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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82화 (82/184)

82화

주륵, 아드리안은 시선만 아래로 내려 목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

“귀가 멀었나?”

아무래도 저놈이 원하는 것은 이 상태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인 듯했다. 아드리안은 그 상태에서 입술을 열었다.

“……미하일 루스- 윽!”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의 손님으로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던 것이 단번에 막혔다.

뭐야. 끝까지 들을 것도 아니면서 왜 물어본 거지? 아드리안은 날카로운 검에 의해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린 채였다.

“아하, 조금 머리가 모자란 놈이었군.”

네 소개를 하란 말이었는데.

차가운 목소리는 그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손속 없이 칼날을 목 쪽에 더 들이민 탓에 아드리안의 목이 깊게 베였다. 뚝, 뚝 핏방울이 검날을 타고 흘려내렸다. 흰 셔츠가 피에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뭐 하느냐. 꿇리지 않고.”

그의 명령에 아드리안의 등 뒤로 절제된 바닥을 두드리는 발걸음이 들렸다. 그러고는 양팔을 뒤로 억세게 꺾고 몸을 한 바퀴 돌렸다. 명령을 이행하는 인간들은 오금을 검대로 눌러 단번에 무릎을 꿇렸다. 탁,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양 무릎에 느껴졌다. 그런 그의 앞으로 검을 든 남자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냥 미하일이랑 같이 갈걸. 아드리안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앞에는 미하일과 비슷하게 생긴 흑발 머리 남자가 이쪽을 한껏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저게 유명하신 그 알릭스 데 이네하트겠지.

검을 든 남자의 등 뒤에는 기사 두 명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아드리안을 억지로 바닥에 무릎 꿇게 한 기사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전하. 막내 왕자님의 손님이 어제 왕성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그래? 이게 그 손님인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는 사실 관계에는 관심 없는지,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휘두르고 싶은 것처럼 검날을 비틀어 댔다. 동시에 아드리안의 입술에서 “……윽.”이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흠, 화려한 금발에 봐 줄 만한 얼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전하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하니 이놈이 바로 그 ‘알릭스’임이 틀림 없었다. 그때 들었던 미하일의 평가대로였다.

“혹시 마법을 잘 다루나? 만약에 그렇다면 아주…….”

남자는 아드리안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래, 이 정도 생김새에 금안까지 가지고 있는 놈을 구하기는 힘들겠지.

“애들 연극치고는 정말 그럴듯할 텐데 말이야.”

“…….”

지금 사람 목에 검을 댄 채로 뭔 말을 하는 거야. 이 상태로 대답을 하라고? 아드리안이 아무 말없이 알릭스와 마주 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빠르게 뛰어오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알릭스!”

허억, 허억 계속 달려온 건지 미하일은 숨을 가쁘게 들이쉬며 외쳤다. 왕자의 뒤에는 하인 하나가 뒤따라 뛰어왔는데, 아마 그가 왕자에게 이 상황을 전달한 듯싶었다.

“이게 무슨……?”

미하일은 알릭스가 들고 있는 검을 인상을 찌푸린 채 바라보다 그 끝을 확인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검 끝에는 아드리안의 핏방울이 맺혀 어느새 셔츠가 젖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 칼을 들고 설치던 인간은 미하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사람 좋게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바사미엘에서 지내는 건 좀 어때?”

“…….”

막내 왕자는 형님의 인사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빠르게 그 앞으로 걸어가 날카로운 검날을 손으로 잡아 위로 올렸다.

“……일어나.”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고 있는 아드리안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켰다. 아드리안은 일어나려다 윽, 하는 신음소리를 뱉으며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목에 손바닥을 대려 했다.

“아드리안, 상처에 손대지 마.”

바로 궁의를 불러야겠군.

미하일은 그 손을 빠르게 잡아채며 중얼거렸다. 왕자의 눈은 여전히 큰형 알릭스에게 꽃힌 채였다. 궁의를 부르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형님, 왕성의 손님 대접의 격이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졌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데려온 손님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루스, 오랜만에 보는 형님에게 할 말이 그게 다야? 서운하구나.”

