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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87화 (87/184)

87화

아드리안은 한 손에 편지와 책을 들고선 케이지가 이야기한 사자 조각상 앞에 편하게 기대 서 있었다. 케이지는 수업 전 편지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꺼내 읽으려던 아드리안을 다급하게 말렸다. 그러고선 꼭, 꼭 수업이 마친 후 혼자 있는 곳에서 편지를 확인한 후 조각상 앞으로 나와 달라고 말했었다.

아드리안은 아주 예의 있는 드래곤이었으므로 수업 이후 조용한 복도 끝으로 걸어가 편지를 읽었다.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는데, 대충 읽었지만 완벽히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대답은 사자 조각상 앞에서 해 줄래?

-케이지 리타나-’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할 일 없이 조각상 앞을 지나다니는 다른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학생들은 삼삼오오 환하게 웃고 떠들어 댔다. 그중 몇 그룹은 둘이서 묘한 분위기를 내는 것이, 어색하지만 행복해하는 연애 초반의 커플처럼 보였다. 실제로 새 학기를 맞은 바사미엘에는 여기저기서 풋풋한 연애 기류가 샘솟고 있었다.

-다음 주 주말 외출에 나랑 같이 가는 거다?

-……당연하지. 본관 앞에서 만나자.

-진짜? 재밌을 거야. 내가 유명한 식당이랑 카페에 예약해 뒀어!

-우와, 기대된다!

-나도…….

앳된 커플이네.

아드리안은 조각상에 기댄 채 그들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굳이 듣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귀를 닫을 수는 없었다.

‘나를 여기로 부른 것도 저런 이유겠지.’

아드리안은 마음속으로 한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별 내용도 없던데, 왜 굳이 수업 전에는 못 읽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대답은 여기서 해 달라고 하니, 하는 수 없이 아드리안은 편지에 적힌 시간에 맞춰 조각상 앞에서 케이지를 기다렸다.

빠르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앗, 아드리안!”

그리고 케이지의 밝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 왔다. 싱그러운 정원의 녹음을 배경으로 부드러운 그녀의 긴 금발 머리가 찰랑거릴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케이지는 조각상 앞으로 한달음에 도착했다.

“역시 와 줬구나. 고마워.”

“……응. 편지를 읽었거든.”

고맙다니. 별걸 다.

아드리안은 살풋 미소를 지으며 케이지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붉힌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학생 하나와 그 앞에 선 잘생긴 학생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아름다운 한 쌍의 커플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때였다. 상쾌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아드리안의 반짝이는 금발 머리칼을 살랑 흔들었다.

“어? 잠깐만…….”

케이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드리안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응? 아드리안은 움직이는 그 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 몸에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할 가냘픈 손가락이라 피할 이유는 없었다.

따뜻한 손끝이 귀와 이어지는 턱 근처에서 느껴졌다.

두근두근, 바로 앞에 선 인간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드래곤의 뛰어난 청력에 거슬릴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게…….”

케이지의 숨결이 아드리안의 어깨에 닿았다. 조금 간지러웠다. 케이지가 아드리안의 뺨 부근에서 뭔가를 살짝 떼 주었다. 뺨에 붙은 나뭇잎에만 집중했던 케이지의 푸른 눈동자가 슬쩍 움직였다. 당황했는지 웃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은 아드리안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따뜻한 밀색 눈동자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아, 이게 붙어 있어서! 내가 떼 주려고 했는데. 미안.”

상대의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던지 케이지는 민망하단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든 조그만 나뭇잎을 보여 주었다.

“괜찮아. 고마워.”

아드리안이 씨익 웃었다. 케이지는 그 미소에 화악 얼굴을 붉혔다. 바사미엘에 들어오기 전에는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질 수 있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녀였다. 이렇게 같은 반 남학생에게 반해 입학식 때부터 짝사랑이나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먼저 고백을 할 줄이야! 방학 전에 야심차게 건넨 쿠키를 스스럼없이 받아 줬던 걸 보면 아드리안 역시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갑자기 편지를 받아서 놀라긴 했겠지.

