 다급하게 고개를 위로 휙 들어 올려 욕실의 거울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멍청한 표정의 은발 머리 남자가 하나 있었다.
묘하게 얼굴이 뜨끈한 감이 있었으나 티가 날 정도로 붉지는 않았다. 미하일은 손등으로 천천히 자신의 뺨을 스윽 문질렀다.
다행이었다.
***
“야! 이건 여기에 놔두면 안 되는데? 누구 거야!”
학생 하나가 누군가 입구 근처에 놔둔 상자를 보고는 크게 소리쳤다. 상자에 천 조각과 가위, 종이들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축제 준비용인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의 외침에 누군가 빠르게 그쪽으로 뛰어왔다.
“미안, 미안. 잠깐만 여기에 두려고 했는데. 다른 곳으로 옮길게.”
“이런 건 어제 다 정리했어야지. 축제날까지 정리가 안 되면 어떡해? 빨리 옆으로 옮겨.”
“응, 응.”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상자를 입구에서 빠르게 치웠다.
바야흐로 세리체인 축제날이었다.
바사미엘 전체가 축제에 걸맞게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일부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는 장식 마법이었으나, 거의 대부분 학생들의 사비를 들인 실제 장식품이었다. 각 사교 클럽의 학생들은 클럽실을 다른 곳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많은 골드를 써서 외부에서 물건들을 들여왔다.
특히 예술 학부 사교 클럽인 빈야드는 축제날만 기다려 왔다는 듯이 온갖 아름다운 작품들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클럽실 앞을 지나치자 매혹적인 멜로디가 방 문 앞까지 들려왔다. 마법으로 작은 요정 모습의 안내원을 만들어 전시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험을 제외한 모든 것에 열성적인 바사미엘 학생들다웠다.
그건 연금 학부와 정령 학부의 사교 클럽 오르디나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취향이 고약한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축제날조차도 평소처럼 카일의 연구를 도우러 오르디나스 클럽실에 온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그는 커다란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형형색색의 식물들과 기암괴석과 마주했다.
이런 걸 다른 클럽의 학생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고약하다니! 여기 봐. 어제서야 겨우 구해서 오늘 새벽에 들어온 야광 나무야.”
아드리안의 신랄한 감상평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카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야광 나무를 소중하다는 듯이 끌어안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여전히 못미더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이, 빨리 불 다시 꺼 봐. 이걸 자랑하려면 어두워야 하잖아.”
“에이 씨. 오늘 몇 번이나 불을 꺼야 해. 이럴 거면 그냥 축제 때는 불 끄고 지내자니까.”
“빨리, 빨리! 응?”
벌써 몇 번이나 저 야광 나무를 자랑했나 보군. 아드리안은 무심한 얼굴로 테이블의 의자를 끼익, 잡아 빼고는 앉았다.
“……별로. 안 봐도 되는데요.”
그 말에 불을 켜 달라고 부탁받은 학생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안 봐도 된다니! 이 귀한 나무를 안 보고는 못 배길걸? 그는 신입생에게 이걸 보여 주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라 몸을 빠르게 소파에서 일으켜 조명 버튼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딸깍, 버튼을 눌렀다.
환했던 오르디나스 클럽실이 단번에 어두워지고, 테이블 바로 옆의 나무의 푸른 형광빛만이 그들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짠!”
“짜잔!”
그들이 양팔을 뻗으며 뿌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드리안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광 나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옛날에는 숲의 길가에 심어 가로등을 대신 할 정도로 흔했던 나무였다.
“이제 불 켜 주세요. 글자가 안 보입니다.”
아드리안의 말에 카일이 “응…….” 하고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누구의 연구를 돕고 있는 것인지 모를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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