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11. 운명
왕성에서 돌아온 이후 아드리안은 원래의 계획대로 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온실을 관리하고 평화로운 숲을 즐기는 것 말이다. 아드리안이 아침에 일어나 옆 침대를 확인할 때면 언제나 미하일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 누구도 루스타바란 왕가의 막내 왕자에게 소드 마스터라는 높은 기준을 들이댄 적 없었는데. 아드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드레스 룸으로 걸어갔다. 방학 동안 입지 않았던 바사미엘의 교복을 입으려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있으니 본관 앞에서 자유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아드리안이 싱그러운 풀 내음을 맡으며 중앙 정원의 벤치에 앉아 표지에 <친들리니 나무의 생태 파악과 서식지 연구>라고 쓰인 책을 펼쳤다. 누군가 벤치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안녕!”
“오랜만이야. 방학 잘 지냈어?”
“응, 응.”
오랜만에 만난 유시는 아드리안의 형식적인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강 대답했다. 인사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일종의 신호였으나 아드리안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인사를 끝냈다고 생각한 아드리안이 읽고 있던 책에 다시 시선을 내린 참이었다. 벤치 바로 앞까지 유시가 다가오자 그녀의 구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드리안. 잠깐 시간 괜찮아?”
“응. 무슨 일 있어?”
귀찮게 인사를 두 번이나 하려는 건가? 그는 다시 책에서 시선을 떼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드리안은 귀엽게 난 덧니를 드러내고 웃기만 하는 유시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아드리안의 물음에도 유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저 의미심장한 웃음은 뭐지? 아드리안은 펼쳤던 책을 탁, 하고 한 손으로 덮었다. 아드리안의 옆자리에 털썩 앉은 유시가 조잘거렸다.
“참 나, 아니 네가 잘생긴 건 인정하지만 말이야…… 어떻게 한 학기 만에 먼저 고백을 하게 만들어? 응?”
유시는 “응?”이라고 말하면서 팔꿈치로 푸욱 아드리안의 팔을 찔렀다. 아프진 않았으나 아드리안은 다른 사람과 닿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유시의 팔꿈치가 닿았던 팔을 내려다보던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다시 유시에게 향했다.
“고백? 무슨 말이야?”
“안 그렇게 생겨서 또 묘하게 눈치도 없고…….”
유시는 제 친구가 안타깝다는 듯이 짧게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
그러다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드리안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 정도나 말해 줬으면 뭐 생각나는 게 없어?”
“……미안한데 제대로 말해 줄래?”
솔직히 미안할 것까진 없으나, 답답해하는 유시의 표정에 아드리안은 슬쩍 눈치 보면서 질문했다. 그러자 유시는 가지고 있던 가방을 허벅지 위에 턱 올리더니 편지를 하나 꺼냈다.
“자.”
“네가 쓴 편지야?”
“뭐어? 아니야!”
유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무슨 내가 이렇게 낭만 없이 고백 편지를 직접 전달해 주겠어?”
“그럼?”
아드리안은 유시의 손에 들려 있는 편지를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그의 질문에 대답하듯이 개구쟁이 같은 유시의 미소가 따라왔다.
***
미하일은 강의실에서 떠들고 있는 학생들을 둘러보고는 의자에 푹 눌러 앉았다. 아까부터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무슨 일 있나?
미하일은 살짝 몸을 일으켜 다시 한번 강의실 전체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의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아침 훈련을 끝내고 곧바로 강의실에 도착했던 미하일은 뚱한 표정으로 턱을 손등에 괴었다. 특이했다. 아직 수업 시작까지는 시간이 있었으나 그래도 늘 수업 시간 전에는 들어왔는데……. 물론 당장 고대의 화산 앞에 가져다 놔도 괜찮을 놈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미하일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러고 있는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아드리안 찾아?”
그런 왕자의 행동에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미하일의 짜증 난 눈동자가 그쪽으로 향했다. 유시였다.
“…….”
미하일은 잠깐 동안 고민했다. 한편으로는 아드리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다는 마음이 절반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뭔가 알고 있어 보이는 유시에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고민이었다.
