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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90화 (90/184)

90화

아드리안은 오랜만에 클럽실을 찾았다. 입부할 때를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오르디나스에 가입한 건 온실을 사용하기 위함이었지 본래의 클럽 설립 취지인 사교에는 전혀 관심 없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양 문을 활짝 열자, 순간 데자뷔를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어둡고 더럽고 정신없었다는 말이었다.

클럽 안쪽에 있어 일부만 보이는 소파에 학생 구두가 삐죽 나와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곳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 그 신발의 주인에게 볼일이 있었다. 카일 드바이시는 이번에도 소파에 편하게 늘어져 잠들어 있었다.

“저…… 선배님.”

능력의 소유자였다. 카일은 부르는 걸 못 들었는지 여전히 입을 벌린 채 숨을 내쉴 뿐이었다. 흠. 아드리안은 소파 뒤쪽에 바로 서서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이전에 봤던 것처럼 그가 누워 있는 소파를 가볍게 발로 한 번 찼다.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나면서 소파가 들썩였다.

음…….

그제야 카일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급한 거 아니면 깨우지 마. 며칠째 밤을 새우고 겨우 잠들었다고…….”

카일의 같잖은 애원은 아드리안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소파를 한 번 더 세게 차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여기까지 온 김에 최대한 빨리 볼일을 끝내고 싶었다.

“잠깐만 좀 일어나시죠.”

“진짜 못 잤…….”

응? 근데 누구지?

카일이 그제야 눈을 뜨고는 소파 위쪽으로 보이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 아드리안이었네. 무슨 일이야.”

으으윽! 카일은 찌뿌둥한 몸을 길게 늘리며 괴상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올리비아 교수님의 소개로 왔습니다만.”

“아아, 도우러 온다던 조수가 너였어?”

네, 아드리안은 기지개를 켜 대는 카일을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이미 교수에게 선금을 받은 터라 그가 조수로서 일을 거들어야 할 사람이 이 ‘카일 드바이시’라는 것을 안 뒤라도 번복할 수는 없었다.

“네. 제가 어떤 걸 도와 드리면 되죠?”

“그래, 마침 잘 찾아왔군. 바로 알려 줄게.”

카일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털면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드리안은 오르디나스 클럽실 중심에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는 카일의 뒤를 따라갔다.

“올해 안에 끝내야 하는 연구가 있어서 조수를 찾아 달라 부탁드린 거거든. 그래도 일단 대충은 정리를 해 놓은 상태라 조수 일이 크게 힘들지는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카일은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휘감겨 있는 양피지 뭉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대충은 정리를 해 놓은 상태라니 정리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른 것이 틀림없었다.

“네가 아카데미 경매에서 팔았던 그 단추에서 느껴진 고대의 마나가 많은 도움이 되었어. 어디서 그 마나가 스쳐 지나간 건지는 여전히 비밀?”

그는 양피지 수십 장을 손등으로 대강 밀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면서 올리비아 교수가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했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카일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뭐…… 아무튼. 이거 봐.”

그중 한쪽에 모아 둔 양피지 뭉치에 손짓하며, 카일이 씨익 웃었다. 연구에 성과가 있는 듯 카일의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다만, 며칠째 밤을 새웠다는 건 사실인지, 눈가의 다크서클로 심히 음흉해 보였을 뿐이었다.

아드리안은 양피지 중 하나를 낚아채더니 심드렁한 얼굴로 양피지를 묶은 푸른색 끈을 휘휘 풀어헤쳤다. 둥글게 말려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치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카일은 재킷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던 은색 라이터를 집어 들어 치익- 불을 붙였다. 아드리안은 그런 카일을 힐끔 바라볼 뿐 말리지는 않았다. 지금 옆의 인간이 담배를 태우고 있다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의 손에 천천히 힘이 실렸다. 그의 미간이 살풋 일그러지며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건……? 아드리안의 멋들어진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 하고 계시는 연구 주제가 뭐죠?”

