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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84화 (84/184)

84화

어색한 식사 시간이 끝난 후, 아드리안은 왕성의 복도를 혼자 걷고 있었다.

문득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오른편의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연회장 같은 커다란 방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방에는 커다란 벽화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벽화를 잠깐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다시 가던 길을 가려다가 휙 몸통을 빠르게 돌려 그 문 앞으로 걸어갔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문을 열어젖히고 한 발짝씩 벽화 앞까지 걸어온 아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벽화 전체를 눈에 담았다.

그는 바닥의 마법진을 확인했지만 개의치 않고 벽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어차피 그에게 이런 보안 마법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누군가 연회장에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입을 삐죽 비틀면서 벽화에서 세 발짝 뒤로 떨어졌다.

연회장에 들어온 관리인은 손님이 벽화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 적당히 예의 있는 자세로 주의를 주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작품은 조금 떨어져서 감상해 주시지요. 보안 마법이 걸려 있어서 벨이 울린답니다.”

“아, 네. 주의하겠습니다.”

아드리안은 아름다운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충 대답했다. 관리인은 그런 손님을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가까이 걸어왔다. 왕성에 온 손님들 중 이 벽화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건국왕 신화를 좋아하시나 봐요.”

“………좋은 작품이라 계속 보게 되네요.”

차마 건국왕 신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아드리안은 객관적인 감상평을 말했다. 숙련된 화가의 붓질과 적절한 색감이 그날의 분위기가 아주 잘 표현된 벽화였다. 관리자는 손님이 바라보고 있는 벽화의 윗부분을 슬쩍 바라보았다.

금발 머리의 남자가 건국왕인 카를로 데 이네하트에게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진상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카를로 데 이네하트 님과 대마법사가 정확히 어떤 사이였는지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만? 아드리안은 관리인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시선을 벽화에 고정했다.

“가장 유력한 것은 드래곤이 인간계에 내려와 카를로 건국왕을 도왔다는 설이죠. 혹시 루스타바란 왕가에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는 전설을 아십니까? 저 드래곤이 왕의 아름다운 얼굴에 반해서 인간계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유희의 법칙을 스스로 깨고 자신의 피를 건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저 벽화의 드래곤의 손에 들린 병이 그걸 표현한 거랍니다, 그는 아드리안이 미하일 왕자의 손님인 것을 알고 있던지, 은근히 자랑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무척 닮으셨죠.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님이 건국왕 카를로 님의 환생이라는 소문이 날 만도 합니다. 안 그런가요?”

인간들이란 언제나 저들만 특별한 줄 아는 족속들이었다. 흥, 아드리안은 관리인에게 보이지 않는 쪽의 입꼬리만 슬쩍 비틀어 올려 웃었다.

환생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특이하시군요. 대부분 낭만적이라고 좋아하시던데.”

관리인의 추임새에 아드리안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어차피 골드 드래곤은 ‘대부분’이라는 그룹에 속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 환생이란 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지옥이란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매번 같은 영혼들과 살아가고 똑같은 운명을 선택한다면…… 이 지루한 세계가 한층 더 지루해질 뿐이었다.

***

‘곤란한데.’

금빛 눈동자가 왕성의 바깥으로 향했다. 높은 왕성의 창문 밖에는 음산한 하늘만이 보였으나, 드래곤의 눈과 귀에는 더 많은 정보가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왕성의 외벽에는 꼬질꼬질한 차림의 소년이 등을 대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어린 소년의 품에는 아기가 새액새액 숨을 힘겹게 내뱉고 있었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앙- 소년의 품에 안긴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소년은 가느다란 팔로 힘겹게 포대기에 감싼 아기를 들고 울먹였다. 그러나 저 스스로의 슬픔보다는 품 안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을 달래고는 싶은지 눈동자에 물이 맺힌 상태로 조그만 손을 들어 등을 토닥였다. 아기는 마치 이 절망적인 상황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듯이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드래곤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인간들이 처한 상황은 멸망의 운명을 받아들인 엘 메르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드래곤은 유희에서 맡은 역할에 충실한 선택만 했다. 한때 그는 용병단의 단장이었기 때문에 수상한 의뢰를 수락했다. 일개 용병 단장의 ‘역할’에 맞게 귀족들의 알력 싸움이라는 의뢰의 이면을 모른 척해야 했다. 그것이 그 용병 단장의 운명이었으니까.