결국 미하일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강 정리하는 척하며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면?”
“조금만 기다리면 들어올 거야. 지금은 엄청 바쁠걸.”
유시가 씨익 웃었다. 미하일은 “그게 무슨 소리야?”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머지 학생들의 표정을 살폈다. 가넷의 학생들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수업 전에 내가 편지 하나를 대신 전달해 줬거든.”
무슨 편지? 미하일은 그런 유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아카데미용 구두가 대리석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은 어떤 학생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강의실에 도착했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아드리안과 강의실에 들어온 학생은 케이지 리타나였다. 그녀는 아드리안에게 “……사자 조각상 앞에서 만날 수 있길 바랄게.”라고 말을 건넨 뒤 자신의 친구들이 이미 앉아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아드리안은 특유의 표정으로 케이지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케이지의 친구들은 잔뜩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맞았다.
끼익, 아드리안은 아직 비어 있는 의자를 뒤로 잡아 뺐다. 강의 시작 직전까지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 미하일의 바로 옆자리였다. 미하일은 적당히 품위 있는 모양새로 옆에 앉는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왜?”
그 시선을 알아챈 아드리안은 수업 교재를 대강 정리하면서 입을 열었다. 옆에 앉았다고 불만인 건가? 그러나 여기 외에는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
“응?”
“아니, 아니야.”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미하일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꾹 다물어졌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쓸데없는 질문 하나가 튀어나갈 뻔했다. 스스로도 지금 제 자신의 기분이 도대체 왜 더러운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어디에 다녀온 거지? 그것도 저 애랑.’
그와 같이 강의실에 들어와 앉은 학생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그제야 그 학생이 이전에 얼굴을 붉히며 아드리안에게 쿠키를 내밀었던 사람임을 알아챘다. 명망 있는 학자 가문의 손녀로, 왜인지는 몰라도 아드리안을 좋아하는.
“싱겁긴.”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다 피식 가볍게 웃고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곧이어 강의실 문이 가볍게 열리고 교수가 걸어 들어오는 소리에 학생들의 조잘거림이 삽시간이 줄어들었다.
***
조용한 바사미엘의 복도를 아카데미용 구두가 절도 있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복도를 곧바로 질러가면 검술 훈련장이 나왔다. 미하일의 빠른 발걸음은 그 복도를 지나면서부터 점점 느려졌다. 오늘은 가볍게 달린 후, 대련을 신청해서 진검 훈련을 해야 했다. 어제 읽었던 검법서에서 설명한 검식 훈련도 해 볼 참이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모든 수업을 들으면서 지금껏 마음에 차는 만큼 훈련을 해 본 날이 없다시피 했다. 거의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 훈련 몇 번만 하다 보면 어느새 기숙사의 통금 시간이었다.
검대 바로 위의 흰 손가락이 답지 않게 꾸물대며 움직였고, 멋들어진 그의 입술이 삐죽 위로 솟았다가 이내 원상태로 돌아왔다.
젠장. 미하일은 고작 이런 일로 고민을 하는 제 자신을 향해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그는 복도 중앙에 멈춰 선 채 구두 뒤축을 바닥에 툭툭 부딪쳤다. 미하일에게는 이런 잡스런 고민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드리안의 것만큼은 아니지만, 얼굴을 붉힌 채 밝은 금발을 귀 뒤로 넘기던 학생의 얼굴이 미하일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사자 조각상 앞에서 만날 수 있길 바랄게.’
수업 직전 아드리안에게 그렇게 얘기했었지. 사자 조각상이라면 왼편에 나 있는 아치형 통로로 나가면 곧바로 보이는 그거였다.
미하일은 자연스레 왼쪽으로 향하던 자신의 몸을 억지로 돌렸다. 그의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가 터벅터벅 복도를 몇 번 울렸다가…… 도중에 홱! 목적지를 갑자기 바꿔 선회하듯이 왼쪽의 아치형 통로를 통과했다.
“확인만 해 보자.”
미하일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런 상태로는 훈련이고 뭐고 집중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확인만, 확인만 하고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가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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