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차가운 표정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카일 선배의 연구 주제가 전부 검은 마나에 관한 것은 아니야. 오르디나스와 검은 마나 간의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것 같다는 게 연구 주제거든. 네가 만약 물어봤다면 바로 말해 줬을 거야. 아직 확실하게 결론이 나온 게 아닌데 먼저 말하긴 좀 그렇잖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드리안의 대화를 듣던 카일이 윽, 하고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아직 결론이 없는 건 맞지만…… 직접 들으니까 상처다.”라고 중얼거렸다.
미하일은 담담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마주친 미하일의 눈동자 한 가득 배신감이 느껴졌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갔다.
아드리안은 ‘이게 사실인데 좀 구차한 변명처럼 들리나?’라는 생각을 했다. 미하일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아드리안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진 않지만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말 안 해 줘서 미안. 네가 검은 마나를 연구하는 것에 관심 있어 할 줄은 몰랐어.”
미하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저 사과만 들어보면 이쪽이 연구 주제를 못 들어서 안달 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화났다기보다는…… 됐어.”
여전히 답답한 느낌이었다. 미하일은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휙 돌렸다.
그때였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카일이 입을 뗐다.
“그래서, 답사를 같이 간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만약에 같이 가는 거면 알려 줘야 할 게 산더미라, 빨리 알려 주는 게 서로 편해.”
“아, 그런가요? 힐데케 절벽이었죠?”
“응. 솔직히 말해서 초보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은 아니야. 워낙 산세가 험준하고 가파르거든. 그래도 오르디나스에 대한 연구를 증명하려면 거기가 최적이야. 세리체인 축제가 끝나자마자 바로 출발하려고.”
험준한 절벽이라.
거기로 답사를 나간 학생 하나가 죽는 것쯤이야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겠군. 아드리안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일 정보였다.
“이왕이면 아드리안 네가 같이 갔으면 좋겠거든. 시약만 받아서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것 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면 더 느껴지는 것이 있을 거야.”
카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직접 검은 마나의 근원을 눈으로 본다면 지금 아드리안을 괴롭히고 있는 ‘거스를 수 없는 힘’의 실체를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운명이라면 어떻고, 운명이 아니라면 어떻지? 거스를 수 없는 힘과 질서를 알게 된다 한들 그걸 알아서 뭘 한다는 말이야. 어차피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모르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지금도 아는 것이 너무 많아 곤란한 상태이지 않은가.
아드리안이 테이블에 턱을 괴고 고민하자, 미하일의 불쑥 끼어들었다.
“갈 거야?”
“음…… 아직 고민하는 중이야.”
“고민? 지금까지 검은 마나를 나 몰래 연구하는 건 고민 한 번 없었으면서, 고작 답사를 갈지 말지는 이렇게 길게 고민한다고?”
“……그 이야기는 아까 끝난 거 아니었어?”
뒤끝 한번 기네-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빈정거림에 속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카일은 아드리안의 묘한 표정을 마주 본 채로 답사의 장점을 열심히 어필했다.
“긴 답사는 아니야. 며칠간 다녀올 거고, 검은 마나의 근원지에 대한 연구만 끝마치면 거의 여행라고 생각해도 돼! 힐데케 절벽 쪽만 험준한 거지 그 주변은 경관도 좋고 쉬기도 좋은 숲이거든.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을걸?”
“그렇군요…….”
영 확신이 없는 아드리안의 대답에 카일이 목표를 바꿨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미하일이었다.
카일은 올해 꼭 졸업을 해야 한다. 그 말은 곧 이번 학기 안에 이 거대한 연구 주제를 정리하고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미하일도 검은 마나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큼, 카일은 목소리를 가다듬는 척 두 신입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답사 모집 인원에 아직 한 자리가 비어 있는데 말이야.”
그의 의도를 알아챈 미하일의 눈동자에 번뜩 이채가 돌았다.
