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89화 (89/184)

89화

복도의 천장에서 익숙한 방송 멘트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교내의 학생들은 그 발랄한 목소리에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는 고개를 치켜들어 피냐타의 방송에 집중했다.

“교장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한 해 동안 기다려 왔던 세리체인 축제가 곧이네요. 저는 바사미엘의 모든 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방송인으로서 특정 편을 들지 않……지 않습니다! 하하! 무투대회 우승은 당연히 마법사들의 것이니까요.”

피냐타의 편파 방송에 기사 학부 학생들이 “우우우!” 하면서 비난했다.

안 그래도 이번 무투대회의 우승자가 기사 학부일지 마법 학부일지에 대한 논쟁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 주제였다.

“아, 아무튼 저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고, 방금 엄청난 소식을 전달드리려 했거든요! 방금 이등 상품을 누군가 가져갔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을 제가 듣자마자 방송을 켰답니다! 물론 누가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축하드려요. 지금까지 바사미엘의 이야기꾼, 피냐타였습니다. 안녕!”

뭐라고? 피냐타의 충격 발언에 중앙 정원에 앉아 삼삼오오 모여 있던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일 학기에 공개한 바이올린이 벌써 주인을 찾았다니, 엄청난 소식이 맞았다.

“뭐? 벌써? 젠장, 내가 그거 사려고 매일 오늘의 메뉴만 먹었는데!”

“도대체 누구래? 대단하다. 난 사 년 동안 모으래도 5,000틸론은 못 모을 것 같은데.”

“진짜. 누군지 진짜진짜 궁금해.”

누군가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아름다운 선율이 기숙사 복도를 채웠다.

캐서린은 그 멜로디에 저절로 콧노래를 낮게 부르며 어느 방문 앞까지 당당하게 걸어갔다. 수려한 연주 실력에 매끄러운 곡조, 그러나 귀족인 그녀가 여태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곡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곡을 연주하는 이가 직접 작곡한 곡이겠지. 캐서린은 그녀의 입술을 끌어 올려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이 선율을 자아내는 이가 누구인지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한스!”

뚝- 마치 오르골처럼 방 안에서 연이어 이어지던 음악이 끊겼다.

캐서린은 노크 없이 활짝 문을 열고는 방 안에서 한창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던 한스를 발견했다. 한스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캐서린…… 방에 들어오기 전에 제발 노크를 해 달라고 말했었잖아…….”라고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커다란 덩치의 한스는 입을 삐죽이며 턱에 걸치고 있던 바이올린을 천천히 내렸다.

물론 캐서린은 친구의 나직한 투덜거림 정도에는 아무런 관심 없었다.

“어, 갑자기 웬 바이올린이야? 바이올린은 음에 중후한 멋이 없다며.”

털썩, 그녀는 기숙사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만큼, 그녀는 한스가 몇 달 전에 스쳐 지나가듯이 말했던 발언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한스는 웃으며 바이올린 활을 세심하게 정리함에 넣고, 열려 있던 송진의 뚜껑을 닫았다.

“이건 달라. 특별한 바이올린이거든.”

“그래?”

캐서린은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은 상태로 한스가 정리함에 조심히 내려놓는 바이올린을 힐끔 확인했다. 그녀의 오랜 친구는 수많은 악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 중 하나를 대충 집어도 골드로 환산한다면 평민들의 집 한 채 가격 정도는 우스울 고급 사치품들이었다. 최신형의 마도구라거나 진귀한 마나석만 구별할 줄 알았지 악기의 특별함까지 알아볼 재주는 없는 캐서린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네가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들이랑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연주를 해 보면 확실히 차이가 느껴져.”

내가 그런 차이 따위 알까 보냐. 캐서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방 한편에 마련된 한스의 악기 컬렉션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제야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다는 듯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때 그거구나? 가을 축제 이후에나 살 수 있을 것 같다던! 무슨 일이야? 집에서 용돈을 갑자기 많이 주신 건가.”

“아아.”

한스는 쑥스럽다는 듯이 가볍게 뒷머리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사실 스스로도 올해 안에 이걸 살 수 있을까 하고 긴가민가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신이 도와주신 모양인지 이번 곡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번에 쓴 곡이 방학 동안 살롱에서 인기가 조금 있었나 봐. 그래서 예술 학부 사교 클럽 정산을 조금 당겼지.”

“뭐? 축하해! 이야, 그럼 틸론 부자겠다. 점심이나 사.”

“……어 ……그게 ……나도 그러고 싶은데…….”

긴 침묵과 함께 한스의 멋쩍은 미소가 잠시 동안 둘 사이를 메웠다. 축하를 전하면서 한스의 등을 퍽퍽 두드리던 캐서린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설마 다 쓴 거야? 그거 사느라?!”

캐서린의 잔소리에 한스가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캐서린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경제관념 없는 오랜 친구에게 조언했다.

“참 나, 그렇게 계획 없이 틸론을 다 써 버리면 어떡해? 가자. 내가 점심 사 줄게.”

