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아드리안의 깊어져 가는 고민과 별개로 시간은 흘렀다. 오전에는 온실의 케비쉬 나무들을 관리한 후 오르디나스 클럽실에 들리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되었다. 이제 검은 마나에 대한 연구는 마치 아드리안 자신의 것인 양 익숙해졌다.
“선배님 말씀대로 이 자료들에서 발견해 낸 공통점은 특이하네요.”
조용한 오르디나스 클럽실에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그러자 테이블 건너편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던 카일이 벌떡 일어나면서 “응?”이라고 반응했다. 그는 곧장 아드리안이 앉아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아, 벌써 이걸 보고 있구나. 특이하지? 이 현상 말이야.”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의 몇 부분을 검지로 짚었다. 붉은색 잉크로 휙, 그린 타원형 낙서들이었다. 그 위에는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휘갈겨 쓰여 있었다.
“이곳에 살았던 영주민들이 남긴 기록에는 ‘검은 마나가 솟아난 곳에서는 언제나 마물들이 그 안에서 기어 나왔다’ 이렇게 쓰여 있거든. 증언들은 모두 처음에는 몇 마리만 튀어나오던 것이 검은 마나가 대륙 전체로 번지자 마치 역병처럼 무리를 지어 인가가 모인 마을을 덮쳐 왔다고 해. 여기서 특이한 점은, 검은 마나가 세상을 뒤덮었을 때 언제나 그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영웅이 탄생했다는 거지. 루스타바란의 카를로 건국왕처럼!”
“…….”
아드리안은 카일의 말을 듣기만 했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카일이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는 지도 부분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로 건국왕처럼? 하지만 그를 도와준 것은 이런 검은 마나 따위가 아니라 바로 나였는데.
“도대체 이 검은 마나는 뭘까. 흉악한 마물들을 불러내는 동시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영웅들을 만들어 내잖아.”
“그러게요. 뭘까요, 도대체.”
흠, 아드리안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턱을 괴었다. 카일은 신입생의 고뇌를 이해한다는 듯이 그의 등을 가볍게 툭툭 두드려 위로했다.
***
“아니, 아직 본선은 한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예선을 시작한단 말이야?”
아드리안은 언제나처럼 기숙사 방문을 열려다 바로 옆 커다란 기둥에 붙은 포스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검을 든 자여, 모두 그것을 휘둘러라!>라고 쓰여진 사교 클럽인 하운즈를 응원하는 포스터였다. 만약 기둥에 붙은 포스터가 앰버의 것이었다면 미하일이 아마 진작 떼어 냈을 것이었다.
“얼마나 도전자가 많으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애들이란. 치고 박고 싸우는 것에 열광하는 것이 딱 애들다웠다. 물론 미하일은 저기서 무조건 일등을 해야 했다.
문을 열자마자 미하일의 퉁명스러운 말투가 아드리안을 반겼다.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들어와?”
“벌써 예선이네?”
아드리안은 엄지로 등 뒤의 기숙사 방문 밖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네 예선은 언제 시작이야?”
“그건 왜 물어. 보러 오게?”
“…….”
아드리안은 기숙사 의자에 교복 재킷을 벗으며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러고는 미하일의 침대 쪽을 힐끔 바라봤다. 팔랑- 미하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원거리 결투에서 효과적인 검법에 대한 고찰>이라고 적힌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혼잣말 한 번 더 했다간 예선까지 끌려갈 판이었다. 아드리안은 픽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냥 물어본 거야. 멀리서나마 응원할게.”
“멀리서 보내 주는 열렬한 응원에 아주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흥, 미하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세 한 번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아드리안은 무투대회에 관한 이야기에도 생각보다 별 반응이 없는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아니, 진짜로. 응원한다니까.”
“누가 뭐래.”
차가운 미하일의 목소리가 곧바로 아드리안을 질책했다. 미하일은 그의 룸메이트가 하는 빈말을 이미 모두 구별할 줄 알았다. 아드리안은 이쪽이 예선을 통과하는 것보다는 저 창가의 화분에 새로운 싹이 난 것에 더 기뻐할 놈이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아드리안은 무투대회에 관심 있는 척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네 말대로 예선쯤이야 가벼운 몸 풀기고 진짜는 본선이잖아.”
