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고백에 그딴 식으로 대답을 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미하일. 네가 왜 난리야.”
아드리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슬쩍 웃으며 손에 든 교과서와 편지를 탁탁 정리했다. 케이지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상태였다. 미하일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손가락으로 케이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얘 표정을 봐. 적당히 예의 있고 부드럽게 거절해 줄 수도 있잖아.”
“……미하일, ……고마워.”
어느새 케이지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차 있었다. 흑, 흐윽 하고 작은 소리로 울음을 겨우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미하일. 나 대신에 화내 주다니 겉으로는 차가워 보였는데 따뜻한 면이 있구나. 케이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교복 소매에 스윽 문질러 닦으며 생각했다.
고마울 것까지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드리안이 케이지 리타나와 풋풋하게 연애를 시작하는 장면을 한껏 상상하며 따라온 미하일이었다. 그의 상상 속에서 그들은 매우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게다가 명망 있는 학자 가문의 손녀와 헤데라 상단의 자제라니 양가에서도 무척 반길 것이 뻔했다.
당연히 미하일에게 케이지를 감싸 주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고백한 사람 바로 앞에서 냉정하게 거절하는 아드리안의 무심함에 순간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훌쩍이는 케이지를 잠시간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잘게 떨며 울고 있는 케이지의 등을 툭, 툭 어색하게 두드렸다. 흡, 흐윽. 케이지는 그런 손짓에 서러워졌는지 더 크게 흐느꼈다.
“미안, 미안해. 울지 마.”
울고 있으니 위로는 해 주자 싶어서 미안하다는 말이 쉽게 입에서 나왔다. 그는 거절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심드렁한 표정에서 그 마음을 알아채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슬프게 우는 케이지를 쳐다보았다. 착해 보였는데 하필 저런 놈을 좋아하다니 불쌍했다.
적당히 서늘한 아드리안의 손바닥이 등에 몇 번 닿았다가 떨어지자, 케이지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슬쩍 몸을 틀었다. 그 움직임에 아드리안도 팔을 멈칫 굳혔다.
“됐어……. 나 먼저 가 볼게…….”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자신에게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마음은 없었다.
“그래. 내일 다시 만나자. 잘 가.”
“…….”
아드리안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케이지의 등을 바라보며 곤란하다는 듯이 자신의 뒷목을 슥 문질렀다. 조각상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아드리안을 미하일이 혀를 차며 비난했다.
“학기 시작 첫날부터 여자애를 울리다니. 너 최악이다.”
미하일의 비난에 아드리안이 번뜩 고개를 돌렸다. 최악이라니? 지금껏 몇십 명 정도는 가뿐히 울렸을 것 같은 미하일에게 그런 소리를 듣다니, 자존심 상했다.
“그런데 너는 왜 갑자기 끼어들어?”
“아까 말했잖아. 지나가던 길이었다고.”
“여기를 지나가? 훈련장은 반대 방향이잖아.”
“……그야 내 맘이지.”
미하일은 작게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다가 그제야 생각났던지 “이쪽 건물에도 훈련장이 있거든?”이라고 구차한 변명을 덧붙였다. 흠?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보곤 더 이상 추궁할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
입학식 때 사용되었던 바사미엘의 커다란 연회장을 다시 한번 학생들이 꽉 채웠다. 그때와는 달리 친한 친구도 생겼고, 바사미엘에 익숙해진 뒤라 그런지 신입생과 선배 구별 없이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물론 재미없는 수업 시간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 가장 컸다.
“각자 그룹끼리 모이세요!”
어느 교수의 조교로 보이는 남자가 웅성거리는 분위기를 정리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각자의 그룹이 지정받은 위치로 걸어갔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가넷 그룹 제일 뒤쪽에 나란히 섰다. 조교는 그런 학생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회장 앞 공간을 향해 손가락을 몇 번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빛의 마나 알갱이들이 잘게 빛나며 빈 공간에 단상 하나를 완벽하게 만들어 내고는 다시 푸스스 흩어졌다. 조교는 단상을 확인하고 짧게 박수를 두 번 쳤다. 열려 있던 커튼이 물 흐르듯이 촤라락 닫히면서 연회장의 환하게 들어오던 햇빛이 사라졌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테오르, 언제나 고마워요.”