그러나 던전에서 드래곤은 유희의 법칙을 스스로 깨트렸다. 루스 페니건은 카를로 데 이네하트를 되살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법칙을 깨트린 드래곤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인간들은 울 수 있었으며, 그들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는 것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 아이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드래곤의 귀를 찔러 들어왔다.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그 울음소리는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골드 드래곤은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는 이 왕성을 중심으로 들리는 모든 인간들의 절망적인 울음소리와 신음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이 모든 절망을 만들어 낸 것이 결국 저 자신임을 알고 있는 드래곤은 어둠속에서 눈을 질끈 감은 채 신음했다.

고민에 잠긴 것은 드래곤뿐만 아니었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생각과 달리 시간을 끌었다. 카를로는 비보를 가지고 온 전령을 향해 되물었다.

‘물자는 얼마나 남았지?’

‘……남아 있는 것이라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전령은 마치 최후의 희망이 있다는 듯이 간절한 목소리로 카를로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마법사님께서는…… 아직이십니까?’

‘…….’

왕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감싼 채 그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왕성에서 대마법사 흉내를 내고 있는 이가 사실은 골드 드래곤이라는 것은 카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골드 드래곤은 이 전쟁에 도움을 주지 않겠노라 직접 말했었다.

후, 카를로는 전령의 보고를 들은 후 한 참을 고민하다 루스 페니건의 방문 앞에 섰다.

‘루스, 방에 있어?’

그러고는 방문을 정중하게 노크했지만, 그 노크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의아함에 “잠시 실례……”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열던 몸이 순간 멈칫 굳었다.

사아아, 방문을 열자마자 스산한 바람이 카를로의 몸 전체를 빠르지만 느리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은 그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인영 하나가 한 뼘 높이 정도 공중에 뜬 채로 서 있었다.

‘……루스?’

카를로는 우두커니 서 있는 골드 드래곤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가득 채울 때였다.

번뜩- 루스의 눈꺼풀이 열렸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카를로는 그 움직임에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마치 태양 두 개가 조그만 방에 들어온 것처럼 경외로운 광경이었다. 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존재감으로 지금처럼 스스로 밝은 빛을 내리라. 금빛 눈동자로 어두운 방 안을 환하게 비추는 루스 페니건의 모습은 지독히 비현실적이었다.

굳게 닫혀 있었던 루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카를로.’

신의 전음처럼 고고한 목소리가 한낱 인간들의 왕을 지목했다.

‘그때 우리는 내기를 하나 했었지. 그 내기의 결과를 말해 주겠다.’

‘…….’

카를로의 눈동자가 ‘내기’라는 단어에 이채를 달리했다.

지금 드래곤이 말하고 있는 내기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로는 그때 그 던전 안에서 목숨 하나를 빚졌으며, 자신의 운명을, 아니 이 대륙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었다.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한다면.’

골드 드래곤은 카를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본 채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전쟁을 직접 끝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

‘…….’

지이익-

드래곤의 단정한 손톱이 자신의 손목 한가운데를 긁었다. 그러자 붉은 속살이 벌어지며 붉은 핏줄기가 그의 흰 팔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광경에 카를로는 눈을 크게 뜨며 왠지 모르게 옴짝달싹도 할 수도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왜 갑자기 내기를 끝내려는 거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을 텐데.’

카를로의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굳이 더 기다릴 필요가 없이…… 네가 졌거든.’

내용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투둑, 드래곤의 고귀한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드래곤은 팔을 조금 내민 채로 카를로의 결정을 기다렸다. 왕성 밖의 살풍경은 그들이 내기한 것의 결과물이었다. 카를로는  대륙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고, 혼자만의 힘으로 소드 마스터가 될 수도 없었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카를로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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