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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85화 (85/184)

85화

‘인정 못 해.’

카를로는 눈을 치켜뜨고는 이를 악물었다. 절망적인 상황이긴 해도 아직 대륙의 운명을 바꾸겠다는 갈망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이 말하는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조금 더 기다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내게 시간을 더 줄 수 있잖아.’

‘…….’

드래곤의 금빛 눈동자가 무미건조한 움직임으로 눈앞의 인간을 빤히 향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만으로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존재, 순수한 고대의 존재 앞에 선 카를로는 힘을 줘 손을 꽉 쥐었다.

카를로는 그와 함께 지냈던 시간만큼, 루스 페니건의 인간 모습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어두운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금색의 마나 알갱이들을 두 눈으로 마주하자, 카를로는 새삼 그가 알던 루스 페니건이 인간이 아님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금빛 마나의 기운에 감싸인 드래곤이 무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나와 흥정을 하겠다는 건가?’

드래곤의 말은 의문형이었지만, 의문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젠장, 카를로는 일말의 자비 하나 보이지 않는 루스의 얼굴에 속으로 욕을 뱉었다.

‘……루스.’

십수 년간 조용히 옆을 지켜 왔던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어두운 던전에서 목숨을 한 번 빚진 이후, 썩어 빠진 왕국을 무너뜨리기까지 칠 년이 걸렸다. 카를로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매캐한 검은 연기와 무너진 저택,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들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오랜 전통과 부를 자랑하던 이네하트 가문은 던전을 둘러싼 귀족 가문들의 알력 싸움으로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던전에 있다던 ‘대륙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보물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카를로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것은 그 보물이 아닌 드래곤이었다.

애초에 몰락한 가문의 한정된 자원만으로는 꿈도 못 꿀 계획이었다. 루스가 이 계획에 동참해 주지 않았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그 수많은 역경을 함께 헤쳐 온 동료가 떠나간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루스……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조금 더 내 곁에 있어 줘.’

카를로는 잘게 떨리는 입가를 최대한 진정시키려 애쓰며 입술을 열었다. 고귀한 귀족으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이렇게 애원해 본 적 없었던 남자가 눈앞의 존재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루스타바란 왕국에는 드래곤의 힘이 필요했다.

‘넌 나를, 나를 잘 알잖아. 내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내가 너를?’

매일 훈련장에서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검을 쥐던 놈이었다. 즉위한 이후 바쁜 정무에도 훈련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드래곤은 새벽마다 검을 휘두르는 남자의 루틴을 무심한 표정으로 구경하곤 했다. 루스타바란 왕국은 대륙에서 최강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장 넓은 토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갓 즉위한 왕의 권력은 불안했다. 그렇기 때문에 카를로는 스스로 대륙 최강의 전력이 되기를 원했었다.

흐음, 골드 드래곤의 잘생긴 입술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걸 정정해 줘야겠군. 우리가 지금껏 함께 보냈던 칠 년은 내겐 그냥 하룻밤짜리 연극과 다를 게 없거든.”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대강 정리하며 말했다. 자신이 이런 설명까지 해 줘야 하는 것이 귀찮다는 투였다. 동시에 스스로 손목에 낸 상처에서 울컥, 붉은 피가 더 샘솟아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투욱, 인간계의 메마른 대지가 고귀한 존재의 피를 만나 기쁨의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드래곤의 귀에만 울려 퍼졌다.

‘그래서 네가 내게 이렇게 애원하는 건…… 내 결정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해.’

‘……아.’

아아, 카를로는 허탈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잘게 몸을 떨었다. 하하하, 카를로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양팔로 몸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그간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저 위대한 존재가 나의 잠재력을, 능력을 알아봐 주고 특별하게 생각하여 함께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 혼자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이 전신을 스쳐 지나갔다.

‘마셔.’

드래곤의 고고한 음성에 카를로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붉은 눈동자 앞에 드래곤의 팔이 내밀어졌다. 카를로는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그 행동을 내려다보던 금빛 눈동자가 살풋 접히며 반짝였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거지.

꿀꺽, 꿀꺽. 인간은 드래곤의 피를 입에 대고 탐욕스럽게 마셨다.

그의 입가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를로의 붉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탁해졌다. 드래곤의 진한 마나가 그의 몸 전체로 퍼져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피와 카를로의 마나가 몸 안에서 섞이면 검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이전과 다르게 수월할 것이다. 뭐, 이후 카를로의 후손들이 조금 고생하겠지만. 드래곤이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윽, 카를로는 울컥하고 몸 안에서 치받아 올라오는 핏물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핏줄기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마나 충돌이 일어나 한동안 각혈을 할 것이다.

‘어때, 그토록 원하던 소원을 이룬 기분은?’

그는 그 상태로 주저앉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바로 앞에 서 있는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가에 흐른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나며 그를 원망하듯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것을 내려다보는 금색의 눈동자는 샐쭉 웃기만 할 뿐이었다.

카를로는 피범벅이 된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몸 안의 마나를 확인하려는 듯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소드 마스터의 탄생이었다.

드래곤이 손대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결과물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결실을 꽃피웠다.

드래곤에게는 이번 일도 역시 시시했다.

***

따뜻한 밀색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또렷하게 빛났다. 루스타바란 왕성의 분위기가 자꾸 이 몸을 예전의 기억 속으로 삼키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무의식적으로 팔을 약간만 옆으로 뻗었다가 미간을 한 번 찌푸리고는 협탁에 닿도록 팔을 더 길게 뻗었다.

그는 간밤의 꿈을 마셔 넘기려는 듯이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천천히 따른 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청량한 물이 아드리안의 정신을 확 깨웠다. 비싼 잠옷 소매에 대강 입술을 스윽 문질러 닦은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빨리 바사미엘로 돌아가야겠어.”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드래곤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어제 식사 자리에서 알릭스에게 들었던 ‘검은 마나’의 정체. 소드 마스터가 없어서 루스타바란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사실에 또 다시 휘말려 드는 것은 사양이었다.

눈을 감고 바사미엘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을 케비쉬 나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솟아나고 있을 약초들도. 드래곤은 매번 제멋대로 굴고 즉흥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인간들과는 달랐다.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미하일은 어디에 있지?

살짝 마나를 끌어 올려 왕성 안에 있을 미하일의 위치를 확인한 후 아드리안은 망설임 없이 성의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미하일은 굳이 마법으로 찾지 않았어도 예상 가능한 그곳에 있었다.

왕성의 훈련장이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텅 빈 공터에서 미하일은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망설임 하나 없이 훈련장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검을 검집째 하나 집어 들고 미하일에게 걸어갔다. 쇳조각이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순간이었다.

쾅!

불쾌한 마찰음이 났다. 아드리안이 방금 집어 든 검집에 미하일의 검이 내려찍히며 만들어진 소음이었다.

후욱, 후욱 미하일의 커다란 몸통이 산소를 갈구하며 몸을 부풀렸다가 줄어들었다. 검과 검집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미하일과는 달리 검집을 들고 있는 아드리안의 표정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평안했다.

미하일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무 뻔했다. 아드리안은 조급해하는 어린 인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진정해.”

스윽, 날카로운 검이 박히지 않도록 검집을 비틀어 횡으로 움직였다.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며 숨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마저 숨을 고르며 천천히 검을 거두어 검집에 집어넣었다.

미하일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진정? ”

“…….”

“이 왕국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진정할 수 있지?”

“아직 원인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잖아.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기다리면 되는 거야.”

미하일을 잠시간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돌아가자. 바사미엘로.”

아드리안의 단호한 목소리가 커다란 훈련장을 울려 퍼졌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의 전음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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