이제는 편지에 대한 답을 들어 봐야 할 때였다. 내내 저렇게 웃어 주고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것을 봐서는 아드리안 또한 마음이 없지는 않을 거였다.

“그래서…….”

아까부터 큰 소리를 내며 뛰던 케이지의 심장 소리가 더 커졌다. 자신을 굳이 여기로 불러낸 이유를 빨리 해치우고 온실로 가고 싶을 뿐일 아드리안은 겉으로는 전혀 티 내지 않은 채 “응.”이라고 말했다.

“내 편지에 대한 대답을 해 줄래?”

“그래. 우선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아드리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단호한 거절을 이어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드리안.”

발소리가 들리더니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풋풋한 분위기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왔다. 아드리안과 케이지의 얼굴이 그곳으로 동시에 홱 돌아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미하일은 급하게 뛰어왔던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훼방꾼은 잠시간 숨을 가다듬다가 아드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해.”

그에 잔뜩 긴장한 채 아드리안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던 케이지가 울상인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겐 중요한 순간일지언정, 왕자님의 볼일보다는 사소한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아 변명거리를 생각 안 해 뒀네.

물론 미하일에겐 중요한 일 따위는 없고 오로지 둘의 고백 분위기를 훼방 놓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사자 조각상 앞에서 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걸어왔다. ‘뭐야, 갑자기.’라는 표정인 아드리안의 표정을 애써 모른척하며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 보고 인사도 못 할 사이야?”

“…….”

그런 사이 아니었나?

아드리안은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미하일의 얼굴을 바라봤다.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의 눈빛에도 꿋꿋이 모른척하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입을 열려던 아드리안은 바로 옆에서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케이지를 알아차렸다. 아, 더 급한 일이 있었지.

일이 복잡할수록 한 번에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이 맞았다.

“아무튼 잠시만 기다려 줄래? 케이지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 말에 케이지는 고개를 위아래로 세게 끄덕였고, 미하일의 눈빛이 짜증스레 빛났다. 기껏 뛰어온 보람이 없잖아.

“……그러든가.”

미하일은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팔짱을 꼈다. 자리를 피해 줄 만큼의 매너 정신을 발휘하지 않는 미하일을 케이지가 힐끔 바라봤으나 감히 왕자에게 그런 요청을 할 수 없었다.

“하려던 말 계속해도 될까?”

“어, 어. 응.”

대답은 어차피 옆에 미하일이 있건 없건 정해져 있었다. 갑자기 끼어들어 말을 끊지만 않았어도 몇 분 만에 끝낼 수 있었던 볼일이었다. 케이지는 표정과는 달리 은근히 냉정한 기운이 느껴지는 아드리안의 음성에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건 내가 생각한 그림이 아닌데.’ 그녀는 아드리안을 잔뜩 긴장한 채로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은 오늘치 남은 일감을 빠르게 해치우려는 듯이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은 고맙지만 난 바사미엘에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어. 미안해.”

“……!”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두근거리던 케이지의 심장 소리가 순간 뚝 멎었다.

고백 편지를 읽고 조각상 앞에 나와 준 것에서 이미 반쯤은 고백이 쌍방으로 이뤄질 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아드리안의 대답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게…… 내 고백을 거절한다는 이야기? 케이지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충격받은 케이지를 바로 앞에 놔두고 아드리안은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럼 가 봐도 되지? 내가 지금은 온실을 들려야 해서…….”

내일 보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거절로 받은 충격은 케이지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컸던 모양이다.

“뭐? 너 미쳤어?”

미하일이었다.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드리안과 케이지의 대화를 듣고서는 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눈앞에서 거절을 당한 케이지보다 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아드리안은 조각상에 기대 있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우다가 미하일의 그 표정에 멈칫했다.

왜 네가 더 난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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