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미하일은 그 뒤로도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하지 않고 이차 예선까지 끝냈다.
그러나 바사미엘이 개교한 이후로 몇백 년간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기록을 낸 괴물 신입생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미하일이 유일하게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곳은 이 기숙사 방 안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모든 걸 다 가졌기 때문에 여태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던 미하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룸메이트에게만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
“다음 주면 벌써 본선이야. 봐, 내가 예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
“…….”
“본선 경기 티켓은 이번 주쯤 나눠 준대.”
“……그래? 잘됐다.”
아드리안의 심드렁한 반응에 솔직히 자랑하는 맛은 전혀 안 났지만.
대답이 겨우 ‘그래? 잘됐다.’뿐이라고? 미하일은 짜증스레 눈을 치켜떴다.
요새 아드리안이 이상했다. 미하일은 멍한 표정으로 창가의 식물에게 물을 주고 있는 아드리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시험 기간도 아니고 축제 준비도 할 것 없는 아드리안이 도대체 어디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인지 미하일은 예상할 수 없었다. 요새 오르디나스 졸업반 선배의 연구를 돕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힘든 건가?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삐쭉 움직였다.
그때였다. 주르륵, 물뿌리개를 너무 오래 대고 있던 탓에 화분에 물이 넘쳐 창가 받침대를 적셨다. 미하일은 그것을 턱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물 흐르는데.”
“어? 어.”
그러네. 아드리안은 물뿌리개를 들고 있는 손을 재빠르게 거둬들였다. 그런 아드리안을 보며 미하일은 영 안 어울리는 멍청한 표정이라 생각했다.
“너 요즘 왜 그래?”
“나?”
“정신을 빼놓고 다니잖아.”
“그런가…….”
넘쳐흐른 물을 대강 티슈로 닦으며 아드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빼놓고 다닐 만하지 않은가. 아드리안은 그때 레어에서 입안에 맴돌았던 이름 모르는 잡초의 떫은맛을 아직도 기억했다. 그가 바사미엘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던 계기가 된 풀이었다. 그것조차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던 거였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지고 만 것이다.
아드리안의 한숨 소리에 미하일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요즘 무투대회 때문에 강의실과 원형 결투장만 들렀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사이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흠, 미하일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평소답지 않게 안부를 물으려 하니 낯이 조금 뜨거워졌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자 미하일이 바로 입을 열었다.
“……연구 조수 일은 어때?”
그 질문에 아드리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연구? 그건 뭐…….”
이제야 이 대륙을 움직이고 있는 힘의 윤곽을 알아채려는 참이었다. 아드리안은 카일의 연구를 돕는 것이 즐거웠다. 물론 연구 때문에 카일과 자주 만나야 하는 것은 귀찮았지만, 그의 지극히 인간적인 시선은 무척 흥미로웠다.
“생각보다 괜찮아. 카일 선배도 괜찮고, 연구에 대한 의견이 우리 둘 다 비슷하거든.”
카일의 연구는 고작 아카데미 학생이 다룰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아직 그 결과가 무엇일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돈이 될 만한 구석은 전혀 없는 주제라는 것이었다. 그 탓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카일의 연구를 과소평가했다. 연구의 가치를 알아본 인간은 정령학부 수업의 교수인 올리비아 리네이가 유일했다.
흠, 아드리안의 대답을 들은 미하일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우리’.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 중 무척 거슬렸던 단어를 따라 발음해 보았다. 방금 들은 문장 전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슷해? 너와 카일 드바이시가? 뭐가 그렇게 비슷해?”
연구 생각에 잠겨 있던 아드리안이 미하일의 질문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묘하게 핀트가 나간 질문이었다.
“……분명히 그 앞에 ‘연구에 대한 의견’이라는 단어가 있었을 텐데.”
그러나 미하일은 이 대답이 성에 차지 않은지 여전히 심통 난 표정이었다.
“아무튼. 카일과 연구를 하는 게 즐겁다는 거군?”
“항상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런 편이지.”
“…….”
아드리안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미하일을 힐끔 확인하고는 식물에 물을 주는 하루 일과를 끝마쳤다. 그가 물이 남은 물뿌리개는 일단 창가에 두고 각종 원예 도구들을 챙겨 들고 책상 바로 옆 서랍에 정리해 넣고 있을 때였다.