“……그 동생에게는 미하일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습니다만.”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차갑게 알릭스를 노려보던 미하일이 아드리안의 팔을 잡아끌어 이윽고 자리를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흠, 알릭스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왕성에 너희를 초대한 건 나야.”

“……뭐?”

“간만에 막냇동생의 얼굴이나 한번 보고…… 그 소문의 주인공도 만나 볼 겸 해서.”

알릭스는 아드리안의 핏방울이 맺힌 검을 대강 땅에 한 번 털고는 검집에 넣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검집째로 팔을 뒤로 뻗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공손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어차피 내가 초대한다 하면 네가 안 데리고 올 게 뻔하잖아. 조금 수를 썼지.”

“그런걸 보통 사기라고 부릅니다.”

미하일은 다친 아드리안을 제 등 뒤로 보내고 큰 형님의 어이없는 주장에 혀를 찼다. 소문의 주인공이 나야? 아드리안은 왕자의 등 뒤에서 목에 난 상처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인상을 썼다.

“내가 그 정도 자격은 있잖아?”

“대체 무슨 자격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테일러 샵 영수증을 하나 받았는데 말이야…….”

아, 미하일이 붉은 눈동자를 치켜뜨고는 짜증스레 대답했다.

“……겨우 그깟 푼돈가지고 이러깁니까?”

“내가 좀 속이 좁거든. 점심을 준비하라 했으니 간단하게 야외에서 식사나 하지.”

궁의도 거기에 불러 놨어. 알릭스는 웃으며 왕성의 정원 쪽을 가리켰다. 미하일은 정원 쪽을 한 번, 아드리안의 목에 난 상처를 한 번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서 내가 왜 이 이상한 분위기의 식사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

아드리안은 본인의 앞에 놓인 매끄러운 찻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아드리안 바로 옆에는 왕성의 궁의가 자리를 잡았다. 그는 날카로운 칼에 베인 목의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진단을 빠르게 내렸다. 그러고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더니 상처 바로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는 회복 주문을 외웠다.

드래곤이 직접 치료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느렸지만 속살을 벌리고 있던 상처는 그 주문에 천천히 틈을 메우며 붙었다. 고통도 점차 줄어들어 완전히 아물 때쯤에 목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미하일은 입을 꾹 다물고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상처가 완벽히 사라지자 궁의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며 그제야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길고 길었던 침묵 속의 식사가 끝나자 사용인들은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디저트를 내려놓았다.

“루스.”

번뜩- 드래곤은 찻잔에 박혀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알릭스의 호명에 고개를 들어 올린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아드리안의 옆에 앉아 있는 미하일이었다. 그는 힐끔, 옆의 아드리안에게 ‘넌 왜 반응해.’라는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만…… 아드리안은 머쓱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부르실 겁니까.”

알릭스는 막냇동생의 뾰족한 반응에 피식 비웃음을 걸치며 말을 이었다.

“그 고귀한 은발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루스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

아드리안은 둘 사이에서 조용히 차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 미하일의 미들네임은 ‘루스’였으나 알릭스라는 놈은 카를로와 똑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하, ‘루스’는 왕가의 자손 중 건국왕의 은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에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었군.

“금발 머리의 평민과 어울린다는 것보다 더한 소문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이다. 선대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그만둬.”

“……할 일 없는 귀족들이나 떠들고 다니는 헛소리인 걸 충분히 아실 만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미하일은 차가운 얼굴로 자신의 몫의 차를 한 모금 넘겼다. 하하, 알릭스는 막냇동생의 이야기에 작게 미소 지었다.

“루스타바란 왕국민들이 좀 낭만적인 부분이 있잖아. 그들이 건국왕과 대마법사의 전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참…….”

알릭스의 잘생긴 입술이 잔뜩 비뚤어졌다. 그의 잔혹한 성격이 눈동자에서 뚝뚝 묻어났다.

“시끄러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거든.”

“…….”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알릭스의 표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움직임을 멈췄다. 왕성에서 저런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는 놈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알릭스는 수틀리면 금방이라도 아드리안을 죽일 수 있는 권력과 잔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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