캐서린의 한심하다는 표정이 한스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마법 이외에는 전혀 관심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알았다면 5,000틸론짜리 바이올린을 덜컥 살 수 있는 한스에게 한심한 표정을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

바사미엘은 곧 시작될 세리체인 무투대회의 예선 이야기로 들썩였다.

<검을 든 자여, 모두 그것을 휘둘러라!>라는 슬로건이 다양한 색으로 쓰인 포스터들이 교내 곳곳에 걸렸다. 그리고 마치 그 포스터들과 대결이라도 하듯이 <어차피 우승은 마법사들의 것>이라는 슬로건 또한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정말로 대회의 슬로건을 따르려는 것인지, 어렸을 때부터 검을 좀 잡았거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학생들은 모두 대회 접수가 시작된 첫날 지원을 마쳤다. 본관 중앙 현관의 커다란 대리석 벽에는 참가자의 이름이 순서대로 새겨져 있었다. 학생들은 그 앞에서 아는 이름을 찾거나 과연 누가 우승할지와 같은 잡담을 해 댔다.

-대회 접수 인원은 제한이 없어?

-응. 어차피 허수는 다 예선에서 걸러지니까 그냥 다 받아 준대.

-접수비만 해도 20틸론이니까 하운즈와 앰버의 수입이 짭짤하겠네. 게다가 이번에 하운즈 클럽원들 대부분 참가할 거래. 하운즈 클럽에서 우승자까지 나오면 최고겠지.

-이번 대회가 역대 최대로 신청이 들어왔다던데. 벌써 모인 상금만 해도 4,000틸론이 넘더라고.

-이거 봐. 미하일 왕자님도 어제 접수를 하셨어.

-진짜? 재밌겠다. 난 빨리 경기장 관람 티켓이나 구해야겠는걸.

중앙 정원 벤치에 앉아 평화롭게 책을 읽고 있던 아드리안의 귀가 쫑긋 섰다.

4,000틸론?

중앙 현관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 중 가장 흥미로운 포인트였다. 이건가? 미하일이 펠렌 디프스의 검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이거라면 왕자의 부실했던 실적을 단번에 채울 수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검을 휘두르는 걸 참아 준 보람이 있겠는걸.

아드리안은 벤치에 앉아 본관 쪽의 소리를 듣다가 다시 들고 있던 책에 고개를 내렸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그의 한쪽 미간이 살풋 찌그러졌다.

“……미하일 혹시 무슨 일 있어?”

아드리안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가 앉은 벤치 뒤의 나무에 편하게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불청객이 대답했다.

“딱히?”

그 대답에 아드리안이 턱을 들어 올려 불청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뒤로 넘긴 탓에 온 세상이 거꾸로 보였다.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아까부터 날 감시하는 거야.”

“감시? 단어 선택이 이상하네. 난 여기서 마나 수련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불청객의 뻔뻔한 대답에 아드리안이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불편하게 나무에 기댄 채로?”

아직 그 정도 숙련자는 아닐 텐데. 아드리안의 삐뚜름한 웃음을 확인한 미하일이 탁, 하고 벤치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미하일의 나직한 음성이 아드리안의 귓가에 곧장 들려왔다.

“아직 네 이름이 없던데.”

“내 이름?”

“…….”

모른 척 넘어가려던 아드리안은 손안에 들고 있던 책을 턱, 하고 접으며 입을 열었다. 미하일의 곧은 시선이 여전히 벤치에 앉은 아드리안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잖아?’라는 표정이었다.

“다음 주 예선 말이야.”

“아하, 세리체인을 말하는 거군. 난 그런 거 신청할 생각이 없어. 그런 무식한 힘겨루기는 내 취향이 아니거든.”

“……너 정도 실력이라면 지금 접수한 어중이떠중이들보단 백배 가능성 있잖아.”

흠, 아드리안은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귀찮아. 참가 안 할 거야.”

힘 싸움에서 이기려고 유치한 호승심을 부릴 나이는 지난 지 한참이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단호한 주장에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몇 번이나 말할까 말까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본선을 통과한 참가자에게는 관람권 티켓을 준다고 하더라고.”

아드리안의 무심한 눈동자가 미하일을 향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런데? 나한테 그걸 왜……’라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과 마주 본 채로 입술 한쪽 끝을 슬쩍 올렸다. 어차피 저놈이 먼저 말뜻을 알아먹길 바란 적은 없었다.

“내게 관람권 티켓 한 장 정도는 보장되어 있다는 거지.”

미하일은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세리체인 무투대회의 본선에는 단 열 명만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당연히 자신이 그 열 명 안에 들 거라는 당당하고 오만한 자세였다. 아드리안은 가넷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웃고 있는 미하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러니 바보같이 관람권을 사지 말라는 이야기야.”

내가 그딴 표 정도는 그냥 줄 테니까. 어차피 일등을 할 거라 그에게 티켓은 아무 의미 없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집중해야 할 일은 저게 아니었다.

“그래? 티켓이 비싸다던데. 그냥 팔지 그래.”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에 미소를 짓고 있다가 싸늘한 눈빛으로 얼굴을 굳혔다.

“……내가 준 티켓을 팔기만 해 봐. 보러 왔는지 안 왔는지 꼭 확인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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