어? 하는 목소리와 함께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가 창가에서 들렸다. 아드리안은 시선을 곧바로 돌려 그곳을 확인했다. 미하일이 장검을 든 채로 일어서서 창가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고 온 물뿌리개가 검에 걸려 쓰러지면서 그 안의 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저게 창가에 있는 줄 몰랐어.”
별로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미하일은 곧바로 욕실로 걸어 들어가 기숙사의 찬장에 비치된 최고급 타월을 한 아름 들고 창가로 돌아왔다. 설마 저걸로 창틀을 닦으려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저놈이 왕족이라 해도 얼굴을 닦는 타월과 청소를 할 때 쓰는 행주는 구별할 수 있을 것이었다.
미하일은 타월을 세 개나 들고 창가를 닦으려 손을 뻗었다. 아드리안은 그제야 미하일은 진심으로 최고급 타월을 창틀을 닦는 데에 쓰려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미하일의 손을 막았다.
“됐어. 내가 정리할게. 저기에 놔둔 내 잘못이지.”
“……내가 하려고 했는데.”
답지 않게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창가에 물을 쏟은 것 정도야 별것도 아닌걸, 뭐. 아드리안은 풀 죽은 미하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
대회 본선에 관심 없는 것은 아드리안뿐이었다. 바사미엘은 모두 무투대회의 유력한 우승자 209번에 대한 이야기로 들썩였다. 특히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것은 하운즈였다. 그들은 검 한 자루를 들고 망할 앰버의 입을 단번에 다물게 만들어 버리는 왕자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미하일이 교정을 지나갈 때마다 발을 구르며 환호하고는 했다.
“유치하긴.”
그런 하운즈들이 보내는 열성적인 응원에도 미하일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본선 경기도 아니고 고작 예선에서 이겼다고 저런 반응이라니 너무 과했다. 그는 멋들어진 대리석 복도를 벗어나 곧바로 중앙 정원의 어느 벤치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아드리안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밝은 금발에 따뜻한 햇볕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벤치 바로 뒤 커다란 나무의 푸른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일 때면 그와 동시에 아드리안의 머리카락 또한 하늘하늘 움직였다. 그는 가끔씩 책의 내용에 불만이 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도 했고, 곧이어 저자에게 설득당한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미하일은 그를 향해 걸어가던 발걸음을 저도 모르게 늦추었다. 이름을 부르려던 입도 꾹 다문 채였다. 저것은 깨트리고 싶지 않은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책을 내려다본 상태로 멋들어진 입술을 열었다.
“먼저 점심을 사겠다고 한 사람이, 이렇게 늦게 온다고?”
아드리안은 미하일이 벤치 앞에 도착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팔락- 보던 책장을 한 장 넘기면서 말했다.
“…….”
“이것도 네가 말하던 그 왕성의 예의야?”
핀잔에도 아무 대답이 없는 미하일을 향해 왜 대답이 없냐며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은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둘의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했다.
“대회 관련해서 갑자기 소집이 있어서 들리느라…….”
미하일은 말끝을 조금 늘어트렸다. 그는 벤치에 앉아 자신을 향해 올려다보고 있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는 아드리안의 따뜻한 밀색의 눈동자가 밝은 금발과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미안.”
미하일은 짧게 사과하며 고개를 획 돌렸다. 고개를 돌린 탓에 표정은 모르겠지만,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조금 붉어진 귓가가 눈에 들어왔다.
겨우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걸로 부끄러워한다고? 사과 한 번 받기 더럽게 힘드네. 아드리안은 그 붉은 귀 끝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 빨리 가자. 조금만 더 늦었다간 식사 시간이 끝나겠어.”
아드리안은 내내 앉아서 기다리던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읽던 책을 접었다. 그래,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드리안이 준비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그때였다.
“아드리안! 어, 미하일도 같이 있었네. 오랜만이다. 요즘 무투대회를 아주 휩쓸고 있다며?”
카일이 팔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드리안의 어깨를 툭, 치며 어제 했던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댔다. 미하일은 그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사이좋게 나누는 두 사람을 짜증스레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드리안의 말대로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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