하하, 카일은 고개를 돌려 흰 연기를 내뱉으며 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설명을 해 주지도 않았는데 양피지 하나를 보자마자 마치 연구 내용을 다 파악하기라도 한 듯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있는 후배가 매우 기특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번 방학에 채집해 온 특이한 마나에 대한 연구 기록인데…….”

아,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른 자료가 더 좋겠네. 저것도 펼쳐 봐.

카일은 붉은 끈으로 묶인 양피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재떨이 하나를 쭈욱 끌어와 태우던 담배를 잠깐 내려놓았다. 교수의 추천을 받았대도 신입생이니, 원래는 직접 하기엔 귀찮은 일 정도만 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구 자료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아드리안을 보고는 냉큼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곧바로 카일이 가리켰던 양피지 두루마리 몇 개를 풀어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 두었다. 그가 왜 이것들만 짚어서 펼치라고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양피지에는 카일이 어떤 것을 집요하게 연구했는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펜으로 낙서를 한 것 같은 메모가 있는가 하면, 깃펜의 잉크가 번져서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도 있었다.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있다고들 하지.”

거스를 수 없는 힘.

카일의 또렷한 목소리에 테이블 위의 양피지들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아드리안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드리안이 지금껏 알던 카일의 실없고 가벼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양피지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거기에는 어떤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것 같은 표가 주욱 그려져 있었다.

“그 거스를 수 없는 힘을 그저 인과 관계의 반복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해. 하지만…….”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옆의 인간이 주절대는 이야기는 드래곤 또한 억겁의 시간동안 고민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답을 알려 준 적이 없었다.

“나는 그걸 ‘오르디나스’라고 불러.”

“…….”

곧장 직선으로 쏘아지듯 시선을 보내는 카일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아드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르디나스, 이 클럽의 이름이기도 하면서 고대어로 자연의 질서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

“질서.”

아드리안은 신음하듯이 그 단어를 내뱉었다. 카일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피지 하나를 앞으로 더 끌어왔다.

“이게 그 증거야. 내 연구 주제이기도 하고.”

검은 마나에 대한 기록이 한가득 쓰여 있었다. 함께 그려진 그림은 칠흑같이 어두운 덩어리로 보였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드리안도 들어 본 적 있는 것이었다. 카일은 검은 마나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증명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드리안은 무척 진중한 표정으로 가끔씩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카일이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을 질문하기도 했다.

***

케비쉬 나무에 매달린 노란 열매를 아드리안이 검지로 툭, 건드렸다. 수확까지 이 상태만 지킬 수 있다면 최상급 판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한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노트에 주욱 막대기를 그었다. 그 페이지에는 이미 막대기가 빼곡히 그어져 있었다. 그의 멋들어진 입술이 움직이며 씨익 미소를 자아냈다.

“좋았어.”

나무 한 그루당 스무 개에서 스물다섯 개 사이의 열매가 열렸다. 묘목이 10틸론이었으니, 열매는 그것보다는 저렴한 가격일 터였다.

“……케비쉬 열매 하나당 대강 8틸론이라 치고 계산해 본다면, 4,800틸론.”

그런데…… 이게 마냥 좋아할 일인가?

아드리안은 들고 있는 깃펜의 부드러운 깃털 부분을 매만지며 케비쉬 나무 사이를 걸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틸론과 합친다면 5,000틸론은 족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펠린 디프스의 검의 가격인 1만 틸론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드리안에게는, 아니 미하일에게 비장의 수가 하나 있었다.

“미하일이 만약에 무투대회에 일등을 해서 상금을 쓸어 온다면 가능하지.”

하하, 아드리안은 제 입으로 말을 해 놓고도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아슬아슬하게 1만 틸론이 된다. 그러나 웃음도 잠시, 삐뚜름하게 틀어져 있던 입꼬리가 천천히 스르륵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소름끼치게 정확한 액수잖아.”

카일이 이야기한 세계의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대한 연구가 생각났다. 물론 겨우 아카데미 학생의 연구 주제였으나, 지금 드래곤으로서는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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