“뭐.”
“그래서 말인데. 준비는 잘 하고 있어? 마나 중화 향초는 더 필요 없고?”
“……향초?”
아드리안의 과도한 관심에 미하일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무투대회에 관해서 왜 저렇게 관심을 가지지? 심지어 향초 이야기를 할 때에 아드리안의 눈동자는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미하일은 그 눈동자에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날, 시선 한가득 아드리안의 따뜻한 밀빛의 눈동자가 담겼고, 그의 따뜻한 숨결이 맨살에 닿았었다.
미하일은 잠시간 고개를 기울여 생각하더니 아드리안을 바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벌써 그럴 때가 되었군.”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에서 향초를 몇 개 꺼내 들었다. 본선까지 길게 잡아 두 달간 피울 향초 개수를 계산한 것이었다. 개당 3틸론에 팔겠다고 했으나, 미하일이 대회에서 일등을 할 수 있다면야 이 정도는 그냥 줄 수 있었다.
“내가 전에 했던 것처럼 위에 불을 붙이고 십 분 정도 옆에 놔두면…….”
“기억 안 나.”
향초에 대한 아드리안의 설명을 미하일이 단칼에 끊었다. 아드리안은 움직이던 입술을 잠시 멈춘 채 미하일을 바라보다가 다시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이건 기억할 것도 없어. 지금 내가 설명해 주고 있잖아. 성냥은 여기 빌려…….”
“그냥 그때처럼 네가 해 줘.”
“……성냥은 여기 있고, 이걸로 불만 붙이면 되는데.”
“그러니까 네가 해 달라고.”
미하일은 침대 가장자리에 무심하게 앉아 입고 있던 셔츠의 윗 단추를 하나 풀었다.
“지금?”
아드리안의 멍한 목소리에 ‘그러면 지금 아니고 언제 해 줄 건데?’라고 말하는 듯한 미하일의 시선이 꽂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모든 단추를 풀어 셔츠를 벗은 다음 살짝 접어 침대에 내려놓았다.
하여간 제멋대로 구는 자식. 아드리안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향초를 접시에 올려 두고는 치익- 하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곧이어 향초의 윗부분이 타오르며 넘실대는 연기를 뿜어 대었다.
“침대에 앉아 있으면 마나 흐름이 잘 안 보이잖아. 여기로 와 봐.”
아드리안은 여전히 자신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미하일을 향해 향초가 놓인 협탁 쪽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굳이 거기로 가야 할까?”
그러자 미하일은 나직한 목소리로 그 부름을 거절했다.
“당연하지. 빨리 이쪽으로 와. 마나 흐름을 보다가 효과가 나타나면 향초를 꺼야 해.”
미하일의 완곡한 거절에 아드리안의 심드렁한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체의 맨살을 드러낸 채로 걸어오는 미하일을 아드리안은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흐름이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안정되어 보이네.”
그가 처방했던 향초 덕분이었다. 미하일은 그 미묘했던 치료 직후 그 효과를 곧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매일 하던 마나 훈련은 물론이고 오랜만에 해 보았던 검에 마나를 불어 넣는 훈련 또한 이전보다 훨씬 더 좋은 성과가 있었다.
아드리안의 차가운 손바닥이 미하일의 벗은 상체에 닿았다. 그것은 마나의 흐름을 마치 손가락으로 그리려는 듯이 등 뒤를 천천히 배회했다. 미하일은 눈을 꾹 감은 채 아드리안의 손가락 감촉보다 마나 훈련에 집중하려 했다. 아드리안은 그것도 모른 채 미하일의 마나 흐름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어때? 너도 훈련할 때 차이를 느꼈지?”
“응.”
미하일은 저도 모르게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는 이제는 아드리안이 마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물론 동시에 미하일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의심이 존재했다. 평민이 이토록 특수한 지식을, 특히 마법과 마나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징후가 좋아. 네 마나가 심장에서 팔꿈치 언저리까지는 원활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잖아.”
그러나 이렇게 자꾸 신경 쓰이는 등 뒤의 차가운 손바닥과 가끔 느껴지는 저 따뜻한 눈동자 색 때문에 그 모든 의심은 언제나 가라앉곤 했다. 솔직히 왜 그런지는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
좋은 것 같아. 미하일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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