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83화 (83/184)

83화

“루스타바란 왕가의 후손으로서 직접 확인을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정말로 위대하신 골드 드래곤님께서 인간계에 다시 내려오셨을지도 모르잖아.”

아드리안은 두 왕자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고 차를 마셨다.

알릭스는 ‘위대하신 골드 드래곤님’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할 때 슬쩍 입술을 비틀었다. 그 비웃음에서 알릭스가 건국왕 신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물론 정말로 지금 저 금발 머리 평민이 그 유명하신 대마법사라면 목의 상처 정도야 숨 쉬는 것처럼 쉽게 치료했겠지만.”

툭, 알릭스는 맞은편에 앉은 금발 머리 평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 전체에서 마나의 움직임은 단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릭스는 그가 대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닌 것 같고.”

“겨우 소문을 확인하려 제 친구를 왕성으로 초대했다는 겁니까?”

“…….”

뭔가 더 있었다. 미하일은 알릭스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알릭스는 미하일의 질문에 찻잔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그의 남동생은 은근히 이런 데서 눈치가 빨랐다.

바사미엘에 입학한 후 루스타바란 왕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던 미하일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 루스타바란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알릭스는 왕국을 사랑하는 착한 막냇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막냇동생은 루스타바란을 진정으로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는 왕족들 중 하나였다. 알릭스는 미하일의 그런 점을 아꼈고, 그렇기에 굳건한 왕위 계승권을 흔드는 소문에도 어쩔 수 없이 관대하게 구는 것이었다. 만약 미하일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어림도 없는 처사였다.

“왕국의 끄트머리 섬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 현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군.”

미하일은 처음 듣는 소식에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현상입니까? 바사미엘에서는 아무 이야기가 없었는데.”

“아직 파악도 안 된 정보를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 우선 그 근방을 폐쇄하고 원인 파악을 하는 중이다. 왕성 기사단도 절반이나 원인 조사를 하러 떠났어.”

“그렇군요.”

미하일도 알릭스의 의견에는 동의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굳은 채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이라함은?”

“나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파견 갔던 내 휘하의 기사 하나가 말하길 ‘검은 마나가 땅에서 새어 나오고 있다.’라고 하던데. 아무튼 처음 발견 당시보다 점점 범위가 넓어지고 있어. 중요한 점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솟아나고 있다고 해.”

땅에서 솟아나는 검은 마나.

알릭스의 말을 듣던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차를 마시던 아드리안의 눈빛도 날카로운 모양새로 알릭스를 향했다. 둘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도헤니어 화산’에서 봤던 그것이 번뜩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마법협회 데 룰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헛소리만 하면서 시간을 더 달라고만 하고 있지. 하여간, 마법사들은 정작 필요할 때에는 이상한 말로 얼버무리기만 한다니까.”

탁, 알릭스는 손가락을 퉁겨서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을 불렀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테이블 위의 찻주전자를 들어 올려 알릭스의 찻잔에 천천히 따랐다. 적당한 높이로 투명한 차를 따른 후, 사용인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알릭스가 찻잔을 손가락에 걸쳐 들어 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얼마 전에 집무실에 사색이 된 표정으로 뛰어들어 와서는…… 뭐라고 했지? 그 검은 마나에서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기운이 느껴진다나.”

하, 알릭스는 가볍게 혀를 차고는 답답하다는 듯이 뜨거운 차를 몇 모금 삼켰다. 그곳으로 파견한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세상이 망할 징조’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들이 딱 하나 쓸모 있는 일을 했다면…… 몇백 년 전에 이와 아주 유사한 현상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는 거야. 루스타바란 건국 시기에 마물들이 떼로 인간계에 넘어온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있기 몇 년 전에도 지금처럼 검은 마나가 대륙 곳곳에서 솟아나왔다고 하더군.”

일주일 전, 알릭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그 기록들을 보고받았다. 멸망을 앞둔 인간들의 참혹한 울부짖음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루스타바란의 건국왕 카를로 데 이네하트 덕분에 그 마물 떼를 간신히 처리할 수 있었다.

“지금 대륙에는 소드 마스터가 없으니 만약 그때처럼 다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이번이야말로 대륙에 인간들이 멸망할지도 모른다.”

알릭스의 두 눈동자가 맞은편에 앉은 미하일과 아드리안을 향했다.

“그 기록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

‘오랜만이군.’

골드 드래곤은 세심하게 조각된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테라스 밖에 시선을 두었다. 엘프의 왕국 중 하나인 엘 메르는 인간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맥의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탓에 왕성의 응접실 테라스 밖은 구름들이 고고하게 가라앉아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급히 연락드렸는데,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드래곤은 차를 마시던 한쪽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엘 메르 왕국의 초대는 드래곤의 게으른 마음을 한 수 접게 만들 정도로 언제나 정중했다.

‘당신께 마지막 인사는 제대로 드리고 싶었습니다.’

드래곤의 금을 갈아 넣은 듯한 금빛 눈동자가 힐끔, 엘 메르의 왕 페나트에게 닿았다. 그가 말한 마지막 인사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차로 목을 축인 드래곤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내 도움이 필요한가?’

‘아니오. 오히려 저희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도움이 아닌 부탁이라? 재미있군.’

그러나 드래곤의 눈동자에 즐거움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움이나 부탁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몇백 년간 골치 아팠던 문제를 이제 와서 해결하려니 두 쪽 다 출혈이 클 터.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끝까지 싸우고자 합니다.’

두 엘프 왕국의 갈등 상황에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관계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물론 한쪽이 투항한다면 두 종족 모두 살아남을 것이나-’

엘 메르의 왕이 무감각한 눈을 들어 올렸다. 그의 밝은 오팔과 같은 눈동자가 드래곤의 금안과 공중에서 직선으로 부딪쳤다.

‘하지만 그런 거짓된 삶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치 않기에.’

엘프들의 고집이란.

골드 드래곤은 엘프의 왕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멋들어진 입술을 열었다. 그들이 이 전쟁으로 지키려는 것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명예였다.

‘그래. 우리들에게 시간이란 차고 넘치는 것 아닌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짧은 물음에도 페나트는 무엇을 물어보는지 단박에 알아차리고는 대답했다.

‘달의 기운이 다시 반쯤 차올랐을 때입니다.’

‘금방이군.’

드래곤은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테라스 너머로 어린 엘프들이 뛰어다니며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하하하 웃는 목소리가 들렸고, 광장의 악단의 멋들어진 하프 연주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연인들의 사랑의 속삭임도 들렸다. 몇백 년치의 이야기들이 드래곤의 귓가에서 조잘거렸다.

이 모든 것이…… 테라스 밖을 바라보고 있는 골드 드래곤을 향해 엘 메르의 왕 페나트는 긴 은발 머리를 스르륵 늘어트리며 말했다.

‘위대한 존재시여. 안타까워 마십시오. 우리 엘프들은 모두 전사로 태어났으며, 태어난 모습 그대로 죽을 것입니다.’

여전히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페나트는 꼿꼿이 앉은 자세로 기다란 옷소매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차를 마셨다. 명예로운 죽음을 이야기하는 왕의 얼굴에는 후회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앞에서 안타까운 감정을 보이는 것은 실례였으며, 그의 선택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했다. 드래곤은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열었다.

‘그렇군…… 그래, 마지막 인사라…….’

페나트와의 오랜 시간들이 드래곤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좋은 말상대가 되어 주어 즐거웠어.’

‘즐거우셨다니 다행이지요.’

찻잔 두 개가 달칵거리는 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둘 모두 만약이라는 단어는 꺼내지 않았다. 드래곤과 엘프는 이 싸움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