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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93화 (93/184)

93화

대기 중인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한 것을 알아챈 미하일은 입술 한쪽 끝을 삐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그래, 빨리 끝내고 쉬는 게 좋지.”

그러고는 발걸음을 떼어 닫혀 있는 대기실 문을 열고는 먼저 걸어 나갔다. 미하일이 대기실을 먼저 떠나자, 남은 학생들의 시선은 천천히 어딘가로 향했다. 누군가는 그 시선에 측은함을 담았고, 누군가는 어쩌면 왕족을 통쾌하게 이겨 달라는 염원을 담기도 했다. 자신에게로 이목이 집중되자, 시선을 받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왜…… 왜 나를 보는 거야? 설마…….”

소파에 앉아 있던 조나단이 말을 더듬으며 점점 빠르게 얼굴을 양옆으로 저었다. 제발 본인이 아니기만을 바라는 절박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기실 안의 학생들을 살펴봐도 5번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나야?”

턱! 조나단과 친한 하운즈 클럽의 회원 하나가 응원하듯이 등에 손바닥을 가볍게 내리쳤다. 그 또한 첫 결투에 자신의 친구가 뽑힐 줄 몰랐던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래. 네가 5번이야. 이기고 돌아와라.”

“빨리 나가. 미하일 왕자님은 벌써 경기장에 들어가셨네.”

학생 하나가 벽 한 면 가득히 마도구가 보여 주고 있는 경기장 상황을 검지로 가리켰다.

우아아아!

그와 동시에 벽 전체가 미하일의 차가운 얼굴로 가득 찼다. 날카로운 눈매에 핏방울처럼 붉은 눈동자가 관람객들의 열렬한 환호성이 귀찮다는 듯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런 왕자의 머리 위에는 ‘209’가 당당하게 떠 있었다.

“이런, 벌써부터 이런 거물이 나오기 있나요? 대회 첫 경기부터 미하일 왕자님께서 장식해 주시다니! 놀랍습니다! 왕자님의 상대는 언제 나오나요? 설마 기권?”

피냐타가 언급한 단어에 관람석에서 야유가 들렸다. 딱 재밌을 판이었는데 기권이라니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그리고 조나단 또한 소중한 여섯 번의 기회 중 한 번을 고작 상대가 왕자인 것만으로 기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경기장 중심에 무심한 표정으로 진검을 들고 서 있는 미하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관람객들은 원형 경기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예비 도전자 5번을 확인하고는 “5번, 힘내라!”라거나 “절대 지지마!”라는 응원을 했다. 5번 또한 검을 한 손에 들고 들어오는 것에 박진감 넘치는 검사들의 대결이 펼쳐질 거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운즈들은 그 사실에 매우 열광하며 발을 굴러 즐거움을 표시했으며, 새침한 앰버는 그들을 비웃으며 “검사 두 명이 싸우는 것은 하운즈 우승자 후보를 줄이는 것뿐인데, 왜 좋아하는 거지? 역시 뇌에 근육만 찼다니까.”라고 떠들어 댔다.

조나단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미하일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는 진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겨우내 입술을 열었다.

“미하일…… 우선 말하겠는데, 난 이 경기에 최선을 다할 거야. 만약 지더라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

“……?”

네가 뭔데.

갑작스러운 도발에 검을 쥔 손을 내려다보던 미하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보니 몇 번 식당이나 수업에서 마주친 적 있었던 같은 가넷의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하일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 차 있는 조나단의 얼굴에 대고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며 피식 웃었다.

상대방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는 것 또한 유능한 기사의 덕목이었다.

***

-“안녕, 오늘도 역시 도서관에 있네. 무투대회 예선 소식 들었어?”

도서관에서 오래되어 상하기 쉬운 책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던 아드리안의 귀에 학생들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어왔다. 무척 조심스럽고 조용한 목소리라 도서관의 다른 학생들에게는 방해가 되지 않겠지만 아드리안에게는 아니었다.

질문을 한 학생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어서 오늘은 못 갔어. 왜?”

-“뭐? 과제 같은건 밤새워서 하면 되잖아! 아니, 오늘 경기를 직접 못 봤다니……. 나중에 꼭 교내 신문으로 확인해. 엄청 놀랄 거다.”

-“왜?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들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아드리안도 보고 있던 책장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돌렸다. 예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만약 거기서 이상한 일이 생긴 거라면 곤란했다.

친구에게 말을 건 학생이 무슨 일 있냐는 다급한 질문에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해 주면 재미없지. 내일 신문으로 확인해 보라니까. 올해에는 209번이 진짜 거물이야. 오늘 있었던 모든 경기가 단 한 합 만에 끝났거든.”

209번? 무투대회의 참가자에게 붙은 번호인 것 같았다.

흐음, 아드리안은 고개를 기울이며 제발 저 209번이 미하일이기를 염원했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 자신의 꼴이 극성맞은 보호자 같은 모양새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잘생긴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그래서 209번이 누군데?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하하, 알면 깜짝 놀랄걸.”

-“……장난해? 나 궁금해서 지금 과제에 집중 못 해. 네가 말해 줘, 말해 줘.”

-“빨리 과제 제출해 버리고 내일 아침 일찍 신문에서 확인하면 되잖아.”

진짜 이렇게 말만 하고 끝까지 안 알려 준다고? 아드리안은 짜증스레 눈을 흘겼다.