청량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도란도란 친구와 이야기하던 학생들이 뚝- 수다를 멈추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이가 등장했다. 당연하게도 데클레어 파스터였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구불거리는 긴 머리칼이 찰랑이며 휘날렸다.
“오랜만입니다. 방학 동안 허전했던 바사미엘에 다시 젊은 기운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지네요.”
데클레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면서 인사를 했다. 호수에서 만났던 날, 시끄러운 아이들은 질색이라고 말했던 것이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저 표정에서 드러났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바사미엘에서 가을마다 진행되는 것이 있지요. 사교 클럽들에게 한 해의 가장 큰 수입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큰 지출이 생기는 날이기도 합니다. 단 삼 일 동안 열리는 이 축제를 준비하는 데에는 거의 한 학기가 다 사용된다 하던데요. 아 이런, 축제 때문에 학생들이 학업을 소홀히 한다고 제가 화를 내야 할까요.”
학생들은 저들 나이에 맞게 까르르 웃어 댔다. 공부라니! 공부를 하려고 아카데미에 들어 온 게 아닌걸, 라며 이상한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귀엽긴 하지만 그들의 학비로 들어가는 골드를 생각하자면 부모들은 마냥 웃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대신 이 축제는 단지 재미를 위해서 매년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학기 동안 각 학부에서는 한 해의 인물을 선정합니다. 그들이 대표가 되어 축제 서막을 알리는 파티의 주인공이 되죠. 예술 학부에서는 하나의 주제로 모든 예술 부문의 경합을 겨루는 통합 대회를, 기사 학부와 마법 학부에서는 무투대회를 개최합니다. 정령 학부와 연금술 학부 그리고 행정 학부는 학생들이 낸 특허나 논문의 성과로 선정하는 방식이죠. 책이 아닌 실전으로! 그게 바로 바사미엘의 정신이니까요.”
데클레어는 학생들보다 신난 투로 이야기했다.
“특히 피가 튀고 위험한 마법들이 날아다니는 무투대회는 제가 바사미엘에서 가장 좋아하는 행사랍니다. 결승전 관람권은 비싼 편이니 표가 풀리자마자 구매해 두는 것을 추천해요. 새 학기의 시작을 알리며 축제의 서막을 올려 볼까요?”
데클레어는 장난꾼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연회장의 학생들에게 턴을 넘기듯이 팔을 내밀어 손바닥을 위로 보였다.
“그 이름하여-”
그러자 쿵! 하고 학생 몇 명이 발을 굴러 커다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학생들은 와아- 하는 환호성을 내며 팔을 공중으로 흔들었다.
“바사미엘의 꽃, 세리체인 축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회장 공중 어딘가에서 하늘하늘한 꽃잎이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 학생들은 연회장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며 밝게 웃었다.
“저도 기대할게요. 이게 오늘 여러분들을 여기로 부른 이유였어요. 그럼 다시 수업을 들으러 돌아가세요.”
교장은 제 할 말을 끝내곤 연단에 올라왔을 때처럼 절도 있게 내려갔다. 그 이후 처음 연단을 만들었던 조교가 마법으로 연회장을 정리했다.
아드리안이 다른 학생들과 섞여 연회장을 걸어 나가려 할 때였다.
“아드리안, 방학 잘 보냈나요?”
연회장의 앞쪽에 서 있었던 정령학 수업의 교수인 올리비아 리네이가 말을 걸어왔다. 아드리안은 나가려던 몸을 우뚝 멈춰 세워 올리비아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그래, 그래 저번에 우리가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시죠?”
아,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올리비아가 방학 이전에 제안했던 1,000틸론이 걸린 조수 일이었다. 아드리안은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밝게 웃으며 교수님의 손을 맞잡았다.
“당연하죠. 오늘 바로 시작할까요?”
“가능하다면 그게 좋겠네요. 일손이 부족해서 연구 과제가 늦어진다는 카일의 이야기에 질린 참이거든요. 여기 그때 말한 500틸론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손등을 스윽 한 번 쓸어내리고는 손가락을 아드리안을 향해 내밀었다. 그에 아드리안은 틸론의 계약을 성사된 것을 확인했다.
[732틸론]
흐리게 빛나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카일? 아드리안은 올리비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곧장 떠오르는 학생 하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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