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어제 아드리안은 미하일이 자는 동안 그의 침대 밑에 곱게 모셔 둔 ‘꿰뚫어 보는 눈’을 다시 한번 살폈다. 미하일의 것과 아드리안의 것 모두 지난번 꿈처럼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면 가벼워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듯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 마나 한 점 없는 인간 아드리안의 힘으로는 들어 보려 애써도 좀처럼 바닥에서 떨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아니 그래서 예선은 진짜 언제냐고.”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미하일이 정말로 펠렌 디프스의 검을 손에 넣는다면 둘의 꿰뚫어 보는 눈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인지’였다. 미하일은 자신에게 네 번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올해뿐이었으므로 이번 무투대회가 특히 중요했다.
마나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려면 아주 소량의 마력이 필요했는데, 그 탓에 아드리안의 눈동자는 현재 금색의 빛을 뿜어 대고 있었다. 눈 감고 뒤돌아 서 있는 탓에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없는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내일.”
심드렁한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내일? 아드리안은 눈동자에 맺혀 있던 금색의 마나 알갱이들을 빠르게 모두 거둬들였다. 미하일이 뒤돌아 볼 때를 대비해서였다.
“당장 내일부터 예선인데 넌 연습도 안 하고 있었단 말이야?”
“……대신 검법서를 읽고 있었잖아? 그리고 예선은 진짜 애들용이라고.”
“이번 무투대회 신청자가 역대 최다라고 하더라.”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이야기에 하아, 하고 짜증스레 한숨을 뱉었다. 안 그래도 저게 제일 불만인 부분이었다. 원래는 평균적으로 백여 명 정도 참가 신청을 하는 대회라고 들었는데, 하필 이번에는 이백 명이 넘는 도전자가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미하일은 하운즈와 앰버에 들어간 학생들이 왕성 기사와 궁정 마법사를 꿈꾸는 이들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바사미엘에 발에 채이듯이 있는 끄트머리 귀족이나 왕가의 사촌이 아닌 진짜 루스타바란의 직계 왕자가 바사미엘에 입학한 이상, 그들 모두 미하일 앞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학생들의 원대한 꿈은 그들의 목적과는 별개로 미하일에게는 괜히 쓰러트려야 할 상대만 늘어난 꼴이 되었다.
“그 덕에 나는 쓸데없이 예선만 여섯 번 참가해야 해.”
“여섯 번이나? 그중에서 몇 번이나 이겨야 하는데.”
“삼사 학년은 다섯 번, 일이 학년은 네 번.”
“오, 그런 식으로 학년별로 다르게 진행되는군. 그러면 본선은?”
“본선은…….”
미하일은 입을 열려다가 멈춘 채, 등 뒤에 선 아드리안을 향해 고개를 훽 돌렸다. 가만히 설명해 주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더러웠다.
“야, 내가 무슨 대회 규칙 설명서야? 궁금하면 경기 룰 북을 찾아서 직접 보든가.”
“막 그렇게까지는 궁금하지 않아서. 그리고 네가 이렇게 친절하게 잘 설명해 주잖아.”
미하일이 친절하다는 것은 당연히 빈말이었다. 아드리안은 당당한 자세로 감히 왕족을 본인 궁금증 해결에 써먹었다. 곧바로 따라와야 할 미하일의 짜증을 기다렸지만, 웬일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미간을 찌푸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미하일을 아드리안은 힐끔 바라봤다. 말로는 예선 통과에 자신 있다 당연히 통과한다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불안하긴 한 건가? 그럴 때이긴 하지. 아드리안이 속으로 아무 말 하지 않는 미하일의 생각을 멋대로 넘겨짚고 있을 때였다.
“본선은.”
“응?”
미하일은 입술을 삐딱하게 비튼 채로 아드리안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시작했다. 언제는 직접 찾아서 보라며? 아드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 미하일이 설명해 주는 것이 더 편했으므로 곧바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아까 말한 대로 처음에는 여섯 번 승부를 해서 통과 조건을 맞춰야 해. 그게 일차 예선이고 그걸 통과해야 비로소 ‘세리체인의 도전자’라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거지. 그다음 학년 구분 없이 섞어 이차 예선을 진행해. 거기에서 최후의 십 인이 남을 때까지 대전하는 게 세리체인 무투대회의 기본 룰이야. 그리고 십 인이 선발될 때쯤이면 한 달 뒤니 세리체인 축제의 시작하는 날과 거의 맞아 떨어지거든. 한 번은 축제 시작 날까지 최종 십 인이 정해지지 않은 적이 있어서 그날 새벽까지 예선을 진행했다더군. 아무튼 축제와 동시에 세리체인 무투대회 본선 경기가 열리고 거기서부터는 필승. 말 그대로 한 경기라도 패배하면 그대로 탈락인 방식이야.”
“…….”
아드리안은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하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미하일이 말했던 모든 문장을 합해도 이 정도 길이의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미하일은 ‘이제 됐지?’라는 표정으로 가볍게 턱짓을 했다. 향초를 태우는 십 분이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오…… 그래, 고마워. 엄청 상세하다.”
원래 저렇게 말이 많은 애였나? 아드리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 향초가 올라간 접시를 들어 올려 후- 하고 불을 껐다.
***
미하일은 무심한 표정으로 일차 예선 경기장의 대기실에 서 있었다.