세리체인 축제가 끝난 이후라면 가능한 일정이었다. 그의 형은 이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겨우 그 정도 제지로는 미하일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왕성의 가족들은 막내 왕자를 언제나 과하게 싸고돌았고, 미하일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결국 루스타바란이 멸멍하기 전까지 검은 마나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을 게 뻔했다.
“연구 조수 자격이 없더라도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물론 가능하지!”
카일은 빠르게 대답했다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신…… 왕족의 호화스런 여행과는 많이 다를 거라는 거만 알아 둬. 물론 내가 잘 준비해 두긴 했지만 모두 최상급은 아니야. 알다시피 연구 때문에 가는 거라 지원받은 예산에 맞추는 것만으로도 빠듯하거든.”
“예산?”
흐음, 미하일은 카일의 이야기에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앞에는 아직도 삼 인분의 음식이 펼쳐져 있었다. 바사미엘에서야 고작 이런 식사조차도 마음대로 주문할 수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으나, 답사를 나간다는 것은 틸론의 영향력 밖으로 나간다는 말이었다.
빌어먹을 틸론이 아닌 골드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원래 얼마를 지원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스타바란 왕가에서 그 금액의 두 배를 후원하죠. 궁상맞은 여행은 딱 질색이라.”
뭐, 검은 마나와 연관이 있는 거라면 명분은 충분하지. 미하일은 평민이 몇 년 동안 호화롭게 먹고 살 금액을 거론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뭐?”
카일은 갑작스런 행운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아카데미 사 학년의 졸업 연구를 왕가가 지원한다니, 지금껏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맞은편에 앉은 신입생의 등 뒤에서 광채가 나오는 것 같았다. 고귀한 은발 머리카락이 그 빛에 맞춰 반짝여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카일은 미하일이 혹시 했던 말을 번복할까 봐 정신을 차리곤 빠르게 대답했다.
“당연, 당연하지. 그러면 준비를 좀 더 제대로 할 수 있겠다. 아드리안, 너도 당연히 가는 거다? 루스타바란 왕가의 지원을 받는 연구라니! 나중에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카일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아드리안을 향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네. 그래야겠네요…….”
아드리안은 그 표정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저 좋은 기회를 거절한다면 이상한 취급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원래대로 축제 이후에 출발할 수 있겠죠?”
미하일은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 식사 자리가 처음에는 짜증 났지만, 결과론적으로 만족스러운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카일은 아슬아슬하게 졸업할 수 있을 것만 같던 그의 기나긴 연구에 갑자기 활로를 찾은 느낌을 느꼈다. 그는 미하일의 의문에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응, 준비 시간은 충분해. 최대한 유동적으로 맞춰 볼게.”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어 편하네요.”
누구와 달리. 미하일은 제 일이 아니라는 듯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는 아드리안을 눈으로 흘겼다.
“이런, 왕자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카일은 그런 미하일을 마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멀리서 보면 작당모의 중인 사람들로 보일 정도였다.
아드리안은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마시던 차를 몇 모금 더 넘겼다. 미하일의 앞의 접시들이 아직도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신경 쓰는 이는 이 테이블에서 아드리안밖에 없는 듯했다.
‘역시 욕심부리는 게 맞았잖아.’
아드리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
모두가 잠든 조용한 밤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아드리안은 침대에 누워 손등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5,104틸론]
그러자 밝은 빛을 내며 숫자가 떠올랐다. 며칠 전 교내 신문에 올렸던 케비쉬 나무의 열매가 모두 판매된 것이었다. 성심성의껏 최상급으로 키웠으니 이 정도 가격은 절대 비싼 편이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눈앞에 떠 있는 숫자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이걸 그냥 미하일에게 넘긴다면 모든 골칫거리가 사라질 터였다. 그리고 미하일은 대회에서 승리한 후 상금과 이 골드를 합쳐 펠렌 디프스의 검을 얻겠지. 그렇게 오르디나스가 정한 운명에 아드리안이 순응한다면 그와 미하일의 ‘꿰뚫어 보는 눈’ 또한 가벼워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야.”
조용한 방 안에 아드리안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직은 더 기다려 볼 수 있어.
당분간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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