아드리안은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슬쩍 매만지다가, 열심히 읽던 책을 단번에 덮었다. 여유롭게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마음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도서관에서 나와 기숙사 방을 열자마자 미하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편한 옷에 상처 하나 없는 얼굴. 오늘 예선전을 치른 사람이라기엔 상당히 멀끔한 차림새였다. 지금의 외관만으로는 저놈이 경기에서 이긴 건지 아닌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한 아드리안의 눈빛에 편하게 누워 있던 미하일이 한쪽 눈썹을 쳐들었다. 뭔가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눈빛에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들어오자마자 그 눈빛은 뭐야?”

아드리안은 “아.”라고 말하며 기숙사 방문을 가볍게 닫으면서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벌써 기숙사에 들어왔구나 해서.”

뭐?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이상한 대답에 곧장 되물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쪽이 기숙사에 들어와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투였다.

교복 재킷을 벗어 정리하는 아드리안을 향해 미하일이 다음 말을 이었다.

“아, 그러니까 지금 내가 예선에서 져서 빨리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거군?”

이상하게 이런 데서 눈치가 빠른 미하일이 대꾸했다. 아드리안은 재킷을 의자에 걸치다가 고개를 미하일 쪽으로 틀었다.

“정확히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말이 나와서 물어보자면 오늘 예선 경기는 어땠어?”

“안 가르쳐 줘.”

“왜? 그냥 가르쳐 줘. 어차피 내일 신문으로 다 볼 수 있거든?”

흥, 미하일은 입을 삐뚜름하게 끌어 올린 채 말했다.

“내 마음이야. 넌 기다렸다가 교내 신문으로 보든가.”

“……아.”

정말로 아무것도 안 가르쳐 줄 것 같은 분위기에 아드리안이 대화를 끝내고 다시 누우려 하는 미하일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면 그거 하나만 딱 알려 줘.”

“……뭔데.”

“네 참가 번호.”

미하일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드리안과 마주 본 채 크게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숫자 하나를 말해 주었다.

***

아드리안은 정확히 새벽 여섯 시에 눈을 떴다.

그는 상체만 일으켜 건너편의 미하일을 살폈다. 미하일은 반듯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예선은 애들 장난이라고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더니 힘들긴 한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슬쩍 눈을 감았다가 가볍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본래의 금빛 눈동자를 마음껏 드러냈다. 그러고는 기숙사 방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미하일의 침대 쪽으로 팔을 흔들어 침묵 마법을 걸었다.

바사미엘 교내 신문 가장 앞 장에는 세리체인 축제의 무투대회 대진표가 실려 있었다.

“이건…….”

아드리안은 문 앞에 서서 잠시간 신문 첫 장을 보다가 몸을 휙 돌려 침대로 걸었다.

“정말로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직접 확인해 봐야지.”

손에 신문을 들고 아드리안은 침대 아래의 붉은 돌멩이 두 개를 눈으로 확인했다.

그의 생각은 이랬다.

미하일은 이 대회에서 일등을 할 것이다. 그러나 세리체인의 상금만으로는 절대 펠렌 디프스의 검을 손에 넣을 수 없다. 나머지 5,000틸론을 겨우 한 달 남은 이번 학기 동안 모을 수 있는 사업 수완이 미하일에겐 없다. 미하일이 펠렌 디프스의 검을 포기한 순간부터 그의 ‘꿰뚫어 보는 눈’이 무거워졌다. 그는 올해 안에 그 검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그래, 이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들 틈에서 딱 하나 둘 다 이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아드리안의 금빛 눈동자가 나란히 바닥에 놓여 있는 ‘꿰뚫어 보는 눈’을 향했다. 그는 매끄러운 손가락으로 붉은 돌멩이들을 스윽, 매만지고는 한숨을 내쉬며 들어 보았다. 그와 동시에 아드리안의 금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내가 5,000틸론을 주는 것.”

두 사람의 ‘꿰뚫어 보는 눈’은 그 전과 비교해서 절반 정도 가벼워졌다. 바닥에서 오 센티미터도 들어 올릴 수 없었던 돌들을 이젠 두 개 모두 무릎 높이까지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이제야 이 볼품없는 돌멩이가 도대체 무엇을 ‘꿰뚫어 보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이 꿰뚫어 보는 것은 운명의 궤도였다.

“악행을 해서 무거워지고, 선행을 해서 가벼워지는…… 그런 단순한 시스템이 아니었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일 학기 초 캐서린과 걸어가다 우연히 미하일과 봤던 데클레어 교장의 대련이었다. 빼어난 기사 둘의 검술 대련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소드 마스터에 대한 목표를 다짐하듯 일렁였던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아드리안의 질끈 감은 눈꺼풀 아래를 가득 채웠다.

“미하일이 그날 그 대련을 봤기 때문에?”

그날 아드리안의 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던 건, 고작 미하일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려 노력했던 것 때문이 아니었다.

“미하일이 그 대련을 보게 된 건, 내가 캐서린의 숙제를 우연히 주웠기 때문이었지.”

정해진 궤도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돌의 무게가 무거워진다. 그리고…… 아드리안의 미간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이 모든 흐름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었다.

“오르디나스는 미하일을 용사로 정했다.”

운명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질서가 되어 왕자와 드래곤의 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아드리안은 표정을 굳힌 채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침묵했다. 그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놔둔 교내 신문의 첫 장에는 커다란 글씨로 <단 한 합으로 모든 예선 경기에서 승리! 209번의 고공행진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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