허리에 찼던 검대와 검집은 풀어내어 뒤쪽에 비치된 보관함에 넣어 두고, 손에는 진검 한 자루만 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당장이라도 검을 자유롭게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대기실에는 미하일뿐만 아니라 세리체인 무투대회에 참가한 일이 학년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대기실 한쪽에 자리 잡은 미하일을 힐끔거리며 저마다 대회에서 사용할 기술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다행히 대기실의 한쪽 벽면에는 경기장의 모습을 보여 주는 마도구가 설치되어 안에서도 밖을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와아아아!
관람석에 앉은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어 댔다. 예선 경기의 시작을 알리듯이 누군가가 크게 미소 지으며 동그란 단상에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무지개색으로 칠해진 말 모양의 가면을 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단상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원형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을 향해 여유로운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저게 무슨 꼴이야.”
그 모습을 보고는 대기실에 서 있던 미하일이 가볍게 혀를 찼다. 고결하고 경건해야 할 무투대회가 저 꼴로 인해 이미지가 단박에 땅에 처박혔다.
그동안 말가면을 쓴 남자는 경기장 중앙의 단상의 계단을 모두 올랐다. 그는 그곳에 이미 연결된 확성기의 높이를 매만지더니, 툭툭 손가락으로 확성기를 두드려 소리를 체크했다. 경기가 곧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에 환호하거나 수다를 떨던 학생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경기장 중앙에 집중했다. 그것은 대기실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말가면을 쓴 남자가 확성기에 입을 가져다 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러분의 목소리, 여러분의 숨겨진 편지 배달부, 피냐타입니다.”
건장한 체격과 대비될 정도로 무척 발랄한 목소리가 경기장 전체를 크게 울렸다. 그 목소리에 원형 경기장을 넓게 한 번 휩쓸 듯이 분위기를 환기되었다.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무투대회의 일차 예선이 치뤄지는 첫날입니다!”
와아아아!
저딴 가면을 쓰고도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관람객들이 열광적으로 함성을 지르는 것을 보니 엄청난 쇼맨십을 가진 것 같았다.
“과연. 과연 대막의 첫 경기에는 도대체 누가 나올까요? 참고로 예선전은 저도 경기 시작 전까지는 누가 참가하는지는 사전에 전달을 못 받는답니다. 예비 도전자들도 날짜만 바로 그 전날 공지를 받고, 몇 번째 경기일지는 이 경기장에 와 봐야 정해지는 거거든요.”
그는 마이크를 한 손으로 잡은 채 팔을 공중으로 치켜들었다. 앰버를 응원한다더니 마법사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의 손을 중심으로 마나가 일렁이며 휘몰아쳤고, 이내 경기장 중앙에 거의 마차 한 대만한 크기의 투명한 구가 만들어졌다.
저걸로 정하는 건가? 대기실의 미하일은 투명한 구 안에 든 숫자가 적힌 수많은 흰 공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 공들을 섞기 전에! 먼저 이것들의 주인을 정해 볼까요? 막간을 이용해 재미있는 걸 말해 드리자면, 이번 세리체인 무투대회의 참가자는 총 287명! 참가비가 20틸론이니 일등이 가져갈 금액만 해도 5,740틸론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피냐타는 금액 부분을 마치 숙련된 사회자처럼 강조하듯이 말했고, 관람객은 그에 맞춰 열렬한 환호를 보내 왔다. 피냐타는 흐뭇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흰 공으로 가득 차 있는 구를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가, 바닥에 닿을 정도까지 내렸다. 그 움직임에 안의 공이 조금 흔들렸다.
“이 투명한 구 옆쪽에는 딱 공이 굴러 나올 정도의 구멍이 나 있고, 저는 이걸 흔들어 두 개의 공을 꺼낼 겁니다. 어때요, 마법은 정말 위대하죠?”
우우우! 피냐타의 뜬금없는 마법 찬양에 관람석에서 야유가 번져 나왔다.
“그리고 마법은 이것과 동시에…….”
탁! 피냐타는 확성기 앞에 손을 가져다 대어 손가락을 튕겼다. 또렷한 소리가 경기장 전체를 울렸다. 대기실에서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던 학생 하나가 다른 학생들을 바라보다 어? 라고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대기실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머리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익숙한 틸론의 표식 대신 커다란 번호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번호가…… 생겼어! 저기, 내 건 몇 번이야? 한번 봐 줘!”
“도전자들에게 번호를 부여할 수 있지요. 맞아요! 바로 이렇게 정하기 때문에 저도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카운트다운에 맞춰 공을 섞고, 이 중 랜덤으로 나온 두 개의 번호 주인들이 바로 오늘 이 예선전에서 싸울 예비 도전자들이랍니다.”
커다란 구가 위 아래로 점점 더 크게 움직였다. 그때마다 안의 흰 공들이 저마다 나가려고 아우성치듯 불규칙적으로 세차게 부딪혔다. 피냐타는 커다란 구를 가볍게 컨트롤하며 안에 든 공들이 더 잘 섞이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 관람석에 앉은 학생들이 카운트다운에 동참했다.
덜그럭! 흰 공 하나가 구멍에 걸렸다가 데굴데굴 굴러 경기장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에 질세라 나머지 공 하나도 곧바로 뒤따라 바닥에 떨어졌다.
“네! 첫 예선에 참가할 도전자가 정해졌습니다! 축하드려요, 5번과 209번!”
5번이랑 209번이 누구야?
대기실의 모든 학생들이 5번과 209번을 찾으려 고개를 휙휙 돌리다가 어딘가에서 고개를 우뚝 멈췄다. 모두 미하일의 머리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무심한 표정의 미하일의 머리 위에는 숫자 209가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두 예비 도전자 모두 대기실에서 나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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